소설리스트

검술 명가의 마왕님-29화 (29/247)

<검술 명가의 마왕님 29화>

옵티멈 본사.

오랜만에 만난 김연희와 박민지 모녀가 차를 즐기고 있었다.

“향 좋다.”

“그래? 이번에 새로 들어온 원두인데 챙겨 줄게. 머신은 있지?”

“응, 잘 마실게.”

누군가는 그랬다. 엄마와 딸의 관계는 나이를 먹을수록 친구가 된다고.

김연희과 박민지가 꼭 그랬다.

“레이드는 어땠어? 괜찮았어?”

“괜찮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겨우 6레벨인데.”

“그래도 신입 멤버들 데리고 갔잖아. 손발도 안 맞는 애들하고 레이드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니? 엄마가 말은 안 했어도 얼마나 걱정 많이 했게?”

“다들 잘했어.”

“잘하긴. 딱 봐도 얼 타고 있었구만.”

“신입이잖아. 긴장해서 그런 거지.”

“신입이라도 아카데미 4년을 보낸 애들이야. 못하면 욕 들어먹어도 싸.”

“너무 쪼으지 마.”

둘이 동시에 잔을 든다.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차를 마시는 모습조차 놀랍도록 비슷하다.

실제로 외모만이 아니다. 성격, 취향, 분위기도 판박이인 두 사람.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김연희가 박민지와 유독 친밀하게 지내는 것도.

“흐응, 엄마는 우리 딸이랑 이렇게 차 마시니까 좋은데, 정작 이놈의 딸내미는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는 것 같네? 뭐야? 뭐가 궁금한데.”

“아닌데?”

“아니긴 뭘. 얼굴만 봐도 딱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말해 봐. 뭐야?”

“…….”

박민지가 우물쭈물, 말을 꺼내려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다.

그 모습을 본 김연희는 귀여워 웃어 버렸다. 누가 알까. 신속의 검사라는 ‘백호’에게 이런 귀여운 모습이 있는 줄 말이다.

“엄마가 맞춰 볼까?”

“에?”

“기혁이 이야기지?”

“아!…… 아닌데?!”

“박민지, 너 엄마 뱃속에서 나왔거든. 어디서 돼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해.”

“아으응-.”

그랬다.

밖에서나 백호로 군림하지, 집에서는 고양이나 다를 바 없는 박민지였다.

“그래서 뭐가 궁금해?”

“……빛나가 기혁이 사고 쳤다고.”

“그 얘기구나. 빛나가 소식이 밝다니까.”

“정말이야?”

“하아…… 응, 정말이야. 네 동생이 사고 쳤지. 그것도 아주 대형 사고로.”

한국 아카데미를 대표하는 5개의 빅 이벤트가 있다.

에이전트로 이어진 라인을 본격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동아리’는 ‘인맥’을.

새로운 인원과 함께 치르는 첫 시험인 ‘중간고사’는 ‘협동’을.

본격적으로 지휘관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말고사’는 ‘지휘’를.

단체 행동에 죽여 왔던 자신의 색을 만방에 알릴 수 있는 무대인 ‘교내 랭킹전’은 ‘무력’을.

실수를 되돌리고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축제’는 ‘기회’를.

이렇게 5대 이벤트는 각각의 의미를 갖고, 가까이는 아카데미의 성적, 멀리 보면 향후 초인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중간고사가 끝난 이 시점에 남은 건 기말고사와 교내 랭킹전, 그리고 ‘영입 시장’이 열리는 축제.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

“네 잘난 동생이 아카데미를 뒤집어 놓은 거지. 하아~ 너무 대책 없다니까. 저 성질 머리 누구 닮은 거야.”

“아빠는 아니야.”

“어머? 너 지금 엄마 성격 나쁘다고 말한 거니?”

“아니야? 나도 엄마 닮았는데.”

“흠…….”

설득력이…… 있어!

“근데 기혁이가 날뛴 게 뭐가 문제야? 그런 걸로 치면 나도 만만치 않았는데?”

“킥, 그랬지. 우리 민지도 방방 날뛰던 시절이 있었지. 너 기억나니? 그때 1학년 야외 수업 때 건달들 족치다가 빌런 조직까지 부숴 놓은 거.”

“그 이야기는 그만해. 흑역사야. 말 돌리지 말고 기혁이 이야기나 해 줘.”

“킥, 기지배. 부끄러운 건 아네? 그립다 정말. 그런데 딸아. 다혈질에 엄마를 닮아 성질 머리 더러운 우리 딸아. 넌 기혁이에 비하면 양반이었어.”

“……!”

단신으로 8개조를 썰어 버린 박민지.

마음대로 날뛴 건 마찬가지지만 그녀에게는 은빛나라는 조율자가 있었다. 그런데 박기혁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브레이크 없이 모두 공평하게 부숴 버렸다.

김연희는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10개 조를 해체시켰어. 게다가 무슨 기준으로 사냥감을 골랐는지 숫자가 많은 조만 골라서 해체시킨 거야. 그 결과가 어떨까?”

“어떤데요?”

“절반이 한참 넘은, 1학년 총원 60퍼센트의 인원이 손가락만 빨게 됐어! 유령이 됐다고! 기말고사는 고사하고 수업 자체에 제동이 걸렸단 말이야!!”

협동을 중시하는 한국 아카데미의 필수 과목은 조와 팀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조가 해체되며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유령이 됐다.

다시 말해, 그들은 필수 과목을 전부 못 듣게 된다는 말이다.

총원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진 수업이, 정상적으로 가능하겠나?

불가능하다.

“기말고사, 교내 랭킹전, 축제. 향후 있을 모든 행사가 몽땅 엉망이 된 거지.”

김연희는 ‘두야, 두야.’ 끙끙 앓으며 커피를 들이켰다.

심각한가 보네. 박민지는 자신의 몫으로 아껴 놨던 초코 케이크를 엄마 쪽으로 슬쩍 내밀며 말했다.

“너무 비약 아니야? 모의 레이드를 치르는 기말고사야 엄마 말대로 힘들어졌다지만…… 교내 랭킹전이랑 축제는 개인전이잖아.”

“맞아. 우리 딸 말대로 개인전이지. 자기만 잘하면 돼. 그런데 딸. 네 동생이 세상에! 말도 안 되는 것을 만들어 냈지 뭐야!!”

“…….”

“아포칼립스.”

아포칼립스(Apocalypse).

이제껏 세상에 드러난 적 없는 ‘고유 마법’이란 새로운 마법 체계가 등장했다.

구축도, 회로도, 변형도, 작용도.

기존의 마법과는 동떨어진 완전히 별계의 마법 체계.

“교내 랭킹전으로 볼까. 1:1 토너먼트로 진행되는 대결. 다 집어치우고 이 랭킹전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기본으로 하나가 갖춰져야 돼. 바로 경쟁.”

승패가 명확하고 순위가 정해지는 랭킹전.

이건 경쟁이 기본으로 갖춰져 있어야 성립하는 거다.

그런데 박기혁이란 이레귤러가 나오며 경쟁이 똥통에 처박혔다.

마법 체계를 새로 만들 정도의 천재가 나왔는데, 어느 미친놈이 도전하겠나.

“자연스럽게 축제로 이어지지. 아카데미 축제가 왜 유명한지는 네가 더 잘 알지?”

“영입 시장 때문이지.”

“그래, 영입 시장.”

총 5일에 걸쳐 열리는 교내 축제.

이 기간에 아카데미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영입 시장이 열린다.

조와 동아리, 심지어 외부 에이전트까지도 이 기간 내에 아카데미생에 대한 모든 영입이 이뤄지는 것이다.

무엇을 기반으로?

“중간고사, 기말고사, 교내 랭킹전의 성적으로.”

“……허.”

“딸내미 표정 보니, 이제야 상황 파악이 돼?”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다섯 개의 빅 이벤트가 사실은 실타래처럼 연결돼 있던 것이다.

“중간고사가 엉망이 된 시점에서 이미 물은 엎질러졌어. 많이 양보해 기혁이가 아포칼립스라는 것만 공개하지 않았더라도 어느 정도 수습은 했겠지만.”

김연희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됐네?”

이제 모든 경쟁은 무의미하다.

“이 시점에서 기혁이에게 도전하는 애들이 있을까? 장담한다. 없어. 이건 승부욕 이전의 문제야.”

“그렇겠지…….”

등이 보여야 상대를 쫓을 생각을 한다. 등이 보이지 않은 상대, 더군다나 상대는 설명조차 불가능한 미지의 괴물이다.

모두 포기한다.

“우리 잘난 아들내미가 아카데미 모두를 들러리로 만들어 버린 거야.”

“……행사의 의미가 없어졌구나.”

“어, 지금 4학년하고 3학년들 교내 랭킹전 패스하고 실습으로 몰려갔단다.”

“걔들은 필수가 아니니까.”

“정답, 2학년하고 1학년만 죽어 나가는 거지. 걔들은 교내 랭킹전이 필수 참가니까. 그래서인가 1학년 휴학생들도 대거 등장했단다.”

“후우…… 머리 아파.”

“사실, 아카데미가 이 사태를 수습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해.”

결자해지라 했다.

문제의 원인이 박기혁에게서 비롯됐다면, 박기혁 본인이 해결하면 된다.

가령 이후에 있을 행사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확답만 받아도 아카데미 측에서는 교내 랭킹전과 축제는 건질 수 있을 거다.

그런데 말이다.

불능자, 비운의 천재, 망가진 검호.

이제껏 온갖 멸시와 비난에 억눌려 왔던 박기혁이었다.

그런 아들이 갈고닦았던 이를 마침내 드러냈다. 가진 바 포텐셜을 폭발시켰다.

과연 기혁이가 협조해 줄까?

“글세, 난 아니라고 보는데.”

김연희도, 박민지도 생각했다.

박기혁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고.

*   *   *

“싫은데요?”

“이보게, 기혁 군!”

한편, 김연희와 박민지가 이야기하던 시간에, 박기혁은 아카데미 학장실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앞에는 천수만 학장이 앉아 있었다.

둘이 함께 있는 이유는.

정확히 김연희의 예상대로였다.

“학장님 말은 닥ㅊ…… 음, 실례했네요. 어쨌든 잠자코 있어 달라는 거잖습니까.”

“비약입니다. 난 그저 자네가 동기들을 배려해 작은 양보를 해 달라는 말이었습니다.”

“비약이란 건, 기말고사에 교내 랭킹전, 영입 시장에도 참여하지 말라는 걸 겨우 양보라 말하는 게, 비약 아닐까요?”

“……기혁 군이 벌인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이미 이번 학기가 엉망이 됐습니다. 자칫하다간 이번 기수가 엉망이 될 수도 있단 말입니다!”

예를 들어 박기혁과의 경쟁을 피해, 이번 1학년이 대거 휴학한다면? 그들이 내년에 복학한다면? 내년 1학년은 수업받을 자리도 없는 엉망진창이 될 게 불 보듯 뻔하다.

오바하는 것 같나? 실제로 요 며칠 1학년 중 30명 이상이 휴학계를 던졌다. 모두 조가 해체된 학생들이다.

“이해가 안 되네. 아니, 그렇잖아요.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다고 경쟁을 포기한다니.”

“그냥 뛰어난 게 아니라, 아득히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등은 보여야…… 아니, 티끌만큼의 그림자라도 보여야 따라갈 의지가 생기는데, 박기혁은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재능이 폭력이 된 상황.

천수만은 아카데미를 책임지는 학장으로서 박기혁이란 존재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솔직히 인정하겠습니다. 전 박기혁 군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했습니다. 교육자임에도 기혁 군이 앓았던 ‘병’에 선입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제안하지 못했죠.”

“제안? 무슨 제안이요?”

“그건…….”

오랜 세월 교육자 생활을 해 온 천수만이다. 그는 뛰어난 재능과 가능성을 구별할 수 있는 눈이 있고, 그해 최고의 재능을 가려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천수만은 그렇게 찾아낸 최고의 재능, 소위 말하는 천재들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가진 바 실력을 숨겨 달라. 적당히 동기들의 수준에 맞춰 달라고.

그래만 준다면 최대한 편의를 보장해 주겠다.

“오…… 그럼 이번 기수에서도?”

“네, 1조장 진유리가 거래에 응했습니다.”

덕분에 1조는 봉사활동을 교내에서 진행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식으로 편의를 봐주며 격차를 줄이고, 평균의 재능을 가진 일반 학생들에게 희망을 준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나도 진유리 같은 천재를 따라잡을 수 있지 않을까?

천수만도 안다. 이게 거짓된 희망이라는 걸.

하나, 비록 거짓된 희망일지라도, 학생들이 꿈꾸고 성장할 수 있다면 그것이 모두를 위한 일이라 천수만은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천수만의 이야기고.

박기혁은 생각이 달랐다.

“그, 진유리한테 제공한 편의를 저한테도 해 준단 겁니까?”

“기혁 군이 적당히 균형만 맞춰 준다면. 네, 그렇습니다.”

“모두를 위해 말이죠?”

“네, 모두를 위해 말입니다.”

“음…….”

느긋하게 앞에 있는 커피를 들이켠 박기혁은.

“역시 별로네요.”

“기혁 군!”

No.

거절이었다.

“몇 가지만 물어볼게요. 학장님, ‘여기’가 어디죠?”

“…….”

역시 눈치 빠른 천수만은 질문을 찰떡처럼 이해했다.

여기는 아카데미.

초인을 양성하는 교육 기관.

그렇다면 아카데미에서 우수한 학생은 뭘 의미할까?

간단하다. 강한 놈이 우수한 놈이다.

인성? 행실? 노력? 정신? 가능성? 잠재력?

중요하지. 중요한 건 아는데…… 그걸 어떻게 객관적으로 볼 건가?

여기가 소설이고 네 눈에 스카우터가 있거나 상태창이 있다면 객관화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안타깝지만 이곳은 현실이다.

그딴 거 없다. 가능성을 어떻게 알 건데?

돌고 돌아 볼 것은 결과. 가진 힘밖에 볼 수 없단 말이다.

“저는 수석으로 입학했습니다. 비록 조를 만들 때 약간의 잡음이 있었지만 정당한 심사를 통해 조장이 됐습니다.”

이해한다.

압도적인 재능이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동아리 때도 불미스러운 충돌이 있었죠. 교수님들과 학장님이 위그드라실을 불편해하는 것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해한다.

자신의 재능이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절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네, 중간고사에 날뛴 거 인정합니다. 솔직히 사심이 들어갔습니다. 마나 허무증, 무능자. 언제까지 이딴 헛소리나 들을 순 없잖습니까.”

이해한다.

모두의 미래를 위해 저들의 가능성을 지켜 줘야 한다는 것을

다 이해는 한다.

그런데 말이야.

“제가 아카데미의 교칙을 어긴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어쩌라고?

“무슨 명분으로 제게 이해를 강요하는 건가요?”

명분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때론 전부가 되는 법이다.

초인을 양성하는 곳에서 압도적인 강함을 드러냈다고 자중해 달라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아니, 집어치워.’

이해고, 명분이고, 옳고 그름 따위는 다 집어치워라.

언제부터 내가 그딴 거 생각하고 움직였나.

일순간 박기혁의 눈이 달라졌다.

“확실히 짚고 넘어가죠. 저를. 아니, 나를. 강제하려 마세요.”

누구도 나를 강제할 수 없다.

그게 설령 선의라도, 모두를 위해라 해도……

X까라 해! 나는 내 꼴리는 대로 살 테니까.

“난 내가 원하는 대로 삽니다.”

*   *   *

딸칵.

박기혁이 문을 닫고 나가고, 천수만은 생각에 잠겼다.

이제야 알겠다. 박기혁이란 남자를.

알 수 없이 박기혁이 신경 쓰였던 이유도.

“난 내가 원하는 대로 삽니다.”

“나라는 존재를 인간의 잣대로 평가하지 마세요…….”

“……자네는, 위그드라실과 닮았군.”

천수만은 한참 동안이나 박기혁이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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