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28화>
이건 그러니까.
무소불위의 힘으로 천하를 공포로 물들이던 시절, 마왕으로 불리던 때 유일한 나의 역린을 들켰던 이야기다.
그것도 제국을 통틀어 가장 껄끄러웠던 존재에게 말이다.
“당신?”
“설마…… 성녀?”
“……여기서 마왕을 뵐 줄은 몰랐는데요. 이런 걸 아리아의 인도라 해야 할까요. 아! 내 정신 좀 봐. 처음 뵙겠습니다. 아리아의 신실한 종 라네 아리아라고 해요, 마왕님.”
“퉤, 지랄 맞네.”
신분을 숨긴 채 고아원에서 아이들의 빨래를 널고 있다가 딱 눈이 마주친 인간이 하필이면 성녀라니. 지금 생각해도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의외예요. 당신이 아이들을 좋아하다니.”
“아니야! 조……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이, 이건 그러니까…….”
“그렇게 당황할 필요 없답니다. 마왕이라고 어떻게 악만 가득하겠어요. 정도만 다를 뿐 모든 인간에게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법인데. 물론 마왕인 당신에게 이런 ‘깜찍한’ 선의가 있을 줄 몰랐지만요. 훗.”
“젠장! 재수 없는 년.”
칠흑 마탑의 대공자로 대외 활동이 자유로워질 무렵, 영감의 소개로 인연을 맺은 고아원이 있었다.
그렇게 처음 아이들을 마주했을 때, 난 이해할 수 없는 거부감이 몰려왔다.
왜일까…… 주체할 수 없는 불쾌감에 의문이 들 정도였고, 난 나중에서야 이 불쾌감의 정체를 알게 된다.
“트라우마였다. 빈곤, 폭력, 악의. 시궁창에서 자란 내 빌어먹을 유년 시절을 비춰 준 거야. 그래서 불쾌했던 거고.”
“…….”
“영감은 알았던 것 같다.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가 남긴 상처가 생각보다 깊다는 것을…….”
“…….”
“그때부터 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여기로 왔…… 젠장, 내가 왜 너랑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지?”
“아리아가 말씀하시길, 웃음과 슬픔은 나누라 했습니다. 괘념치 마시고 이야기하세요.”
“재수 없는…… 후우, 젠장.”
“후훗. 깜찍해라. 쑥스러워 마시길.”
당시의 난 ‘아포칼립스’를 완성하며 마왕으로 최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공포의 대명사로 우는 아이도 내 이름만 들으면 눈물을 꾹 참을 정도였다.
그런 내게 일말의 약점은 용납할 수 없었다.
완전무결의 강함이야말로 내 프라이드였으니까.
그렇게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에 들어갔다.
용을 사냥하려면 용의 레어로 들어가야 하는 법.
며칠간 연구실 대신 고아원에서 상주하며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처음에는 힘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다가오는 아이들이 껄끄러웠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변하더라.
귀찮던 아이들이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고, 억지로 보내던 하루가 짧아져만 갔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공부하는 시간일 뿐이다.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홀로 되뇐 다짐이지만 어느새 잠자던 내 옆에는 꼬맹이들이 누워 있었다.
그리고 몸부림치던 아이들의 이불을 끌어올려 주는 순간.
난 봤다. 거울 속 나를.
웃고 있었다.
그래. 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대신 이 순수한 아이들을 좋아하고 있었다.
“내가 아이들을 보며 웃고 있더라. 하아, 빌어먹을…….”
“왜 욕을 하세요. 당연한 건데. 불행이 할퀴고 간 상처를 지우는 최고의 명약은 행복이랍니다. 저 성녀가 아는 걸 마왕인 당신이 모를 리 없잖아요.”
“……약점을 지우려 했는데 또 다른 약점이 생겼는데, 욕이 안 나오냐.”
“아리아가 말씀하시길, 본디 인간은 불안전한 존재라 했습니다. 약점을 인정하고 사랑하세요. 왜 자신의 선함을 외면하려 하십니까.”
“큭, 역시 성녀네. 약점을 사랑하라고? 지랄 마. 약점은 족쇄야.”
“왜 족쇄라고 생각하나요. 안전핀일 수도 있지 않나요?”
“우리가 인간이니까. 인간은 교활해. 약점이 보이면 어떻게든 약점을 후벼 파는 게 인간이야.”
“당신은 너무 인간을 못 믿어요.”
“네가 꽃밭에 사는 거겠지.”
인간을 사랑하는 성녀와 인간을 불신하는 마왕.
나와 그녀의 간극이었고, 이는 평생 좁힐 수 없는 간극이었다.
“알고 있어요. 당신에게 적이 많다는 걸. 개인적으로 성질을 좀 죽이길 바라지만 그럴 리 없겠지요. 그게 마왕인 당신의 본모습이니까. 필히 당신의 행보에 분란이 뒤따를 테고 족쇄라 표현한 저들이 다칠까 염려되시는 거겠죠.”
“…….”
“후우…… 마왕이여. 조금만 돌아봐요. 언제까지 홀로 남겨질 작정인가요. 이제 스스로를 사랑할 때도 되지 않았나요?”
스스로를 사랑하라.
끝내 성녀의 물음에 답할 수 없었다.
그날, 너의 품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도.
* * *
이야기가 빙빙 돌았는데, 뜬금없이 사랑이 왜 튀어나왔냐면 모두 요 요망한 악동들 때문이다.
“사랑이라고?”
한 뭉텅이의 아이들에게 잡혀 있는 나.
“응! 사랑!”
“오빠 첫사랑!!”
“나. 나! 나! 나는 있어! 나는요, 미희를 사랑해!!”
“진짜?!”
“에헤헤, 현수는 미희를 좋아한데요!”
“너!!”
“싫엇!! 으아아앙!!”
“넘어진다. 뛰지 말고.”
양쪽으로 머리를 곱게 땋은 미희가 울며불며 도망가고, 현수는 놀리던 아이를 쫓아간다.
이게 아이들의 치정 싸움인가.
혼란하다 혼란해.
하지만 이런 소란 속에서도 끈질기게 내 쪽을 주시하는 아이들도 있었으니.
“꼬마들은 무시해요. 그래서 첫사랑은.”
“맞아. 오빠. 첫사랑. 첫사라앙!!”
“우와아아아아!!
“쓰읍, 목 다친다. 조용조용 말해. 내 첫사랑이 고함칠 정도로 궁금하냐?”
“응!” “응!”
10대.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이었다.
“허, 요것들아. 너희들이 사랑을 알아?”
“우리도 알 건 다 알거든!”
“맞아! 나 고백도 받았어. 연주는 남자 친구도 있다구!”
“남자 친구 아니거든. 같은 반 짝꿍일 뿐이거드은!”
“헹, 그러면 무슨 사인인데.”
“써, 썸? 암튼 오빠! 오빠 첫사랑!”
“얼르은!!”
“…….”
똘망똘망한 시선이 쏟아진다. 부담스럽다. 진심인가……
요즘 아이들은 조숙하다더니.
“허…… 나 참…… 알았다,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 봐. 첫사랑이라…….”
첫사랑이라. 첫사랑이라…….
막상 생각해 봐도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나마 성녀 얼굴이 떠오르는데, 넌 좀 빠져라. 어디서 전우애가 기어 들어와.
슬슬 불안하다.
없나?
정말 없나?
전생의 나여, 넌 대체 무슨 인생을 살았던가. 새삼 전생의 내가 불쌍해 보였다.
“……정말 딱히 없었구나. 첫사랑.”
“예?! 진짜?”
“거짓말! 거짓말하고 있어, 오빠는!”
“어떻게 오빠 얼굴로 첫사랑이 없을 수 있지? 그치 연우야?”
“응응! 저기 티비에 나오는 오빠들보다 크고 잘생겼는데. 왜 없지?”
“헹, 난 그럴 줄 알았어. 아까 내가 말했잖아, 곰탱이 오빠는 연애 안 해 봤다니까. 했으면 저렇게 눈치가 없을 수 없어.”
“진짜였어. 와…….”
마치 생태계 희귀종을 보는 듯한 여자아이들.
이게 그렇게 신기하나…… 모르겠다. 예전에도 그렇지만 이맘때 소녀들의 감성은 불가사의한 것 같다.
“그…… 그러엄! 이상형! 오빠 이상형이 모야!”
“후우, 첫사랑 다음은 이상형이냐? 이건 또 왜 궁금한데.”
“아, 눈치 좀! 여기 미연이가 오빠ㄹ…….”
“닥쳐! 조용해!”
“키키, 난! 브이포 창민 오빠가 이상형이야! 으악! 말해 버렸어!”
“너어! 창민 오빠는 내 꺼라 했지!”
저마다의 원픽을 말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소녀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차라리 혼자 레이드를 뛰고 말지, 이 소악마들에게 휘둘리는 것은 내 정신 건강에 해로웠다.
얼른 스탠스를 바꾼다.
남자, 남자애들 어디 있냐. 시커먼 남정네들이라면 이야기가 통하겠지.
“너희들 뭐 하냐?”
“에? 곰탱이 형. 미니카 만드는데요?”
“저는 레고요. 이걸로 성 만들 거예요. 헤헤.”
“술래잡기 할 사람 여기 여기 붙어라!”
“우아아아아!”
하지만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했던가.
그때부터 눈 한 번 깜빡하면 술래가 바뀌는 술래잡기를 하다, 자연스럽게 숨바꼭질의 늪으로 이어지고,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골대도 불분명한 무제한 룰 축구의 골키퍼가 돼 있었다.
아이들의 불가사의한 체력을 무시한 간과한 결과였다.
그렇게 저녁, 해가 질 때쯤 난 겨우 아이들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 * *
아그작- 아그작-
“휴우, 커피가 들어가니 살 것 같네요. 힘들었어요. 아이들이랑 놀아 주면 된다고 해서 안심했는데, 아니에요. 오히려 사냥보다도 힘든 것 같아요.”
“원래 저맘때 애들은 피곤하다. 한국말로는 ‘기가 빨린다.’라고 표현하지.”
“기가 빨려요? 마나 드레인인가요? 정확한 표현이네요. 마나가 탈진된 기분이에요.”
콸콸콸-
“그런데 준우, 의외이지 않았나요? 오늘 애들이 기혁한테만 있던 거요. 기혁이 이렇게 아이를 잘 돌볼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동감이다.”
아그작- 아그작-
“원장님도 이렇게 아이들이 따르는 사람은 오랜만이라고 칭찬ㅎ…….”
콸콸콸-
“후우…… 저기요, 기혁. 교양 있게 좀 먹으면 안 되나요? 아까부터 정신 사나워요! 그리고 대체 몇 잔을 먹고 있는 거예요. 얼음은 또 얼마나 깨먹고요. 이 안 시려요?”
“굉자능데?(괜찮은데?).”
아그작-!
이걸로 일곱 잔째.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까지 말끔하게 해결하고서 난 입을 떼었다.
“후우, 이제 좀 정신이 드네.”
상쾌하다.
혈관에 카페인이 가득 차는 기분. 끝내주네.
“잘 놀더니.”
“그래요. 기혁, 아이들 좋아했잖아요.”
“좋아하지. 좋아하는데, 피곤한 거랑은 별개 아니냐.”
우아하게 입을 닦고는 내가 해치운 잔해들을 한쪽에 쌓아 놨다.
“그래도 오늘 이 정도면 수월하게 한 거다. 놀아 주고, 청소 같은 잡일만 하면 됐잖아. 다른 곳이었으면 배는 힘들었을걸.”
“동감. 생각보다 훨씬 나았다. 밝아서 좋았다.”
“어머니가 신경 쓰신다고 하더라고.”
“좋은 일 하시네.”
“저기요. 나도 껴 줘요. 둘이서 무슨 말하는지 전혀 이해 못 하겠어요.”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인상을 찌푸리는 메리.
하긴, 우리 공주님이 이런 고생을 해 봤을 리 없다.
“애들이 밝지 않든? 저기 아이들 모두 고아야. 모두 한 번씩은 상처 받은 아이들이지, 그런데 밝잖아. 상식적으로 저렇게 밝을 수가 있겠냐.”
“아…… 그 말인가요.”
“다 이거 때문이다.”
준우가 엄지와 검지를 말아 쥐었다.
“동전? 캐쉬? 돈 말하는 거예요?”
“그래.”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속담이 있다.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절대다수의 문제가 돈으로 해결되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맞아요. 생각해 보니 아이들이 옷도 괜찮았어요. 잠자리나 먹는 것도 훌륭했고요.”
“옵티멈이랑 제휴된 보육원이라서 그렇다. 보통은 저렇지 않다. 궁핍하지.”
“어머, 준우. 잘 아는 것 같네요?”
“내가 생활해 봤거든.”
“……!!”
메리가 멈칫했다. 동공이 사정없이 떨린다.
의외로 소심하다니까. 메리는 떨리는 눈으로 준우의 눈치를 보다 안 되겠는지, 내 쪽으로 구원의 눈빛을 보낸다.
대충 해석하자면.
‘뭐예요? 무슨 일이에요? 기혁은 알았어요?’
라는 것이고, 어머니에게서 ‘부산 참사’가 뭔지 대충 전해들은 난 쓰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그…… 미안해요, 준우. 내가 눈치가 없었어요.”
“괜찮다. 신경 쓰지 마라.”
신경 쓰지 말라지만 준우의 얼굴에 내린 그늘은 신경을 안 쓰려야 안 쓸 수가 없다.
“…….”
“…….”
“…….”
분위기가 지하를 뚫고 들어간다.
안 되겠다.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자.
짝-!
“자, 피곤한데 빨리 이야기 끝내고 가자.”
“그래요! 일정요! 궁금했어요.”
“어떻게 되는 건가. 기말고사는 정상적으로 하는 건가?”
“아직 확정 난 거는 아닌데, 조금 복잡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