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25화>
이건 중간고사가 시작되기 전 나눴던 대화다.
“잠깐만요. 내가 잘못 들었나요? 그러니까 정리를 해 볼게요…… 이 강의실이 너무 비좁다. 그래서 시끄럽다. 고로 절반 정도 줄여 놔야겠다. 음…… 기혁, 제정신이에요? 겨우 이런 이유로 조를 없애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그치 준우야.”
“동감. 재미있겠군. 난 찬성.”
“하여튼 눈치 없는 준우. 넌 기혁한테 너무 물들었어요.”
메르헴이 끝까지 말려 봤지만 겨우 3명인 조. 다수결의 원칙으로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절망적이네요. 이곳에 정상인은 나밖에 없나요. 혼란스러워요.”
“포기해 메리,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아직 엎질러지지 않았거든요!”
“알았어, 알았다구. 자, 사냥감을 선별해 보자. 일단 14조. 그쪽 애들이 말이 많은 것 같더라고, 처음에 박살 내면 소문이 잘 퍼지겠지.”
“난 11조가 마음에 안 든다. 너무 많다.”
“타당한 의견이야. 11조 메모. 또?”
“9조. 꽤한다.”
“꽤해? 난 모르겠는데. 어쨌든 실력이 있다니까, 싸울 맛도 나겠네. 오케이. 9조도 메모.”
“틀렸어요. 너나 너나 모두 틀려 먹었다구요.”
“그래서, 메리는 의견 없어?”
“……후우, 6조요. 걔네들 재수 없어요.”
“대리 출석 아닌가?”
“들어 본 것 같네. 게이트 대리 출석하다가 걸려서 경고받은 조였지? 괘씸죄는 용서하면 안 되지. 잘했어, 메리.”
사냥감들을 물색했으면 다음은 방식을 정한다.
“마지막으로 정리하자. 먼저 내가 날뛴다. 서너 개? 얼추 그 정도 압도적으로 박살내면, 자연스럽게 아카데미 내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쏠리겠지. 경계도 강해질 거고.”
“그때가 나와 준우의 시간인가요?”
“응, 닥치는 대로 결투를 신청해 버려. 내가 뒤에 있는데 단체전으로 맞대응하는 멍청이들은 없을 테니까. 지금 너희들을 1:1로 이길 수 있는 애들은 거의 없어. 쾌적하게 사냥을 할 수 있지. 어때? 내가 만든 판이?”
“재미있겠군.”
“흠, 흠. 인정해요. 재미있겠네요.”
“그런데 나도 혼자 맞붙고 싶다.”
“아직 멀었지. 그런 의미에서 한 판?”
“콜. 올라와라.”
“으이구, 전투광들.”
흔히들 박기혁의 기행이 그의 더러운 성격 탓에 충동적으로 벌어진 것이라 믿지만, 사실 사냥감 물색부터 사냥 순서까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 * *
“온다!”
“막았……!!”
달리는 한준우의 앞을 가로막는 이들.
인의 장벽이라는 말처럼 정면이 완전히 봉쇄된 상황. 하지만 상대는 한준우다.
현란한 발놀림과 노련한 체중 이동. 거기에 무희 특유의 불가사의한 감각 제어까지 더해지니.
인의 장벽이 모래처럼 허물어졌다.
“젠장! 놓쳤어.”
“도망가. 빨리!!”
1차 방어선이 허무하게 뚫리자, 이제는 마법이 들이닥친다.
아무리 중간고사 기간이라도 정식 결투가 아닌 상황에서 직접 타격은 불가능.
하나 이를 다르게 말하면 직접 타격만 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가능이란 뜻이리라.
땅이 움푹 꺼지기도, 반대로 벽이 세워지기도 한다.
환영이 정신을 괴롭히는 것은 기본. 실제로 균형을 무너트리려고 바닥의 마찰 계수를 지워 버리는 둥, 각종 메즈를 비롯한 군중 제어기가 들이닥치고 있었다.
하지만.
한준우의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는데.
진로를 방해하는 마법? 마법이 완성되기 전에 달리면 그뿐.
정신을 괴롭히는 것? 기혁에게 당한 것에 비하면 이건 애들 장난 수준.
무희의 피를 이어받은 한준우다.
자신을 비롯해 타인, 이제는 공간 내의 감각까지도 제어하는 그가 겨우 이 정도 수준의 메즈와 군중 제어기에 휘말릴까.
순식간에 2차 방어선까지 뚫어 버리자, 마침내 한준우의 시야에 목표가 보였다.
“으으으! 조금만 막아 줘!”
중간고사 기간.
도전을 피할 방법은 사실상 하나뿐이다.
안전지대로 피하는 것.
강의실이나, 도서관, 기숙사 등등, 몇몇 지정된 안전지대로 숨는 것.
이 안전지대에만 들어가면 도전도 피하고, 결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코인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실력에 자신이 없는 하위권.
하나의 코인이라도 아쉽고, 성적이 문제가 아니라 자칫하면 조가 해체될 위기에 처한 하위권 조들은 하루 종일 강의실로 도망치고, 저녁에는 또 다른 안전지대인 기숙사로 쏙 달아나는 편법을 쓰기도 한다.
지금 조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강의실로 달리고 있는 8조장처럼.
현재 8조장의 주머니에 남아 있는 코인은 4개.
최소 5개를 걸어야 하는데, 그보다 작은 숫자라면? 이게 마지막 기회란 뜻.
조를 존속시키려면 도망쳐야 한다!
물론 마지막인 만큼 모든 조원을 동원해 건곤일척의 승부를 내는 방법도 존재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처럼 실제로도 많이 쓰이는 방법이다.
그러나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쁘다.
상대는 20조.
재앙이라 불리는 박기혁의 조다.
한준우와의 1:1을 피하려고 모든 조원이 달려드는 순간, 저쪽에서는 최종 병기, 인간 재앙 박기혁이 등장한다.
이야말로 늑대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나는 격.
절대로 피해야 한다! 무조건 막아야 한다! 무조건 도망쳐야 한다!
8조장이 이를 꽉 깨물고는 달린다.
동료의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려오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오직 강의실 문, 저기에 들어가려는 일념으로 성큼성큼 땅을 박찼다.
열 걸음, 여덟 걸음, 여섯 걸음.
이제 다 왔다.
한 걸음만 더, 제발 한 걸음만 더.
거의 나는 것처럼 강의실 문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마지막 한 걸음, 허공에 떠 있던 찰나의 체류 시간.
발이 강의실 문에 닿으려는 그 순간.
뒤통수가 서늘하더니, 8조장의 몸이 뒤로 쏠렸다.
“으아아악!”
복도에 나동그라지는 8조장.
한준우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잡았다.”
* * *
한편 아카데미 제2운동장.
무리들 사이에서 메르헴이 결투 중이다.
탱!
“으악!”
탱!
“쓰러져!”
탱!
“헉, 헉. 치사하게 방패 뒤에 숨다니!!”
혼자 방패를 내려치다 지친 상대를 메르헴이 한심한 눈으로 쳐다봤다.
‘정말, 별 볼 일 없네요.’
인정하기 싫지만 메르헴도 안다.
자신이 친구들 중에서 가장 처진다는 것을.
눈치 없는 준우가 멸종당하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실력 때문일 거다.
박기혁? 말이 필요 있나. 걔는 박기혁이다.
이런 애들이랑 붙어 다니니, 메르헴도 인간이기에 가끔 자신의 수준이 보잘것없는가 싶기도 했다.
진실을 말하자면.
크나큰 착각이다.
쿵!!
메르헴의 실드 차지에 사내가 튕겨져 나갔다. 마치 차량과 충돌한 듯 기괴한 충격음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비명조차 들려오지 않는 충격에 결국 사내는 벽에 부딪친 상태로 기절하고 말았다.
꿀꺽.
긴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메르헴이 머리를 쓸어 올린다.
그러고는 제 몸만 한 메이스를 까딱이며.
“다음 차례 오세요.”
악명 높다는 20조.
일곱 번째 조를 해체시켰을 때부터는 아카데미 최악의 빌런으로 여겨질 정도다.
메르헴은 이런 20조에서 좋게 말해 인간적, 나쁘게 말하면 만만해 보였다.
승률 80퍼센트가 만만해? 웬 말인가 싶지만.
잘 봐라.
한준우는 백전백승. 승률 100퍼센트다.
녀석의 감각을 제어하는 ‘무희’라는 힘은 1:1에서만큼은 가히 사기적. 박기혁이 보증할 정도니 말 다한 셈이다.
그렇다고 박기혁은 앞서 말했지만 걸리면 멸망이니까 입 아프게 말할 필요도 없고.
이러한 이유로 20조에 악감정이 있는 놈들은 메르헴에게 다 모이고 있었다.
현재 그녀의 앞에 결연한 표정으로 서 있는 여자도 며칠 전 박기혁 피하다가 한준우에게 탈탈 털리고는 복수랍시고 여기 있는 거다.
메르헴의 사고로는 이해가 안 된다.
생각해 보니까 어이없네.
왜 애먼 데서 처맞고 여기서 화풀이세요.
처음에는 이러한 상황에 못내 자존심도 상했다. 무시받는다는 증거니까.
‘내가 이런 대우받을 사람이 아니라고요.’
무시한 적은 있을지언정 무시당한 적은 없는 인생이다. 공주로서 언제나 위에서 내려다보던 삶이다.
그런데 생애 처음 사귄 친구가 하필이면 한준우랑 박기혁이라니.
이런 게 상대적 초라함이랄까.
메르헴의 가슴 깊숙이에서 뜨거운 뭔가가 욱 솟구친다.
‘생각하면 할수록 열 받네요!’
인간이 가지는 가장 원초적인 본능.
분노(忿怒).
그렇다.
메르헴도 한준우나 박기혁 못지않은 뜨거운 심장을 가진 전사였던 것이다.
순간, 결투장의 공기가 달라졌다.
방패를 버리고 앞으로 나서는 메르헴.
“나 열 받았어요.”
사방에서 주술들이 장전되고.
“경고하는데.”
갖가지 보조 주술진이 뒤덮이길 잠시.
“위험하면 알아서 도망가요.”
메르헴의 메이스가 대지를 분쇄했다.
그녀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여기서 진정으로 애먼 데 화풀이하는 사람은 메르헴일 수도…….
* * *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가장 난감한 사람들은 교수들이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벌써 7개 조가 사라졌어요! 당장 손을 써야 돼요.”
“박 교수님, 소식이 늦네요. 8개 조입니다. 방금 전에 8조가 해체됐다더군요.”
“미친놈들!”
“박기혁, 박기혁. 동아리 때도 말썽을 피우더니만, 결국 이렇게 아카데미를 어지럽히고 있구만. 이잉, 마음에 안 들어.”
“대체 검호 가문은 예의라는 걸 배우는 거야? 박수혁에, 박민지, 박기혁까지. 아주 아카데미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잖아.”
“이럴 때가 아닙니다. 모두들 가만히 있을 겁니까. 이대로 손을 놓다가는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유령이 될 수 있어요.”
유령.
조를 잃은 학생들을 지칭하는 은어다.
조가 해체된 학생들은 조 단위로 성적을 내는 수업에 참여하지 못한다.
박기혁도 유익하게 듣는 ‘포지셔닝의 이해와 활용’이 대표적.
문제는 협동과 지휘를 강조하는 한국 아카데미의 특성상, 이런 단체 수업이 꽤 많은 비중을 차지했고, 이 시간마다 참여 못한 채 아카데미를 배회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유령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저도 개인적으로 박기혁 학생의 독주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말릴 명분이 없잖습니까. 20조는 정당한 결투로 코인을 얻었어요.”
“맞아요. 중간고사는 오롯이 학생들의 시험입니다. 교수의 입김이 들어갈 껀덕지가 없습니다.”
“없긴 왜 없습니까. 이제라도 규칙을 뜯어고쳐서…….”
“한 교수, 우리 솔직히 말해 봐요. 결투를 한다. 코인을 얻는다. 이 애들 장난보다도 간단한 시험에 손댈 게 뭐가 있나요? 일단 위그드라실부터 상대해야 하는데 한 교수, 책임질 수 있어요?”
“그러면 이대로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하는 거요? 자네야말로 조가 절반 이상 작살나면 학부모들 원성 감당할 수 있나?”
“한 교수!”
“뭐!!”
양측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교수진들.
이렇게 연일 교수들 사이에서는 고성이 오가지만, 딱히 영양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답답한 현실을 성토하는 자리 정도일 뿐.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 유독 잠잠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황 교수가 조용하군. 자네는 왜 말이 없나? 박기혁에 대한 감정은 누구보다 안 좋을 텐데.”
“감정이 있는 것은 맞지만, 개인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박기혁이 교수의 권위를 침해했기 때문에 생긴 감정이죠. 교칙을 준수한다면 저도 뭐라 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오오, 황 교수는 대인배구먼.”
“사람이 참 착해.”
“과찬이십니다.”
“그건 그렇고 말야…….”
흥미를 잃은 교수들의 시선이 흩어진다.
다시 저마다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교수들.
그들은 알까, 황준엽의 눈이 요사스럽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 * *
어둑한 밤하늘.
캄캄한 기숙사 방 안에서 16조장 최미정은 침대에 누운 채, 약통을 들고서 고민했다.
“근력, 지구력, 신체 활성도를 비롯해, 마나 회복력과 제어력, 심지어 항마력까지 증폭시켜 주는 ‘칵테일’이란 약이다. 이것만 있으면 자네 조가 재앙을 막지 말란 법도 없지.”
“뭐? 술수? 파핫. 최미정 학생. 난 황준엽 교수네. 내가 겨우 자네 같은 애송이들을 상대로 술수를 부릴까.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 약, 협회부회장님인 자네 아버지가 보내 준 거야. ‘블랙마켓’에서 사 온 거라더군. 못 믿겠으면 전화해 보렴.”
“어쨌든 난 전달했네. 쓰고 안 쓰고는 자유니까. 다만 자네 조가 이걸 안 쓰고 이번 주말에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군. 그렇지 않나?”
강요하지 않는다.
재앙을 막고 영웅이 되든가.
아니면 재앙에 휩쓸려 유령이 되든가.
선택은 네가 하는 거다.
잠 못 이루는 밤. 최미정의 방은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