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22화>
6레벨 게이트. 업화의 둥지.
치솟는 불길 세례에 일대가 화염에 휩싸이고 있다.
불바다가 된 둥지, 타다 못해 녹아내리고 있는 돌덩이,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이 타오르는 현장.
모두가 저 녀석이 만들어 낸 광경이다.
닭의 목에 도마뱀의 몸통을 가진, 단지 시선만으로 고위급 화염 마법을 즉시 시전할 수 있는 녀석.
보스 코카트리스였다.
“힘내! 마지막 패턴이야. 얼마 안 남았어! 모두 자리 지켜!”
“후우!”
지휘관의 격려에 대원들은 각자 자리를 지켰다.
살갗이 붉게 물들어 있다. 어떻게든 물약으로 버텨 보지만 인간이 버틸 수 없는 열기. 화상이라도 입은 듯 온몸이 비명을 질러 댔다.
불길이 치솟고 괴수가 발광하는 일촉즉발의 상황.
그럼에도 대원들은 자리를 지켰다. 표정 변화 없이 명령을 기다렸다.
흔들림 따윈 없다. 오직 명령대로.
왜냐하면 우리는 백호단이었으니까.
옵티멈이라는 엘리트 집단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최강의 무력 단체였으니까.
“…….”
박민지가 치솟는 불길 사이에서 자리를 잡는다.
외각 45.5미터.
인지 능력 밖의 거리.
박민지는 훤히 드러난 코카트리스의 목덜미를 노려보고 있었다.
- 백호 준비.
“확인.”
오더가 떨어졌다.
기수식을 취한다.
보폭을 벌리고 자세를 낮추며 시선은 목표에 집중.
불길에 그녀의 앞머리가 그슬렸지만 미동도 없이 코카트리스의 목에 집중한다.
동시에 검집을 찾는데.
백색과 흑색의 검집 중 그녀의 선택은 흑색 검집. 살짝 드러난 검날에서 요요한 핏빛이 흘러나오는 검이었다.
박민지가 손잡이의 감촉을 느끼며 검과 호흡하던 때.
- 민지야!
멈추는 호흡.
반개하는 눈.
폭발하는 마나.
검호류 발도술
달빛 가르기
출렁, 공간이 일렁이더니.
일직선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절단됐다.
땅도, 빛도, 공간마저도.
달빛이 스쳐 간 자리. 코카트리스의 머리가 땅을 뒹굴고 있었다.
……
…
짐꾼들이 바쁘게 코카트리스의 시체를 치우는 사이, 장장 5시간의 레이드를 끝낸 백호단은 체면 따위 저 멀리 던져 버린 채 전부 바닥에 널브러졌다.
“으에에~ 지친다. 지쳐. 힘들었어.”
“고생했어, 빛나.”
박민지가 고생한 은빛나의 등을 토닥여 줬다.
“나야 지휘밖에 더했어? 고생은 네가 다 했지이.”
“고생은 무슨. 다들 하는 건데.”
“다들 해? 헤에~ 그렇구나. 6레벨 보스의 목을 단방에 싹뚝, 하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거구나. 이런, 난 그것도 모르고! 어제 밤새 패턴을 연구했었네? 헤에~.”
“너어는 진짜 ……말실수야. 됐지?”
“킥, 민지 귀여워.”
박민지와 은빛나.
영혼의 듀오라 불리는 두 사람의 인연은 아카데미 입학부터 시작됐다.
검호 가문의 둘째.
단일 전투력만큼은 오빠 박수혁을 능가한다는 ‘신속’의 검사 박민지.
하지만 그녀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지휘관의 능력은 전무했다는 것.
그런 그녀에게 손을 내민 게 은빛나였다.
비범한 머리, 탁월한 사교성과 친화력으로 사람들을 다루는데 타고난 은빛나와 박민지는 급격히 친해졌고…….
이것이 현 백호단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그 검, 성능 괜찮던데? 대형 몬스터 잡을 때는 ‘백로’보다 더 나은 것 같아. 그거 기혁이가 준 검 맞지?”
“응.”
“생일 선물이라고 챙겨 준 거지? 헤에~ 민지는 좋겠어. 선물 챙겨 주는 동생도 있고.”
“뭘.”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 보지만 이미 박민지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진 뒤였다.
“나 너무 달라져서 놀랬잖아. 어깨가 똭! 가슴이 쿵! 팔뚝은 또 어때? 막 터질 것 같애! 헤에~ 내가 알던 기혁이 맞냐고.”
“걔 원래 컸어.”
“헤에~ 그 곰만 한 체구로 ‘미안했어요.’ 수줍게 사과하는데, 꺄아~ 엄마야, 나 어떻게. 내 마음 심쿵했어! 역시 반전 매력 최고인 거시야!! 안 되겠어.”
은빛나가 심각한 눈으로 민지를 봤다.
“박민지.”
“왜?”
“조심스럽게 얘기해 볼래요~ 용기 내 볼래요~.”
“얘가 왜 이래. 야, 들러붙지 마.”
“형님이라 불러도 될까요오?”
“……이게 못하는 말이 없어.”
“꺄아아악~ 어떻게! 말해 부렸어!”
은빛나가 민망함을 담아 찰싹, 찰싹. 박민지의 등을 두드렸다.
“생각해 보니 우리 낭군님, 지금 중간고사 기간이겠구나.”
“누가 네 낭군님이야.”
“오늘부터 낭군님하면 안 될…… 알았다, 알았어. 매정한 뇨속.”
어깨를 으쓱한 은빛나가 말을 이었다.
“1학년 중간고사. 킥, 추억이네. 우리가 그때 ‘코인’ 몇 개 모았더라?”
“637개.”
“헤에! 기억났어! 네 손에 다섯 조가 날아갔지? 역시 그때부터 넌 매정했어.”
“말은 똑바로 하자. 난 네 말만 들었을 뿐이야.”
순박한 얼굴에 많은 사람들이 속지만 은빛나는 타고난 계략가다. 아카데미가 너무 번잡스럽다고 절반 정도 줄여야겠다면서 무서운 계략을 짠 사람이 눈앞의 은빛나.
박민지는 그녀의 계략을 실현시키는 칼이 되어 줬을 뿐이었다.
“재미있었지.”
“재미있었어.”
둘이 악동처럼 웃는다.
기수의 절반 이상이 유랑민처럼 떠돌던 모습은 꽤 볼만했었다.
“아마 이번에는 더 재미있을 거야.”
“틀림없이.”
재미있을 거야.
박민지는 완전히 변한 동생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 * *
시끄럽다.
“으어엉, 망했어. 세 과목이나 재시험이야.”
“어떤 X끼가 홉고블린 암살해야 한다고 말했어? 여기 봐라. ‘홉고블린을 암살 시, 높은 확률로 지휘를 받, 던, 고블린이 광폭화 상태에 빠진다.’ 적혀 있잖아.”
“당최 이해가 안 되네, 초인이 필기시험 잘해 뭐 하는데? 몬스터만 잘 때려잡으면 되는 거 아니야?”
매우 시끄럽다.
“난 필기 포기. 실기에 올인이다앗! 조장! 조자아앙!!”
“실기를 평균만 넘는다 치면…… 아슬아슬하게 커트라인이네. 휴우―.”
“16조! 16조! 모두 어디 있어? 좀 있다 ‘코인’ 나오니까 얼른 모이라고오!!”
시험지를 보며 우는 아이, 웃는 아이.
조장들은 곧 있을 실기시험 때문에 잔뜩 날이 서 있다. 한편에서는 벌써부터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게.
총평하자면
“개판이네.”
원래 시끄럽던 강의실이지만 오늘은 정말 참기 힘드네.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그러자 메리가 안경을 벗으며 말한다.
“내가 보기에 저게 정상이에요. 오히려 기혁이 이상한 거고요.”
“왜?”
“중간고사잖아요. 기혁은 긴장도 안 되나요?”
“긴장할 게 뭐 있냐? 고작 시험인데. 평소 하던 대로 하면 그뿐이지.”
“그게 정상이 아니란 말이에요. 시험에 고작이란 부사를 썼다는 점에서 기혁은 글러먹었어요.”
머리를 긁적이며 이해를 못 하고 있으니 가만히 있던 준우도 한마디 거든다.
“더욱이 1학년 첫 중간고사. 잘못하면 조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시험에 긴장하는 게 당연하다. 고로, 메르헴의 말대로 이 소란은 굉장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보세요. 준우마저도 이렇잖아요. 기혁이 비정상이라니까요.”
“쩝, 그런가? 너희도 긴장돼?”
“물론이에요. 나나 준우는 정상이니까요.”
정상을 강조하는 메리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 피식 웃었다.
하긴,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내가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고작 시험에 일희일비할까.
비록 18살 청년이 되어 아이들과 어울리고 있지만 실상은 인생의 단맛, 쓴맛, 똥맛까지 맛본 닳고 닳은 아저씨였다.
저들에게는 새로운 게 내게는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것인데 어찌 감각이 무뎌지지 않을까.
이게 자연스러운 거다.
“시험은 잘 쳤냐?”
“빨리도 물어보네요. 어땠을 것 같아요?”
“너는 당연히 잘 쳐야지. 주술 배운다고 나랑 이론 공부한 게 얼마인데.”
“퉤! 재수 없어요.”
“나도 평균 이상은 한 것 같다.”
“다행이네.”
“그러면 저희 코인 기대해 봐도 될까ㅇ…….”
그때, 메리가 코인이란 말을 뱉던 순간, “떴다아아아!!”라는 외침과 함께 강의실이 또 한번 들썩댔다.
“코인 떴나 보다.”
“기혁, 뭐 하고 있어요. 어서 확인해 봐요. 빨리요.”
“으, 응.”
폰을 들어 우리 조의 코인을 확인한다.
코인(Coin).
중간고사를 한마디로 표현한 단어다.
중간고사는 크게 두 파트. 개인 필기와 단체 실기로 나뉜다.
개인 필기는 말 그대로 시험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시험지에 답을 써서 제출하는 시험 말이다.
반면 이런 평범한 방식의 필기시험과는 다르게, 단체 실기는 제법 독특한 방식인데.
그 시작이자 끝이 이 코인이다.
“43개.”
조원 숫자 + 필기 평균 + 게이트 사냥이나 봉사활동 같은 특별 가산점을 더해 측정되는 코인의 숫자
우리는 이 코인을 가지고 다른 19개의 조랑 싸워야 한다.
그렇게 중간고사 기간 내내 싸워 가장 많은 숫자의 코인을 소유한 조부터 차등으로 점수가 주어진다.
간단히 말해 이 코인이 판돈이고, 이걸 불려야 하는 거다.
수당과 방법을 모두 동원해.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43개…….
작다. 몹시 작다.
예상대로 교수들이 야료를 부린 것 같다.
“……?! 잘못 본 거 아닌가?”
“여기 봐봐. 43개.”
“에에, 진짜네요? 이건 말도 안 돼요. 너, 너, 나가 얼마나 많은 게이트를 사냥했는데요. 여기서 우리보다 사냥 많이 나간 조가 어디 있다고요.”
“맞다. 저기 게으른 녀석들도 80개나 있는데.”
“쩝, 나한테 따져 봤자 어쩔 수 없단다.”
“잠시만요. 내가 확인해 봐야겠어요.”
“굳이 확인해 볼 필요 없을 건데.”
내 말을 무시한 메리가 기어코 폰을 들었고, 잠시 후 할아범과 통화를 마치고 씩씩대며 짜증을 냈다.
“위그드라실이 준 임무는 동아리 행사로 들어간대요! 거기에 세 명이라 숫자도 적대요. 비겁해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격분하는 두 사람.
얼굴까지 붉어진 게 당장이라도 한바탕할 기세였다.
난 턱을 괸 채 그런 두 친구를 빤히 보고만 있고.
앞서 말했지만 이미 예상했거든. 전에도 말했지만 어른의 질투는 집요하고 추잡하다.
그리고.
‘뒤끝도 만만치 않지.’
설마 그 지랄을 떨었는데 아무런 트집도 잡지 않을까.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다. 다시 생각해 보니 43개도 많은 것 같구만.
“음, 그래도 필기 점수는 제대로 준 것 같네.”
“기혁, 눈치 없어요? 지금 그게 중요해요! 43개라고요! 43개!”
“소리 죽여라, 메르헴. 다른 녀석들이 본다.”
“괜찮아. 차단 마법 썼어. 우리 메리, 하고 싶은 말 다 해.”
“이이익!!”
메리가 마음 놓고 불만을 토해 낸다. 살짝 필터링을 거치자면 ‘왜 교수하고 척을 져서 일을 이렇게 만드냐.’다.
사실 메리가 이렇게 화를 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중간고사 기간 우리는 이 코인을 걸고 결투를 한다.
그리고 중간고사가 끝났을 때 이 코인이 남지 않은 조는.
없어진다.
조가 해체되는 것이다.
당연히 해체된 조원들은 여왕을 잃은 벌처럼 뿔뿔이 흩어진다.
메리는 그게 싫은 것이다. 처음 사귄 친구다운 친구랑 흩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어쩔 거예요.”
“어쩌긴, 안 지면 되지.”
“기혁!”
“으으~.”
한껏 기지개를 켰다. 몸을 일으키자 강의실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 말이야. 너무 좁지 않아?”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야.”
옛날부터 느꼈는데, 여기 아무리 봐도 좁다.
“이 좁은 데에 조가 20개 모였잖아. 쯧, 뭐가 그리 친하다고 개미 떼처럼 모여 있냐. 내가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어요.”
최소한 잠은 자야 될 거 아니야.
20조가 말이 되냐고.
내 안락한 수면을 위해서라도
“절반.”
10개 조면 제법 널널하겠지?
“딱 절반만 줄여 보자.”
황당해하는 두 친구의 시선을 즐기며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