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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 명가의 마왕님-18화 (18/247)

<검술 명가의 마왕님 18화>

제국에 이런 말이 있다.

똑똑한 사람은 일을 손쉽게 처리하고, 현명한 사람은 이 똑똑한 사람을 찾아 일을 맡긴다고.

그런 의미에서 난 현명한 사람이다.

“전권을 주마, 메리. 여기 동아리실, 네 마음대로 꾸며 봐.”

사실 메리의 뒤에 있는 할아범을 겨냥해 했던 말이지만 메리는 내 생각보다 훨씬 의욕적이었다.

“후훗, 기혁. 이제야 내 능력을 인정하는군요.”

우리는 가끔 잊는다. 눈앞에 있는 메리가 공주님이란 것을.

항상 훈련하기 싫다 칭얼대고 유독 치킨을 좋아하는 이 아가씨가, 실은 돈이 화수분처럼 쏟아진다는 중동 왕가의 막둥이란 사실을.

“부가 무엇인지 보여 주겠어요.”

그렇게 시작된 본격 돈지랄.

대충 도배나 하면 되겠지, 라는 내 생각을 비웃듯, 다짜고짜 벽부터 뜯어 버리더라.

우당탕탕, 난리도 아니었다. 저러다 건물 무너지는 거 아니야? 괜히 불안해질 정도였는데 또 한번 내 상상을 뛰어넘는 선택이 이어진다.

아예 마법사들을 불러 버린 것.

“훗. 거절하기에는 너무 많은 돈을 주면 돼요.”

“……마법사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졌구나.”

게이트 공략을 포기하고 올 만큼 어마어마한 보수를 약속받은 마법사들.

마법으로 지반을 받치는 사이, 수십 명의 인부들이 잽싸게 내부를 리모델링한다.

응? 잘못 들은 거 아니야.

십여 명이 아니라, 수십 명이다. 앞자리가 다르다고.

이 정도 인원으로 24시간 3교대 일정을 소화한다.

아, 소음 문제? 아까 부른 마법사들은 놀고 있을까. 차단 마법진도 꼼꼼히 그렸지.

쾌적한 근무 환경을 위해 식사도 최고급, 임금도 2배, 여기에 일정이 줄어들 때마다 천정부지로 솟아오르는 성과급.

돈은 귀신도 부린다더니, 소름 돋을 정도로 열성적이더라.

이렇게 공사가 시작된 지 5일.

우리는 새 단장을 마친 동아리실에 있었다.

*   *   *

재빨리 시선을 교차한다.

오른편에는 검을 든 한준우, 왼편에는 하체를 노리고 들어오는 메리.

그렇다면 뒤는? 스파링 코트의 강화 유리벽이 막고 있다.

회피 공간 없음.

머리가 이렇게 판단을 끝내자, 몸이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으로 반응한다.

우직!

손을 교차해 준우의 검을 막아 내고.

쉬익-!

메리의 도끼를 밟으며 뒤로 날아오른다.

곧바로 방향 전환. 이어서 강화 유리로 돼 있는 벽을 밟고,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돌고래처럼 유려하게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뒤가 잡힌 두 사람.

“……!!”

“젠장이에욧!”

다급히 반격해 보지만, 늦었어 이것들아.

손날로 검면을 쳐서 준우의 공격을 비튼다. 막 형태를 갖추는 메리의 주술은 무시.

주술보다 내 발이 더 빠를 테니까.

펑!

“크윽!”

방패째 날아가는 메리. 벽에 부딪치는 순간 주술이 으깨진다.

“정신 차리라고 했지!!”

술식을 발동하는 마법이 아니라 대화로 발현하는 주술이기에 주술사의 집중이 깨지면 주술도 깨지는 것이다.

“그게 쉽냐고…… 헙!”

악을 써 보지만 재차 날아드는 무기에 잽싸게 방패를 들어 올리는 메리.

그리고 방금 던져진 무기의 주인인 한준우가 날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검사가 검을 뺏기면 쓰나. 누누이 말했지만 넌 근력부터 다시 길러야 돼.”

“제대로 한다.”

“언제는 제대로 안 했다고. 편하게 와.”

“……끼지 마, 메르헴.”

잔뜩 열 받은 준우의 눈깔이 돌아갔다.

그 순간, 미묘하게 비틀리는 감각. 혈족 계승 ‘무희’가 발동 됐다. 이제부터 녀석의 진심 모드다.

비틀린 감각을 비집고 들어오는 한준우의 검.

나는 뒷걸음질 치며 겨우 막아 나간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저건 진짜 사기다. 타인의 감각을 떡 주무르듯 주무르다니. 그뿐인가? 마법으로 치면 상당히 고위 주문인데 마나 한 방울도 없이 공짜로 저 능력을 쓴다.

이 얼마나 불공평한가.

뭐, 덕분에 중구난방 흩어져 있던 거인의 감각이 녀석과의 대련으로 놀랍도록 정돈됐기에 나한테는 여러모로 고마운 능력이긴 하다.

챙- 챙-!

점차 충격음이 맑아진다.

내 손이 어지럽게 쏘아지는 검들을 따라가는 것. 속수무책 당하던 처음과는 눈에 띄게 달라진 전투 양상이다.

그러나 내 앞에 있는 이놈은 승부욕의 화신. 이를 두고 볼 한준우가 아니다.

본격적으로 춤을 춘다.

처음은 대거였다. 장검을 거두어들이는 잠깐의 빈틈에, 대거를 뿌린다.

팔을 노리고 쇄도하는 대거. 당연히 처내려 했는데…….

흩어졌다?

“젠장!”

유령비도(幽靈飛刀).

그림자에 검을 숨기는 비도술로 제국 특무대들의 전유물.

내가 가르쳐 준 기술이 나를 노리고 있다.

몸을 뒤틀어 뒤로 시선을 향한다.

탱! 팅!

묵직한 공격들이 등 뒤로 날아왔다. 어지간한 상대라면 적중했을 공격들.

더없이 깔끔하다.

특히 유령비도와 동시에 감각을 비틀어 버려 아예 존재를 지워 버리는 솜씨는 가히 일품이었다.

언제 이렇게 훈련했대. 기특하기까지 했다.

“숙련도 장난 아니…… 이크!”

다음으로 날아오는 건 채찍. 검격에 섞여 뱀처럼 번들거리는 저 채찍 또한 내가 가르쳐 준 거다.

이름하여 ‘똬리를 튼 독사’.

야만족 녀석들이 사용하는 무기술로 기습용으로는 이만한 기술이 또 없다.

이후로도 레이피어, 사슬낫, 사복검 등등, 한준우의 손에서 수많은 무기들이 튀어나온다.

빠르게, 화려하게. 준우는 자신의 피에 각인된 ‘무희(舞姬)’라는 이름대로 화려한 춤사위를 펼쳐 냈다.

그래도 말이야.

형이 읽은 책이 몇 권이고, 겪어 온 수라장이 얼마나 많은데 너한테 밀리면 쓰겠냐.

쪽팔리게.

탱!

“……!!”

“따라잡았다!”

현란했던 검이 마침내 멈춘다. 정확히는 내 손에 잡혀 멈춰졌다.

끝이다. 오늘도 나의 승리다!

씨익- 검을 잡은 내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크, 큭.”

웃는…… 다? 당황해야 할 녀석이?

그리고 난 곧 그 웃음의 의미를 알게 되는데.

“죽어욧!!”

메리의 둔기가 내 뒤통수를 가격하는 순간.

삐이이-

끝이었다. 내 기억의 끝.

*   *   *

뒤통수에 볼록 솟은 혹을 만진다. 크다. 심하게 크다.

“어우, 머리야. 비겁하게 기습이라니…….”

“흥, 전쟁은 승자의 기록이다. 승리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마라. 모두 기혁한테 배운 거예요.”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하라. 참된 스승의 가르침.”

“그래서 스승의 뒤통수를 내려쳤냐. 이 스승 감격해서 눈물이 찔끔 나오는구나.”

“분에 넘치는 칭찬 고마워요.”

“더 분발하지.”

어깨를 으쓱하는 메리, 엄지를 추켜세우는 준우.

아아, 첫 만남에 순진했던 둘은 어디 있나. 주술을 배우라고 할 때 화들짝 놀랬던 메리는, 검을 나누고 싶어 앙탈을 부리던 준우는 대체 어디 있느냔 말이다.

지금 여기에는 스승의 뒤통수를 향해 전력으로 몽둥이를 처박을 정도로 냉혹한 전사만 있을 뿐.

모두 내 업보다. 이 순진한 아이들을 타락시킨 게 난데, 누구한테 하소연할까.

“쩝, 기척은 어떻게 지웠냐? 정말 감쪽같던데.”

“저번에 네가 조언한대로 했다.”

“내가 조언한 거라면…….”

기억났다. 며칠 전에 말한 적이 있다.

매번 눈앞의 상대에게 전력을 집중하는 한준우. 덕분에 1:1대전만큼은 나를 긴장시킬 정도의 전투력을 지졌지만 반대로 시야가 좁았다.

사실 이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다. 전사나, 암살자로서 목표를 처리하는 데 집중하는 게 뭐가 이상한가.

다만, 내 입장에서는 아까웠다.

저 힘을 가지고, 자신을 비롯해 타인의 감각까지 가지고 노는 저 미친 힘을 가지고도 그런 1차원적인 역할만 수행한다면 이 무슨 낭비인가.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들이대는 꼴이다.

“감각을 비트는 걸 다른 방식으로 활용해 보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응용을 해 봤어요.”

“아, 이제야 알겠네. 아예 ‘영역’을 비틀어 버렸구나.”

한준우는 상대를 비롯해, 영역 내의 감각을 모조리 비튼 것이다.

“내 은신 주술도 더해졌어요. 거기에 정신 주술까지 넣었어요.”

“정신 주술은 ‘흥분’ 쪽이겠네?”

“맞아요. 그게 티가 나지 않으니까요. 다른 거는 기혁한테 금세 들킬걸요.”

“그렇겠지. 어쭙잖은 환영이나 착란 같은 쪽이었으면 눈치챘을 거야.”

“또 하나. 넌 묘하게 감각이 둔하다. 그 점을 노렸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실로 정확한 지적이다. 난 아직 이 거인의 육체를 완벽하게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다.

정확히는 균형이 뒤죽박죽 됐다고 봐야지.

사실 이게 당연하다. 괜히 거인이 드래곤과 더불어 세계의 절대자였겠나.

잠재력이 아예 다르다. 그릇 자체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단 말이다. 자칫 잘못하다 이 폭력적인 힘에 휩쓸리기라도 하면 나도 내가 아니게 될 수도 있다.

여담이지만, 아마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이 힘에 휩쓸려 살짝 맛이 갔을 확률이 높다. 마왕이었던 내가 이 정도인데 평범한 인간이 버틴다?

‘말이 안 되거든.’

하여튼, 이런 상황에 불과 몇 달의 훈련으로 감각이 제자리를 잡았을까?

그래, 차라리 죽고 죽이는 전장이라면 괜찮다. 그냥 가진 힘을 모조리 개방하고 무작정 휘두르기만 하면 되니까.

그런데 이건 대련이잖나. 다치면 안 되잖아. 내 한 몸 컨트롤하기도 힘든데, 애들 다칠까 봐줘야 하니, 내 입장에서는 더 까다로운 거다.

그래도 칭찬할 건 칭찬해야지.

“짜식들, 용케도 내 약점을 정확히 찾았네. 그렇게 내 뒤통수를 때리고 싶었어?”

“흥, 많이 봐준 거예요. 힘껏 때렸으면 기혁 병원에 있어요.”

“킥, 이게 내가 바보인 줄 아나. 전력으로 주술 썼으면 마나 파장 때문에 공격하기도 전에 걸렸을 걸. 너도 알 거 아니야. 그래서 신중하게 적정선만 지킨 거면서.”

“……쳇, 이래서 눈치 빠른 남자는 별로예요.”

“준우도 영역까지 비틀 줄 몰랐네. 언제부터 가능했던 거냐?”

“얼마 안 됐다. 성공한 건 그제.”

“호, 그러면 오늘이 첫 실전?”

“그렇다.”

“이야…… 둘 다 엄청 성장했다. 여기까지 판단했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거야. 정말 감쪽같이 속았거든.”

“너를 잡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 된다 생각했다.”

“맞아요. 기혁은 괴물이니까요.”

짝짝, 절로 박수가 나온다.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상대를 정확히 인정한다.

여기에 격차에 굴복하지 않는 용기, 어떻게든 약점을 찾아내는 노력, 그리고 끝내 승리를 쟁취하려는 의지.

실로 훌륭한 성장이 아닐 수 없다.

이맘때 아이는 하루하루 발전한다고 하는데 이 둘이 꼭 그렇다.

기특하네. 뿌듯하기도 하고.

이런 맛에 제자 키우는 거구나. 새삼 영감의 기분을 이제야 알겠다.

흐뭇하게 둘을 본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기혁.”

“응, 뭔데.”

잠시 뜸을 들이는 메리.

마치 내용을 머리에서 정리하듯 상념에 빠지더니 곧.

“마법을 쓰지 않는 건 알겠어요. 기혁의 마법은 나나 준우나 감당 못 하는 것도요. 그 정체불명의 스켈레톤들만 나와도 대련이란 게 성립되지 않는 것도 인정해요.”

“약점인 감각도 단련할 생각이겠지.”

“둘 다 정답. 그래서 메리가 하고 싶은 말이 뭘까?”

메리와 준우가 눈빛을 교환하더니.

“왜 검을 사용하지 않지?”

“당신은 검사잖아요. 검호 가문이고요. 그런데 왜 대련에서 검을 사용하지 않나요?”

난 또 뭐라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전에도 말했잖아. 조절하기 힘들다고.”

순간, 내 입에서 ‘조절’이란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들이 진지하게 되물었다.

“그게 궁금했어요. 대체 무엇을 조절하기 힘들다는 거예요?”

“설마 우리가 다칠까 봐 그러는 건가? 그렇다면 우리는 괜찮다.”

“잠깐, 잠깐. 얘들아, 내가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갑자기 왜 이래?”

“일방적인 관계는 좋지 않다.”

“맞아요. 기혁이 우리를 봐주는 건 알아요. 도와주는 것도 잘 알아요. 그래서 우리도 도와주고 싶어요. 도움만 받는 건 싫어요. 우리도 기혁을 도와줄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왜 날 도와주고 싶은 건데.”

둘은 당연한 걸 묻는 것처럼 오히려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친구잖아요.”

“친구잖나.”

“……!”

한 대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해졌다.

친구, 내겐 너무 생소한 단어가 내 머리를 마구마구 헤집는다.

“왜 놀라나요? 친구니까 나를 도와준 거 아닌가요? 난 당신이 친구라 생각해서 믿었어요. 주술을 배운 것도 그래서였고요. 내가 착각한 건가요?”

“하루에 절반 이상을 함께 보내는데, 친구지.”

“아아…….”

이제야 알았다. 난 이 아이들을 제자로 대했는데, 얘들은 나를 친구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그리고 또 하나. 전생과 이생을 통틀어 내게 친구가 없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기혁. 친구는요. 함께하기에 친구예요.”

친구, 친구라…….

여러모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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