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17화>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도 여러모로 시간이 흘렀다.
일주일.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무엇을 상상하듯 그 이상으로 요란했다.
이유야 뻔하다. 동아리 때문이지.
“당장 취소해라. 네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아느냐? 아카데미의 운영은 엄연히 교수의 영역이네. 여기에 위그드라실을 포함시키다니! 미친 건가!”
“박기혁 군, 이건 아니지 않나. 대화로 좋게 풀어 갈 수 있는 상황을 왜 이렇게 악화시키느냐는 말일세. 이건 자네에게 하등 좋을 게 없는 일일세.”
“생각 잘해요, 기혁 학생. 이건 선을 넘은 거예요. 하극상이라고요. 아무리 당신 뒤에 옵티멈이 있어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에요.”
선을 넘었다, 이런 법이 어디 있냐, 좋게 좋게 가자 등등.
농담 조금 보태서, 아카데미 내의 모든 교수를 한 번씩 본 것 같다.
나야 뭐, ‘네네.’ 대충 말할 뿐이었지.
그런데 이것도 모자라, 모든 동아리에서 사람을 보내더라.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동아리는 인맥 혹은 라인을 타려고 가는 곳. 그만큼 권위적이다.
쉽게 말해 콧대가 무지하게 높다.
그런데 이것들이 실성했나, 실실 웃으며 접근하는 거 아닌가.
“이봐, 후배님. 우리 구르미로 말할 것 같으면…….”
“책임지고 모든 지원 다 해 줄게. 게이트 사냥 좋아한다며? 그거 수속 귀찮지. 우리가 다 해 줄게, 그냥 넌 몸만 가면 돼.”
“기혁 군, 동생 같아서 말 놓을게. 기혁아, 우리 밴드부에 들어와. 어차피 여기 옵티멈 라인이잖아.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어. 왜 괜히 교수들이랑 척을 지니.”
‘교수들이랑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교수랑 틀어지면 너만 손해다.’ 등등, 보이는 선배마다 전부 한마디씩 하더라.
말 길어질까 봐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우스웠다.
내가 무슨 교수들을 때려잡은 것도 아니고, 동아리 하나 세운다는데 이 지랄이야.
이쯤 되자 궁금했다. 겨우 동아리 하나 가지고 왜 저들이 이렇게 극렬하게 반응하는지.
그래서 물어봤다.
누구에게?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인 어머니에게.
“음, 우리 기혁이가 이해를 잘못하고 있는 것 같네. 동아리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란다. 위그드라실 님이 학교 운영에 참여하는 상황. 이 상황이 문제인 거야.”
“왜? 당연히 무서워서지. 예의, 존경처럼 이제껏 당연히 누려왔던 권위들이 위그드라실 님의 등장으로 위협받을 테니까. 아마 이대로 끝나지 않을걸.”
위그드라실이 곧 아카데미이고, 아카데미가 곧 위그드라실이다.
이런 위그드라실이 전면에 나선 순간, 교수들이 이루어 놓은 모든 구조와 체계, 혹은 교칙 같은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동아리는 아주 사소한 일이 된 것이고.
그리고 이대로 끝나지 않을 거란 어머니의 말대로, 결국 난 천수만 학장과 독대까지 하게 된다.
“박기혁 학생, 현재 상황이 매우 복잡합니다.”
“교수들이 박기혁 학생에게 다소 날을 세웠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기분 나빴겠죠. 이해합니다.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위그드라실이라니요.”
“담당 교수,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최대한 편의도 봐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이번 건은 여기서 멈추는 게 어떻겠습니까.”
천수만 학장의 마지막 중재였고.
내 대답은?
“괜찮습니다.”
거절이었다.
웃긴 게, 겨우 동아리다. 내가 지구 정복하는 것도 아니고 겨우 동아리 하나 세우겠다는데 왜 간섭이야.
뭐? 말 안 들었냐고? 동아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어쩌라고. 나한테는 동아리가 제일 중요해.
지들이 위그드라실을 어려워하는 거랑 나랑 무슨 상관인데? 뭐가 그리 이쁘다고 내가 교수들 사정까지 생각해야 돼?
간혹 착각한다. 아카데미라 칭하고, 교수, 학생. 이딴 호칭을 붙이니까 여기가 진짜 학교인 줄 안다.
도리, 예의, 존중, 존경…….
상하 관계가 명확히 정립돼 있는, 스승의 은혜는 하늘과 같은…… 뭐, 이런 종류의 말랑말랑한 학교.
내가 보기에 개 풀 뜯어먹는 소리다.
세상 어느 학교가 죽이는 법을 가르쳐 주는가.
본질을 봐야지. 전에도 말했지만 여긴 살생(殺生), 살육(殺戮) 이딴 것을 배우는 곳이다. 이를테면 ‘전사 양성소’란 말이다.
그런데 왜 정치를 찾나? 경우를 찾느냐고.
뭐 좋다 이거야. 너희들끼리 놀겠다면 뭐라 할 이유는 없지. 그런데 왜 날 그 유치한 짓거리에 끼워 넣으려 해.
소꿉놀이를 할 거면 너희들끼리 해, 난 훈련하기도 바쁘니까.
경고하는데, 날 자극하지 마라.
이런 내 의견을 대충 축약해서 천수만이에게 말해 줬다.
표정이 볼만하더라.
하나는 확실해졌다. 이로써 나와 교수들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사실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미 황… 황…… 뭐더라. 여튼 황 머시기를 박살 낼 때 조용히 살긴 글렀다고 각오했으니까.
사람이 생긴 대로 살아야지, 내가 언제부터 점잔뺐다고. 안 그래?
그렇게 폭풍 같던 일주일이 지난 뒤, 드디어 우리는 동아리실 앞에 설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이상하다.
대체 언제까지 밑으로 가는 건데?
* * *
지하 4층.
두더지도 놀랄 만큼 지하로 내려오자 깜빡이는 전등이 우리를 향해 인사한다.
지직- 지직-
저거 언제 갈았을까?
이런 내 의문을 눈치챈 학생회에서 나온 여선배가 “호호… 분명히 갈았는데, 오늘따라 왜 이래…….”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자기도 쑥스러운지 애써 먼지를 털어 내 보는데…… 하지 마. 더 더러워지잖아.
“콜록 콜록. 조, 조금 누추하죠? 그런데 어쩔 수 없어요. 후배님이 원했던 조건에 그나마 맞는 곳은 여기뿐인걸요. 사실 공연장으로 예정됐던 곳이었는데 반려당한 곳이에요. 아마 크기는 동아리실에서 제일 클걸요.”
그래도 시설은 괜찮을 거란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고는 사인을 받고서 호다닥 도망치듯 뛰어올라갔다.
눈치도 없이 깜빡대는 전등.
얼마나 묵혔는지 덩어리져 있는 먼지.
벗겨진 벽, 그런 벽과 한 몸이 된 문. 돌아갈지 의심스러운 문고리.
“…….”
“…….”
“…….”
결국 난.
메리에게 멱살을 잡혀야만 했다.
“죽어요! 죽으라고욧!!”
허허, 고것 참 손이 맵구만.
……
…
잠시 뒤.
메리의 화가 누그러진 뒤에야, 우리는 ‘출구 없는 지옥’의 문고리를 잡았다.
잡았는데.
콰직!
우당당탕탕!
“진짜 ‘출구’가 없어졌네요. 기혁의 예지력. 실로 놀라운 일이에요.”
메리의 비아냥이 비수처럼 날아든다.
문고리를 돌리는 순간, 문이 폭삭 주저앉아버린 것.
하지만 난 당황하지 않았다. 왜냐고? 내 앞에 펼쳐진 현실이 주저앉은 문 따위는 애들 장난이라고 말하고 있거든.
“와…… 어떻게 이렇게 엉망일 수 있지?”
먼지야 밖에서 봤으니 넘어가지만 묵은 쓰레기들이 사방 천지에 널려 있다. 창고라고 하더니 정체불명의 가판대도 보이고, 고대 던전의 미믹을 연상케 하는 캐비닛…….
더 이상 설명을 못 하겠다. 그냥 어지럽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차마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꼴이었다.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
위생에 무감각한 준우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
“병 걸릴 것 같아요.”
메리는 이미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있다.
안 되겠다. 우리는 그나마 나은 곳을 찾다 찾다, 끝내 다시 문을 나와야만 했다.
“다시 보니 선녀네요.”
“동감.”
“상대적 청결함이네. 일단 앉자.”
계단에 걸터앉는다.
“미안하다. 사태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쩝.”
아무리 서로에게 날을 세웠지만, 설마 교수란 작자들이 이런 치졸한 방식으로 엿을 먹일 줄이야.
애들 볼 낯이 없네.
그런데 메리가 이런 날 위로한다.
“너가 날을 세워서 별것도 아닌 일을 키운 건 사과할 일이 맞아요. 하지만 이 상황을 기혁이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저기, 위로 맞지?”
“아니요, 상황 판단이죠.”
순간, 거울을 보던 메리의 눈이 싸늘하게 변한다.
“뭐든지 정도가 있는 법이에요. 이건 너무 심해요. 하나 물어볼게요. 이 조에 너만 있어요?”
“……아니지.”
“준우도 있어요. 나도 있어요. 나, 메르헴이 있다고요. 그런데 날 이따위로 대해요?”
우리 조에서나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메르헴이지만, 이 아이는 엄연히 왕족이다.
자존심과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왕족 말이다.
“특별 대우를 바란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런 꼴을 당하려고 여기까지 온 것은 더욱 아니에요. 당장 정식으로 항의할 거예요.”
당장이라도 쳐들어갈 기세. 그러나 난 쓰게 웃으며 일단은 말렸다.
“화나는 것 알겠는데 그래도 참아.”
“왜요.”
“그게 더 현명하니까.”
내 오랜 경험상 내전은 거래를 하든, 전쟁을 하든,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더라도 내부에서 끝내야 현명하다. 외부 세력이 끼어들면 그때부터는 정말 파국이다.
“네가 항의할 수단이 뭐야. 결국 아빠 찬스 아니야. 그러면 어떻게 될까? 곧바로 국제 문제야.”
그렇다고 이곳 아카데미가 한 수 접어 줄까? 아니다. 절대 아니다. 아카데미의 권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다. 적어도 외부의 압박에 굴할 정도는 아니란 거다.
내가 엄마 찬스를 쓰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인 것이고.
솔직히 나도 위그드라실이 내 편을 들어 주지 않았으면 이렇게까지 독불장군처럼 내 꼴리는 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난 계속 당해야 하나요? 이 모욕을요?”
“설마 내가 그럴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당했으면 돌려줘야지. 다만 스마트하게.”
“스마트하게요?”
“‘중간고사’ 말하는 건가?”
“역시 준우, 제법이야.”
결국 돌고 돌아 증명이다.
입으로 나불대는 놈들을 닥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보여 주는 것이다. 도리고, 예의고 간에 눈앞에서 부수면 다시는 그 하찮은 주둥이를 놀리지 못하더라.
“여기서 선언할게. 중간고사 최고는 나야. 그다음은.”
내 손가락이 한준우를 가리켰다.
“준우 너.”
다음으로 메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메리는 10등만 하자.”
“……나 무시해요? 왜 나만 10등인가요?”
“이것아, 10등이 우스워? 주술로 바꾼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욕심 내. 우리 메리 양심도 없구만.”
“흥.”
이렇게 나를 비롯해 애들 모두를 정상에 올려놓으면 자기들이 어쩌겠어? 이렇게 증명해도 지랄을 하면 그때는 정말 이판사판이다.
인간처럼 대우해 줬는데, 개처럼 나오면 나도 개가 되는 거지.
그리고 태생이 뒷골목 출신인 난, 개싸움에서 한 번도 진적 없다.
“좋아요, 기혁 말 이해했어요. 그럼 우리에게 남은 건 당장은 저건가요?”
“그렇지, 당장은 저거부터지.”
미래에 대한 당찬 포부도 당장 저 답도 안 나오는 동아리실부터 해결해야 꿀 수 있는 법.
그때 메리가 말한다.
“후우, 이건 나한테 맡겨요.”
“응?”
메리가 폰을 들었고.
잠시 뒤 우리 앞에 도착한 사람은.
“허허. 이거 참. 고약한 장난이군요.”
메리의 집사, 할아범이었다. 내가 전에 말한 그 ‘만만치 않은’ 할아버지 말이다.
“할아범, 여기 치우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음…….”
할아범이 평소랑 다름없는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견적을 살핀다. 이 끔찍한 곳을 보면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다는 것만 봐도 보통은 아니라니까.
그렇게 한참을 살피던 할아범이 손가락을 펼쳤다.
손가락 세 개? 3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어지는 할아범의 말에 난 인정해야 했다.
내가 이 할아버지를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3시간.”
“……!!”
“마침 점심시간이군요. 식사 맛있게 드시고, 차 한잔하시고 오십시오. 말끔히 정리해 놓겠습니다.”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는 할아범.
그리고 3시간 뒤.
간짜장과 제육볶음, 초밥까지 8인분을 해치우고 아카데미 앞 카페에서 카라멜 마끼아또 한 잔 마시고 오니.
……내가 잘못 보고 있나. 여기가 아까 거기 맞나?
“……미쳤네.”
“……미쳤군.”
놀라는 둘을 본 메리는 마치 제 일처럼 콧대를 세우며 말했다.
“보셨어요. 이게 내 할아범이에요. 수고했어요, 할아범.”
“허허허. 별말씀을.”
우리 앞에 있는 건 말끔히 청소된…….
아니, 아예 새로워진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