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16화>
옵티멈 본사.
아들이 게이트로 간 덕분에 오늘따라 아침 일찍 출근한 김연희. 그녀는 마치 아침 기도처럼 막내와 찍은 사진을 보며 따뜻한 모닝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거참, 누구 아들인지 잘생겼다~ 얼굴은 날 닮은 게 분명해.”
그런대 그때, 곧 들어온 비서의 말에 그녀의 평온이 와장창 깨지는데.
“대, 대표님! 이영재 나이트의 기사단이!”
“바로 가죠. 가면서 말해요.”
굳이 끝까지 듣지 않는다.
다급한 표정, 잔뜩 떨리는 목소리. 뭔가 큰일이 닥쳤단 말이고, 에이전트에서 큰일이라면 대부분 목숨과 직결되는 사고였다.
역시나 불행하게도 그녀의 예상은 적중했다.
“현재 부상자는 5명. 그중 이현수 나이트는 중상으로 곧바로 수술에 들어갔습니다.”
“이현수 나이트라면, 이영재 나이트의 동생이잖아요. 어째서 사태가 이렇게 된 거죠?”
“그게…… 진입한 ‘퍼플 게이트’의 오염도가 상상 이상으로 높았다고 합니다.”
“후, 그렇게 조심하라고 했는데.”
게이트는 크게 세 종류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냥터처럼 드나들 수 있는 블루 게이트(Bule Gate).
생성 즉시 몬스터를 ‘역류’하여 재앙을 일으키는 레드 게이트(Red Gate).
그리고, 두 게이트의 경계에 있는 ‘퍼플 게이트(Purple Gate).
블루 게이트처럼 입출입이 자유롭지만, 레드 게이트처럼 불특정 지역에 랜덤으로 생성되는 게이트.
대신 블루 게이트와는 다르게 지속적으로 ‘오염’이 진행되고, 종국에는 끝내 레드 게이트처럼 역류한다.
에이전트의 대표로서 김연희는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도 안 되는 레드 게이트보다 한 달에 수십, 수백 개가 생성되는 이 퍼플 게이트가 더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이건 비단 김연희 개인의 생각이 아니다.
국가나 대형 에이전트의 수장이라면 전부 이렇게 생각하고, 때문에 국가 및 에이전트는 헌터나, 나이트를 동원해 이 퍼플 게이트를 필사적으로 지우려 하는 것이다.
다행히 이현수 나이트의 수술은 잘됐다. 재활은 필요하겠지만 절단된 두 다리도 무사히 접합했다.
그럼에도 모두 동료가 무사하다는 소식에 환호할 때, 김연희는 그 무리에 섞여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옵티멈 대표이기 이전에 엄마니까.
하필이면 지금 퍼플 게이트로 사냥을 나간 아들이 눈에 어른거렸으니까.
‘기혁아, 괜찮지?’
* * *
“아악!”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명.
메르헴의 목소리다. 박기혁은 상대하던 오크를 밀치고는 대검을 크게 그었다.
촤륵!
피륙이 갈라지는 느낌과 함께 오크의 붉은 피가 허공에 뿌려졌다. 메르헴의 뒤를 노리던 오크가 몽둥이를 든 채로 양단된 것이다.
“괜찮아?”
“괘, 괜찮아요. 잠깐, 놀랐을 뿐이에요.”
“정신 똑바로 차려. 난전이야. 언제 어디서 공격이 날아들지 몰ㄹ…… 고개 숙여!!”
박기혁의 외침에 잽싸게 고개를 숙인 메르헴. 온몸의 근육을 최대한 비틀어 대검을 휘둘렀다.
커컥, 콰직!
몰려 있던 적들이 척추째 양단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이어서 메르헴이 박기혁의 등을 노리고 돌진하던 오크들의 발을 묶는다.
주술 ‘진흙 사슬’.
진흙처럼 들러붙는 사슬에 움직임이 봉쇄된 오크.
그리고 언제나처럼 한준우가 마침표를 찍으러 날아올랐다.
푹! 푹!
나비처럼 날아들어 오크들의 심장을 꿰뚫는다. 비명조차 들리지 않는 간결한 일격. 과격한 박기혁의 대검과는 또 다른 치명적인 검격이다.
무대는 마련됐다. 춤을 출 시간.
한준우의 양손에서 휘리릭, 사복검이 튀어나왔다.
“춤추자.”
나비가 날개를 펼치듯 양손이 휘날렸다.
낭창되는 사복검이 현란하게 흩날렸다. 오크들의 고통에 찬 괴성이 음악처럼 주위를 진동했고, 핏방울은 붉은 장미처럼 화사하게 피어났다.
중앙에서 학살의 춤을 추는 한준우. 이틈에 박기혁과 메르헴이 서로 시선을 교차하고, 순간 양편으로 찢어졌다.
메르헴의 철퇴가 앞에 있던 오크의 몸통을 부쉈다. 박기혁의 차지가 오크의 가슴을 함몰시켰다.
이번에는 메르헴이 ‘얼음 철퇴’로 일격을, 박기혁은 ‘내려찍기’로 일격을.
다시 메르헴이 ‘모래 이빨’로 십여 마리의 오크를 학살했고.
역시 박기혁은 ‘힘 모아 내려찍기’로 십여 마리의 오크를 도륙 냈다.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두 사람 덕에, 오크의 양익이 추풍낙엽처럼 무너져 갔다.
그리고 끝내 오크들의 선택은.
“꾸에에엑!!”
후퇴.
도망가자.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오크들.
단지 살기 위해서가 아니다. 한 마리라도 살아남아 부락에 보고하려고 오크들은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에게 퇴로는 없었는데.
도망가는 그들의 앞을 막은 스켈레톤.
그들이 일제히 도끼를 뽑았다.
그리고 불길한 붉은빛이 번쩍이는 순간.
끼에엑!!
학살의 시간이었다.
* * *
치열했던 전투가 끝나고, 돌아온 피드백 시간.
난 커피를 한 잔씩 돌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고생했다. 자, 한 잔씩 마셔. 그래도 처음보다 많이 좋아졌어.”
“빈말하지 마세요. 끔찍했잖아요.”
“맞아. 끔찍했지. 그래서 좋아졌다는 거야. 원래 발전에 앞서 자신의 상태를 냉철히 파악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이게 됐잖아.”
“……재수 없어요.”
호롭, 커피를 마시며 둘을 살피니, 얼굴이 영 꽝이다.
어지간히 짜증 났던 모양.
하긴, 실력이나 향상심이 남다른 둘에게 엉성했던 지난 몇 번의 전투는 퍽 마음에 안 들 것이다.
“얼굴 펴라. 이건 어디까지나 ‘실험’이라니까.”
그래, 실험
포지셔닝을 이해하고, 난 한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효율을 위해 역할을 나눈다는 건 인정. 그 역할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시너지를 낸다는 것도 인정.
그런데 굳이 하나의 포지션만 고집할 필요가 있는가?
만약 두 가지 역할군을 할 능력이 된다면? 심지어 세 가지 모두 할 줄 안다면?
더 다양한 변수에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실험은, ‘올라운더(All-Rounder)’라는 개념의 시작이었다.
“그래도 가능성은 봤잖아. 준우 넌 탱커랑 근딜, 메즈가 가능한 서포터가 가능했고…….”
정확하게 준우는 극강의 회피로 라인을 유지하는 ‘라인배커(L)’와, 역으로 상대편 진형에서 홀로 라인을 부수는 ‘라인브레이커(LB)’의 역할 모두 가능했다.
여기에 무희의 ‘감각 제어’라는 훌륭한 군중 제어기까지 보유했으니, 만약 내 예상대로 성장한다면 사선에 떨어뜨려도 홀로 살아남을 수 있는 훌륭한 특공대가 될 것이다.
“특히 메리는 기대 이상이었어. 탱커, 근딜, 범위, 메즈, 힐링, 전부 훌륭했어.”
이건 절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지난 몇 번의 전투에서 메리가 맡았던 역할만 봐도 알 수 있다.
세이프티(S), 워리어(W), 타깃, 존, 도트, 누커, 원거리 딜러군 모두 소화했고, 힐과 버프를 비롯한 서포터군도 모두 소화했다.
이 말인즉, 현존하는 포지셔닝 역할군은 모두 가능하단 말이다.
이 모든 게 주술 특유의 즉시 시전에 가까운 캐스팅 속도와 메리가 타고난 재능이 합쳐졌기 때문이다.
다만 아직 ‘부동심’을 깨닫지 못하다 보니 앞전 전투처럼 뒤를 잡히는 등의 돌발 상황에 눈에 띄게 허둥대는 게 문제.
“자신감을 가져. 이 정도만으로도 훌륭하다니까? 솔직히 이게 가능할 거라 생각도 안 했는걸.”
“놀리는 거예요? 기혁은 해냈잖아요.”
“맞다. 우리랑 너무 달랐다.”
“음, 얘들아. 너무 높은 벽을 올려다보는 건 아니란다. 다쳐요.”
“재수 없어요.”
“동감.”
눈을 흘기는 메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얘들 좀 봐라? 전직 마왕이랑 같이 놀려고 하네. 하여튼 당돌하다니까.
그래도 귀여웠다. 한편으로는 기특하고.
쟤들 입장에서는 내가 또래 친구 아닌가. 비슷한 나이의 상대에게 저렇게 부탁하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이건 본인의 실력에 자신이 있을수록 더욱 그렇다.
한데 이 아이들은 서슴없이 묻는다.
이거 놀라운 일이다.
내가 보여 준 게 많아서?
아니, 10대 후반. 이 나이대 애들은 생각보다 이성적이지 않다. 실제로 아카데미의 대부분이 아직도 날 의심하잖나. 내가 그 지랄을 떨었는데도 상황이 이렇다.
그에 비해, 이 두 아이는 날 있는 그대로 본다.
불평은 해도 내 가르침을 족족 흡수하는 메리나, 내가 가진 경험과 지식을 조금이라도 더 뺏으려고 매일 같이 날 괴롭히는 준우나.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영감이 이런 느낌이었구나.’
새삼스럽지만 영감이 왜 날 보며 웃었는지 알겠다.
재능이, 젊음이, 열정이, 저 아이들을 가진 온갖 싱그러운 기운들이 날 즐겁게 만들고 있으니까.
“자, 간단하게 유의할 점만 짚고, 한 번 더 돌자.”
“아…… 지금요?”
“좋다.”
“눈치 없어요, 준우. 지금 돌면요, 분명히 저 악마는 ‘시간 남았네? 자기 전에 간단하게 한 번만 더 돌까?’ 하며 또 할 거라고요.”
“더 좋군. 전투는 언제나 환영이다.”
“……젠장, 모두 꺼져 줬으면 좋겠어요.”
“킥.”
티격태격하는 둘을 보며 웃는다.
지금 나, 영감과 비슷하게 웃지 않을까?
아마 그럴 거 같네.
그렇게 게이트에서 우리의 하루는 저물어 가고 있었다.
* * *
한준우는 인정해야만 했다.
‘내가 생각 잘못했어.’
솔직히 아카데미에 입학할 때만 해도 자신의 머릿속 어디에 박기혁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몰락한 가문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강해지기도 바쁜 시간. 박기혁이란 존재 자체가 불필요한 정보라고 생각했던 한준우였다.
하지만 박기혁의 첫인상은 이런 한준우의 마음마저 흔들 만큼 충격적이었다.
“축하한다. 너희들은 나를 선택할 기회를 얻었다. 기회를 잡든 말든 그건 너희들의 선택이다. 부디 행운이 있길 바란다. 이상.”
나는 아쉬울 게 없다. 나를 잡지 않으면 너희만 손해다.
과연 자신감인가, 오만함인가…… 궁금했다.
아마 그때부터일 거다. 한준우가 박기혁에게 관심을 가진 게.
검호 가문의 막내. 마나 허무증으로 몰락한 비운의 천재…….
검색 한 번으로 수많은 정보들이 떠올랐다.
개중 가장 한준우의 관심을 끈 건.
‘검호가 낳은 최고의 재능이라…….’
산군 박수혁보다, 백호 박민지보다 더.
아버지이자, 당대 검호인 박건은 막내아들을 자신이 낳은 최고의 재능으로 꼽았다.
하지만 한준우는 자신이 본 것만 믿는 인간.
때문에 박기혁의 조로 향했다. 오직 검을 나누기 위해서.
그렇게 만난 박기혁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인물이었다.
일단은.
‘기묘했어.’
두려움이 없었다. 세 명뿐인 조에서도 태연히 식사를 즐길 정도로.
형을 욕한다고 교수와 척을 질 정도로 거침없었고, 마나 허무증을 극복했다는 사실을 숨길 법도 한데 보란 듯이 능력을 드러낼 정도로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하지만 이게 박기혁의 끝이 아니다.
‘놀라웠지.’
듣도 보도 못한 스켈레톤을 사용하고, 훌륭한 마법사인 메르헴을 더 훌륭한 주술사로 만들어 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과 맞댄 검.
그 검호의 검은 충격을 넘어 경악…… 아니, 공포. 그건 공포였다.
‘정작, 녀석은 컨트롤되지 않는다고 불평했지만.’
솔직히 여기도 그렇다.
이곳이 2레벨 게이트지만 한준우가 보기에 박기혁의 실력을 발휘하기에는 턱도 없는 곳이다. 막말로 스켈레톤들만 불러내도 하루 만에 모두 정리되리라.
그럼에도 여기에 오는 이유는 배우기 위해서.
“준우야, 모든 것에서는 배울 게 있는 법이다. 하찮은 전투? 전투에 하찮은 게 어디 있어. 세상에 하찮은 건 없어. ‘하찮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아무것도 못 얻는 거야.”
“배움에는 끝이 없는 법이거든.”
더 위를 노리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찰해야 한다.
박기혁은 멈추지 않는다.
마법이면 마법, 검술이면 검술, 모든 걸 가졌음에도 안주하지 않는다.
항상 배우려 하고, 더 위를 노린다.
타협? 포기? 그딴 건 이 남자의 사전에 없다.
한준우는 이런 박기혁의 자세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래, 이런 삶이 내가 원한 삶이다.’
한준우가 오크 족장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중력을 무시하듯 허공을 유영하는 한준우.
오크 족장이 자신을 지나치는 한준우를 멍청하게 바라보는데.
그때, 박기혁의 대검이 허공을 갈랐다.
“받아!!”
대검의 검면에 한준우의 얼굴이 반사되는 순간.
그 찰나의 순간에.
손잡이를 잡아.
베어 낸다!
촤륵!
영롱한 달빛 사이로 붉은 피가 흩뿌려지고.
잠시 뒤, 바닥에는 오크 족장의 머리통이 굴러다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