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15화>
난 그렇다.
일단 결심을 세웠으면 그 즉시 행동에 옮겨야 한다.
이것저것 재고 주저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말을 뱉지 않았다면 몰라도, 내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책임지는 게 사나이의 멋 아니겠나.
다음 날 아침, 해가 뜨기 무섭게 동아리 창설에 들어갔다.
“박기혁 학생, 여기요. 방금 드린 신청서 쓰셔서 제출해 주세요. 동아리명이랑, 목적, 체크 표시한 부분 쓰시고요.”
동아리명 : 출구 없는 지옥
목적 : 무한대련
인사로 주먹을 날리는 본격 강자들의 동아리.
일단 문을 열고 들어오면 넌 이미 강자! 왜냐하면 문을 미치도록 무겁게 만들 거거든. 최소 200킬로? 약자는 살아남지 못한다. 강해져라, 애송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썼다.
크!! 쓰고 있는데도 가슴이 웅장해진다.
“추, 출구 없는 지옥. 하 ,하…… 동아리명이 과격하네요. 목적은 무한…… 대련?”
“단어 그대로 무한으로 대련한다는 거죠.”
“…….”
무한 대련이란 말을 이해한 직원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더니, 문을 200킬로 이상으로 만든다는 말에 눈에 띄게 당황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지, 스파링 코트를 세운다는 대목에서 소음이나 안전 등 갖가지 이유를 말하며 말리려 했지만.
난 한다면 하는 놈이다. 그런 것도 생각 안 했을까.
한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이른바 엄마 찬스 카드다.
“현재 옵티멈에서도 활용하고 있는 특제 스파링 코트를 세울 겁니다. 안에 들어가는 보호구도 역시 최고로. 이 또한 옵티멈에서 지원해 주는 겁니다.”
“하, 하, 하…….”
옵티멈의 무제한 지원이 약속된 서류를 보자, 직원은 이제 이게 자신의 손을 떠났다는 걸 인정하는 듯 모든 걸 포기한 얼굴로 본인의 역할에 충실해졌다.
내가 모든 책임도, 비용도 다 댄다는데 뭐라 하겠나.
“신청됐고요. 이제 학생분이 할 일은 총학생회에 가서 허가받고, 담당 교수님 있죠? 동아리 창설 인증을 공문으로 보내시면 됩니다.”
의외인 건, 아카데미에서 동아리가 지닌 비중치고는 동아리 창설 자체는 어렵지 않더라. 그런데 또 잠깐만 생각해 보자 곧바로 답이 나왔다.
학생들이 동아리에서 원하는 건 뭐니 뭐니 해도 인맥이다. 이를 통해 가까이는 아카데미 생활, 더 나아가 레이드나 팀 가입 등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겠다는 거다.
이런 인맥은 역사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끌어 줄 선배가 있어야 하고 밀어 줄 후배가 있어야 하는데 신생 동아리는 말 그대로 신생, 아무것도 없다.
자연히 인맥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메리트가 떨어지는 거다.
여하튼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좋았다. 시작이 반인데, 시작이 상쾌하잖아.
신청서 접수를 끝내고 곧바로 총학생회로 나왔다. 입구로 들어서자, 한쪽 벽면에 쌓인 수백 개의 소주 박스가 인상적인 공간이었다.
저 끔찍한 걸 마시는 이들은 자신의 근육이 줄어든다는 걸 아려나…… 잠시 쓸데없는 생각을 한 뒤 곧바로 허가를 받으려 했다.
다만 문제라면 저쪽의 태도.
무슨 말만 하면 ‘곤란한데? 해 줄 수 없는데? 우리가 뭘 믿고?’라며 반문을 던지는 게 아닌가. 지들이 무슨 갑이라도 된 줄 알고.
고백하자면 나 이때 조금 흥분했다.
요즘 너무 착하게 살았나. 손이 근질거렸는데, 간만에 손맛을 볼 수 있는 기회이지 않나.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더 흥분해라! 참지 마!!
그런데 한창 말씨름하던 중에 내 이름 ‘박기혁’ 세 글자를 듣고는 잠깐 주춤하더라.
내심 응원했다. ‘쫄지 마, 새끼들아! 선배의 위상을 세워야지!’
다행히 내 바람을 알았는지, 몇몇 놈들은 굴하지 않고 나에게 날을 세웠다.
인정할 수 없다며, 실력을 봐야 한다며.
그렇지! 그거야! 내가 원한 게 그거라고!
내심 환호하며 따라갔고.
그 뒤는? 굳이 내 입으로 말해야 돼?
“끄악!!”
“커헙!”
“사, 살려 줘.”
손맛 달달하더라.
총학생회 허가는 손쉽게 마무리 지었고, 이제 담당 교수님 공문만 남은 상황.
그런데 모두 알다시피 난 교수랑 사이가 좋지 않다.
이대로 들이닥치면 거부할 게 뻔하다. 오히려 이렇게 그냥 딱 잘라 거부하면 그게 양반이다. 온갖 것들을 트집 잡으며 해 줄 듯 말 듯 약 올리는 악질들이 나오지 않으란 법도 없다.
의외로 어른의 질투는 집요하고 추잡하거든.
문제는 이건 내가 어쩔 수 없는 영역이다. 교수의 권한이라는데 어쩌랴. 공문을 위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이때 잠깐 참을까 싶었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눈 딱 감고 고개를 숙일까 했다.
그런데 난 군자도 성인도 아니다.
마왕이다.
앞에서 그 지랄을 보면? 당장 척추를 접어 버릴 거다.
동아리 창설 좀 하려다 그러는 건 좀 그렇지 않나.
그래서 포기할 거냐고?
날 아직도 모르나.
나 박기혁이다
내 사전에 포기가 있을 리 없잖아.
* * *
박기혁이 한 예상대로였다. 그가 동아리를 창설한다는 말이 나돌자, 교수들은 일제히 움직임에 들어가는데.
“이번에라도 본때를 보여 줘야 합니다. 아무리 힘이 있으면 뭐합니까. 인성이 거지 같은데.”
“옳습니다. 아무리 아카데미가 강함을 추구한다 해도, 저런 망나니 자식은 길들일 필요가 있어요.”
“이잉, 교수 알기를 뭐로 알고. 나 때는 말이야. 스승의 그림자도 안 밟았어. 쯧, 교권이 땅에 떨어졌구나.”
“그래도 학생의 자율권을 이런 식으로 강제한다는 건…….”
“맞다. 우리가 학문을 가르치는 게 아니잖나. 창칼이 날아드는 전장에서 호전성은 필수. 이 정도 패기도 용인하지 않는 건 문제 있다.”
한국 아카데미의 교육 특성상, 조장의 역할이 중요했고 자연히 교수의 권위가 타 아카데미보다 낮은 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 간혹 나오는 말 같지도 않은 괴물은 안 그래도 위태롭던 교수의 권위를 땅에 떨어트렸다.
전례도 있지 않나.
박수혁. 1학년 때 교수들을 찾아가 모두를 쓰러트린,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잠자코 듣던, 그렇지만 심사 때의 일로 누구보다 박기혁에게 감정이 깊은 황준엽 교수가 손을 들며 발언했다.
“저희 아카데미에서는 협동만큼이나 자율을 중요시합니다. 그런데 박기혁의 동아리 창설을 명분 없이 막는다면, 자칫 역풍이 불지도 모릅니다.”
“끄응, 맞지. 박기혁의 뒤에는 옵티멈의 마녀가 있으니.”
옵티멈은 아카데미의 최대 후원자. 당연히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방법을 달리해야죠. 저쪽이 명분을 들고 나왔다면, 명분으로요.”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가 담당 교수가 되겠습니다.”
“호오라! 이 사람, 그런 묘수가 있었구만.”
“쯧,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척보면 척이다. 노회한 교수들은 황준엽의 의도를 눈치챘다.
황준엽은 담당 교수가 되어 두고두고 박기혁을 괴롭힐 생각이었다. 방법은 많다. 일거리를 던져 주거나, 결제를 미루거나, 행사를 반려하거나.
이런 식의 명분 싸움으로 가면 교수는 생각보다 많은 권한을 가졌다.
그 치졸함에 고소해하는 교수가 있는 반면, 인상을 찌푸리는 교수도 보였지만.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다.
정도는 달라도 모두 동의하는 부분이니까.
“세상모르고 날뛰는 호랑이에게 목줄 정도는 채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앞장서겠습니다. 제게 힘을 실어 주시죠.”
이렇게 회동이 마무리되는 듯했다.
교수들은 목줄을, 황준엽은 사사로운 복수를, 모두가 만족스럽게.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들어온 조교의 첫마디에 ‘그럼 그렇지.’ 하며 모두가 얼굴을 폈다.
“박기혁이 신청서를 냈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어지는 조교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찌그러졌는데.
“그런데…… 담당 교수가 위그드라실이라고 하는데요.”
위그드라실
학장, 아니, 설령 대통령이 온다 해도 건들 수 없는 아카데미의 최정점이었다.
* * *
혹자는 말한다.
위그드라실이 곧 아카데미라고.
그녀가 존재함에 따라 한국 아카데미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고.
과장이 있지만, 절대 틀린 말은 아니다.
수많은 국가들이 아카데미를 보유하길 원하지만, 그중 아카데미를 보유한 국가는 고작 8곳.
이들의 공통점은 ‘수호령’의 존재 여부였다.
수호령이 없으면 아카데미도 없다. 다시 말해, 위그드라실이 없으면 아카데미는 애초에 세워질 수 없었단 말이다.
하지만 이런 명성이 무색하게도 위그드라실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은데, 아카데미 생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게이트. ‘지혜의 숲’이라는 산책로에 들어가면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그녀였다.
그래서인지 학생들은 그녀를 어려워하지 않는다. 고민을 털어놓기를 주저하지 않고, 때로는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그녀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현명한 조언을 건넸다.
그런데, 이토록 위대하고 현명한 위그드라실인데, 현재는 무척 당황하는 중이다.
“야! 위그드라실! 얼굴 좀 보자!!”
대뜸 숲으로 쳐들어와 자신을 불러낸 이 남자.
박기혁 때문에.
“담당 교수 좀 돼 줘.”
건방지기 짝이 없는 대답.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자신의 격에 주눅이 들어 자연스럽게 자신을 낮추는데, 눈앞의 박기혁은 낮추기는커녕 당당하다. 거침없다.
마치 친구처럼 동등한 위치에서 눈을 마주했다.
‘내 앞에서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인간을 만난 적이 언제였나요.’
영생에 가까운 기억을 되짚어 보다 포기했다.
없었으니까. 이토록 자신을 편하게 대하는 인간은 여기 박기혁이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박기혁의 거래에 응했다.
“좋아요.”
궁금했다.
과연 박기혁이라는 씨앗은 어떤 꽃을 피울까.
위그드라실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 * *
인정해야겠다.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일이 잘 풀렸다.
위그드라실이라 했던가. 그 아줌마 생각 이상으로 이야기가 잘 통하더라. 흔쾌히 공문을 보내 줄 줄이야.
교수들이랑 격렬한 몸의 대화까지 계획했는데, 위그드라실이 여럿 살린 셈이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일방적으로 호의를 베풀어 달라는 건, 구걸 아닌가.
설마 내가 구걸 따위를 하겠나. 쪽팔리게.
위그드라실이 우리 담당 교수가 돼 주면 우리는 위그드라실이 내주는 임무. 예를 들면 아카데미 인근의 ‘퍼플 게이트’ 같은 각종 궂은일을 처리해 준다.
내 입장에서는 전혀 손해 볼 게 없는 거래였다. 가뜩이나 실전에 열을 올리는데, 게이트? 감사, 압도적 감사지.
이렇게 모두가 윈윈인 거래가 끝나고, 현재 우리는 계약금 명목으로 받게 된 첫 번째 임무를 향해 산 위를 오르고 있었다.
“으으으. 할아범, 운전 이렇게…… 으악!”
“곧 있으면 도착합니다.”
덜컹, 덜컹.
차량이 가파른 산길을 질주했다.
“젠장이에요! 지랄이라고요! 내가 왜 주말까지 이런 곳에 와야 하나요!”
“그건, 우리가 같은 조니까.”
“동아리라면서요!”
“어허, 뭐 이리 급하나.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그리고 어제부로 같은 동아리가 됐지.”
“말도 안 돼요! 저는 동의한 적 없다고요!!”
“없다고? 신청서에 지장 찍었잖아? 그럼 동의한 거지.”
“그건, 니가 나 쓰러져 있을 때 강제로 찍은 거잖아욧!”
할 말 없네. 틀린 말은 아니니까.
어제 즐겁고 행복한 스쿼트 데이를 맞이하며 150킬로 스쿼트 10세트 조지고 탈진했을 때 잽싸게 지장을 찍었다.
그래도 조금 억울한 게.
저기 한발 뒤에서 조용히 닥치고 있는 한준우도 동참했는데, 왜 나만 갈구고 그러냐.
“그래도 신나지 않아? 이제 주말도 함께할 수 있는 거잖아. 벌써부터 대흉근이 떨리는데?”
“흉물스러운 거 저리 치워요. 그리고 단어 선택 조심하세요. 이건 함께가 아니라 훈련이에요.”
“그게 중요하냐. 봐봐. 우리는 축복받았다니까. 남들은 게이트 신청하고 허가받아야 하는데, 우리는 봐라. 위그드라실이 준 이 종이 하나면 모두 패스 아니야. 그뿐이야? 지원금도 받아 돈도 벌고, 훈련도 하고, 얼마나 좋아! 안 그래, 준우야?”
“동의한다.”
“꺼져요! 너! 너! 모두 죽었으…… 아악!”
덜컹, 차량이 널뛰기를 한다.
메리의 입에서 “할아버엄!!” 곡소리가 나는데, 정작 앞에 있는 메리의 집사 영감은 “허허. 아가씨. 다 와 갑니다.” 하며 평온하게 웃는다.
저번에 봤을 때 느낀 거지만 이 영감 만만치 않다니까.
“그런데 2레벨이라고 했나.”
“어, ‘오크 군락’이라고 적혀 있네.”
“‘보스(Boss)’가 나오겠군. 만만치 않겠어.”
한준우가 우려는 표하는데, 입은 만만치 않겠다고 하면서 정작 눈은 기대에 가득 찼다.
과연 전투광. 바람직한 자세다. 우리 메리가 이거 반만 닮았으면……
“뭘 봐요. 꺼져요.”
……안 닮았으면 만들면 되지. 넌 내가 책임지고 전투밖에 모르는 몸으로 만들어 주마.
그렇게 우리는 셀 수 없는 덜컹임과 몸이 튕겨나갈 것 같은 충격을 견디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할아범, 책임지고 헬기를 구해 줘요. 그리고 이건 또 왜 이렇게 흉측해요.”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무장을 갖추는 메리.
왼손에는 백병전에 특화된 방패인 버클러가, 반대편 손에는 족히 어른 머리만 한 크기에 날카로운 가시가 박힌 철퇴가 자리했다.
“이거, 괜찮군.”
한준우 역시 무장을 갖춘 상태.
오른쪽 검집에는 롱소드가, 왼쪽 검집에는 레이피어. 양쪽 허벅지에는 투척용 대거 16자루, 양 손목에는 사복검 한 자루씩.
온몸을 검으로 도배한 준우는 내가 본 이래 가장 행복하게 웃어 보였다.
“마음에 드냐?”
“많이. 선물 고맙다.”
“좋네요. 어머님한테 감사하다 전해 주세요.”
“나도.”
이 모든 게 어머니가 준비한 선물이다. 내가 처음 사귄 친구라며 밥까지 함께하시더니, 한사코 괜찮다 해도 결국 이런 것까지 챙겨 주셨다.
따뜻하고, 고맙고, 뭔가 가슴이 벅찼다.
그러니 착한 아들로서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나.
“밥값 하러 가자.”
대검을 어깨에 걸친 채 게이트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