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7화>
한국 아카데미는 타국과 차별되는 ‘협동’ 중시 교육 체계로 유명하다.
- 홀로 완성되는 숲은 없다.
아카데미의 시초이며 지금도 현역인 위그드라실의 신념이 반영된 이 철학으로, 한국은 철저한 룰(Rule)에 근거한 발전을 추구해 왔고.
이는 입학부터 예외가 없었다.
입학시험에서 상위 등수의 학생에게 ‘조장’의 자리를 준다.
조장은 각자의 조에 맞는 학생들을 영입한다. 가진 바 능력을 모두 사용해 조를 꾸리면, 그때부터 조는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
수업도, 과제도…… 심지어 점수마저도 모두 공유하는 운명 공동체.
때문에 무엇보다 조장이 중요했다.
조장은 이 공동체의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니까.
방법은 상관없다.
성격으로 조원들을 아우르든, 능력으로 다독이든, 아니면 힘으로 찍어 누르든. 가진 바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서 보여 주기만 하면 된다.
공동체를 이끌 수 있는가, 없는가.
이것이 조장의 역할이며 가치였고, 한국 아카데미가 추구하는 ‘협동’의 핵심이었다.
* * *
아카데미 대강당.
축구 경기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규모가 큰 강당에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합격자와 그들의 가족들부터, 에이전트의 스카우트와 취재진 같은 각종 관계자들까지.
모두 각자의 목적으로 모인 자리에서, 나와 어머니는 단상 앞 가장 첫 줄에 앉아 있었다.
“후우, 떨리네.”
“엄마는 매번 오잖아요. 그런데도 떨려요?”
“당연하지. 비즈니스하고 가족 일은 아예 다른 거야.”
그렇게 따져도 세 번째 아닌가. 장난을 치고 싶었지만 참는다. 꼭 잡은 어머니의 손에서 전해지는 떨림에 진심이 느껴졌으니까.
“그런데 1조를 포기해도 괜찮겠어?”
“저는 상관없는데요. 엄마도 찬성했잖아요. 왜요, 아직도 신경 쓰이세요.”
“아무렴, 1조잖니. 순서란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여도 첫 번째라는 상징은 생각보다 유용하단다.”
전통적으로 입학시험 수석이 1조장에 오른다.
1조장은 첫인사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녔고, 그만큼 동기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이 모여 차후 조 편성에 강점을 보였으니, 괜히 역사상 1조가 그 학년의 대표가 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난 이런 1조 자리를 걷어찼다.
일말의 미련도 없이. 뻥 하고 시원하게.
물론 공짜는 아니다. 대신 내년 아카데미 졸업생의 사전 접촉권을 약속받았다.
바로 여기 있는 김 여사를 위해.
“엄마가 아들 볼 낯이 없어. 선물을 줘도 모자란데 오히려 받기만 하고…… 지금이라도 물리면 안 될까? 사전 접촉권 같은 거 없어도 옵티멈은 상관없어. 최고라고!”
“대신 있으면 좋죠.”
“……있으면야 좋지.”
“그럼 됐어요. 아들이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시고 즐겁게 누리세요.”
“그래도 꼴찌는 아니잖니.”
“훗. 원래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잖아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어머니를 향해 밝게 웃어 준다.
“그깟 순서로 평가하기에는 김 여사의 아들이 너무 큽니다.”
분명히 말하겠다. 지금 내 뒤에 앉아 있는 저 아이들이 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햇병아리들을 거두어들이는 거다.
나를 놓친다면 제가 제 발로 복을 차는 일인데, 순서 따위? 아무런 상관없다. 암, 그렇고말고.
곧이어 천수만 학장의 인사로 입학식이 시작된다.
중후한 말투로 “이 세계의 희망이며 평화인 여러분에게 인사드려서 영광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제법 귀엽다.
여우가 곰 흉내를 내잖나.
불과 몇 시간 전, 나를 향해 거래를 제시하던 천수만은 여우였다.
적당히 약았고, 적당히 능력 있고, 적당히 야심 있는 전형적인 여우.
그렇게 실속을 챙기면서도 나름대로 정도를 지킬 줄 아는 지혜로운 여우 말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다. 일단 대화가 되잖나.
미련하게 착하기 만한 곰만큼 답답하고 속 터지는 인간도 드물다.
예를 들면 성녀나, 성녀이거나, 혹은 성녀처럼.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으니, 이제 지겨운 훈화 시간도 끝을 달려간다.
“……온갖 난관이 닥칠 겁니다. 많은 유혹에 시험 받을 겁니다. 하지만 절대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야말로 이 땅의 미래란 것을, 평화라는 것을. 그럼에도 포기하고 싶다면 주저하지 말고 저희를 찾아 주십시오. 여러분들 뒤에는 저희, 아카데미가 있겠습니다.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어지는 박수, 간단한 사회자의 안내.
곧이어 눈부시게 쏘아지는 플래시. 모두의 주목 속에 단상 위로 올라가는 한 명의 학생.
지금부터 본격적인 쇼 타임이다.
입학식 최고의 꽃.
조장 발표가 시작됐다.
“반갑습니다. 저는 1조장 진유리입니다. 1조장으로서 자랑스러운 동기 여러분들을 가장 먼저 만나 뵐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 * *
셰이크 메르헴 공주는 지겨웠다.
“……내가 다른 조장보다 나은 점은 실전 경험이야. 이것만큼은 내가 확실하게 책임질게. 물론 자세한 건 우리 조에 들어와야겠지…….”
귀여운 외모의 16조장이 나름대로 매력을 어필해 보지만.
‘……출출해요.’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젯밤 남겨 놓은 치킨 한 조각이 아른거릴 뿐이었다.
만약 기다리던 사람의 순번이 마지막이 아니었다면, 메르헴 공주는 적당한 핑계를 되며 호텔로 향했으리라.
“우웩, 귀척 소름!”
“왜, 실제로도 귀엽지 않아? 그런데 쟤는 뭘로 조장까지 됐데. 누구 아는 사람?”
“소문에는 협회 부회장 딸이라던데? 유명한 몽크한테 어렸을 때부터 지도받았다고 하더라.”
“와, 몽크면 치료에 전열까지 맡을 수 있는 귀족 중에서도 귀족 아니야.
“금수저, 재수 없어.”
금으로 수저를? 금이 얼마나 무른데 왜 수저를 만들까요.
지겹고 출출한 것을 넘어, 이제는 잡생각까지 든다. 메르헴은 금으로 만든 수저를 진지하게 상상해 보다 이내 그만둬야 했다.
곁에 있던 집사의 말 때문에.
“공주님, 지금 나오는 남자가 17조장입니다. 이름은 강태석. 육체파 초인으로, 배태랑 디펜시브로 알려진 패웅 ‘강만희’의 아들입니다.”
“패웅 아들? 약한데요?”
“약해도 기억해 놓으셔야 합니다. 유력가와 친분을 쌓으면 나쁜 게 없는 법입니다.”
“너무 약해요. 가치 없어요.”
“공주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이름만 기억해 놓으시길.”
“알았어요.”
기품 넘치는 외모와는 다르게 천성이 게으른 메르헴 공주.
그나마 어렸을 때부터 함께한 집사 정도 되니 대꾸해 주는 거지, 다른 이었다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공주님, 한국의 수호령이 조언한 대로 따르실 겁니까? 제가 개인적으로 알아봤습니다만, 별로 좋은 선택 같지 않아서 말입니다.”
“이유는요?”
“그게 불능자라고 합니다. 마나 허무증 탓에 마나를 사용하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건 나도 알아요.”
“또한 불과 몇 달 전에 입원 기록이 있어 입수했는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만큼 참담한 일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 탓에 기억도 상실됐다고 합니다.”
“기억 상실요? 흥미롭네요.”
흥미롭다는 메르헴 공주의 반응에 집사의 표정이 바뀐다.
‘흥미롭다.’라는 말은 ‘계속해 봐.’와 같은 말.
딸 같은 공주님이 박기혁처럼 문제 많은 인물의 밑으로 들어가길 바라지 않는 집사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설득했다.
그러나 집사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이미 메르헴 공주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위그드라실의 존재감은 그만큼 충격적이었으니까.
이 정도로 신령한 존재가 조언을 해 줬다면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박기혁을 추천한 이유가.
“환영합니다. 초원의 공주님.”
“약속한 대로 2등 선물을 드려야겠죠. 선물로 저는 공주님을 조장으로 추천하지 않을 거랍니다. 왜인지는 공주님이 더 잘 아시죠? 공주님은 ‘싸우는 자’이지 ‘이끄는 자’에 어울리지 않아요.”
“두 번째 선물은 조언이에요. 공주님의 색깔은 특별하답니다. 너무 특별해서 어지간해서는 섞이기 힘든 색이죠. 그러니 모든 걸 포용할 색을 찾는 게 중요하겠죠? 예를 들면 모든 색을 포용할 ‘검은색’처럼 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공주님은 운이 좋아요. 이번 기수에 조건에 완벽히 부합하는 인물이 있거든요.”
“박기혁 군. 제가 이제껏 본 가장 검은 존재였어요.”
이렇게 놓치지 말라며 신신당부하니, 메르헴의 사고 한편에는 자신도 모르는 새 박기혁이란 이름이 강렬히 각인돼 있었고.
방금 19조의 발표가 끝나며, 지금 막 그 이름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런 이유로 공주님의 능력을 위해서라도 진룡의 진유리가 있는 1조로 향하는 게 좋지 않을까 추측해…….”
“쉿. 조용.”
뚜벅뚜벅.
말의 뒷다리를 닮은 긴 다리. 고릴라의 우람한 팔을 연상시키는 팔뚝.
상식을 벗어난 체구의 박기혁이 등장하자, 일순간 소란스럽던 회의장이 쥐죽은 듯 조용해진다.
존재만으로 모두가 압도당한 것이다.
그렇게 박기혁은 그녀와의 첫 만남 때처럼 모두를 향해 밝게 웃어 주더니.
“축하한다. 너희들은 나를 선택할 기회를 얻었다. 기회를 잡든 말든 그건 너희들의 선택이다. 부디 행운이 있길 바란다. 이상.”
끝이었다.
정말 이게 끝이었다.
그럴듯한 미사어구는 없다.
혹할 만한 공약 따위도 없다.
그저 가벼운 권유, 그뿐이었다.
아쉬운 건 너희들이지, 내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박기혁은 미련 없이 단상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흥미롭네요.”
마음에 들어요.
메르헴 공주의 영롱한 눈에 박기혁이 맺혀 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새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 * *
남자답게 발표하고 내려온 뒤, 난 어머니한테 맞았다.
나도 몰랐는데 이름을 말하지 않았더라.
이거 마왕일 때 버릇이 나왔네. 이름 말하지 않는 거.
제국에서는 굳이 이름을 말할 필요도 없었다. 마왕인 나를 모르는 사람이 제국에 있을 리 없거든.
여하튼 그렇게 며칠 운동과 오른팔 길들이기를 하니까, 어느새 신입생 환영회 겸 OT가 찾아왔다.
그리고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다.
내 조에 들어오길 원하는 희망자들을.
“조장 온다. 조장~ 여기야!”
이쪽을 향해 귀엽게 손을 흔드는 소녀와
“‘너희들은 나를 선택할 기회를 얻었다!’ 크, 상남자! 지리는 패기였어!”
연신 쌍따봉을 날리는 검쟁이 한 놈.
“형님! 형님이랑 같이 운동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대흉근이 벌써 떨립니다.
야만족 뺨칠 만큼의 노출증을 가진 근육쟁이도 있네.
이밖에도 끈 떨어진 인형처럼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는 녀석들이나, 벌써부터 따로 무리를 짓고 있는 놈들, 마지못해 들어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무리도 있고. 얼씨구? 자는 놈도 있어?
전반적으로 표정이 그렇다.
흐르는 분위기도 묘하고.
태도도 건방진 게.
대충 상황이 읽히는걸. 쟤들, 울며 겨자 먹기로 온 것이 분명하다.
경쟁률이 센 조. 예를 들면 진유리의 1조나 타이탄의 아들로 알려진 헨리의 2조 같은, 소위 말하는 1픽에 지원했다 떨어진, 쭉정이들일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입학시험 때 봤던 구릿빛 피부의 외국인이 이쪽을 보며 웃고 있다.
한 명은 찾았고.
너는 짖어라, 나는 읽는다. 책만 읽고 있는 사내자식.
쟤까지 둘.
“딱 둘 건졌네.”
나머지는 고만고만하다. 딱히 평가할 껀덕지가 없는 재능들.
흔히 말하는 정신론은 이런 애들한테 필요하다.
어떻게 발전할지는 본인의 의지와 노력으로 결정되는 어중간한 원석들이거든.
어중간한데 노력도, 의지도, 독기마저 없으면? 백날 가르쳐 봐도 소용없더라.
움직일 의지가 없는 돌은 평생 돌멩이로 살아간다.
이게 칠흑 마탑의 대공자로서 수많은 아이들을 가르치며 얻은 교훈이다.
그래서 준비했다.
투욱.
아공간에서 묵직한 박스를 꺼내 놓았다.
헤드기어와 글러브를 비롯한 보호 장비였다.
“전부 껴.”
“……!!”
피차 피곤하게 서로 괴롭히지 말고.
끌고 갈 놈만 끌고 간다.
“지금부터 너희랑 나는 싸운다. 룰은 간단하다. 마법 사용해라. 무기 괜찮다. 최선을 다해 날 쓰러트려라. 대신 지린 놈은 전부 뒤로 빠진다. 이해했나?”
순간 내 몸에서 흘러나온 패기가 모두를 아우르고.
모두가 움찔한다.
이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내가 준 건 기회지 약속이 아니다.
선택은 너희가 하더라도 결정은 내가 한다.
내게 간택받고 싶다면 너희들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내게 필요한 인물인지, 아닌지를.
그러니.
“최선을 다해 보여 봐.”
쿠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