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6화>
연수지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는 정말, 내가 이런 짓까지 해야 해?’
아카데미 3년 차, 팀장으로서 가장 바쁜 시기인데 본가로 호출하더니, 느닷없이 남자랑 잘해 보란다.
뭘 어째? 아빠 인성 문제 있어?
한순간 패륜아가 될 뻔했던 연수지였다.
다행히 강요가 아니라 권유라 이유는 들을 수 있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동생 연재훈이 사고를 쳤고, 그 대상이 박기혁이란다.
옵티멈 에이전트 대표의 아들이며 검호 가문의 막내인 박기혁.
……이 쓸모없는 놈.
연수지는 박기혁이란 이름이 나온 대목에서 이미 연재훈을 밟고 있었다.
박기혁이라면 입학시험을 발칵 뒤집어 놓은 초특급 루키 아닌가.
좋은 관계로 지내도 모자랄 판에 척을 져?
그런데 또 웃긴 게, 그녀의 아버지는 이걸 기회로 여겼다.
과연 피도 눈물도 없는 상인다웠다.
비록 시작은 나빴지만 이것도 인연인데 잘해 봐라. 입학시험 수석이랑 관계를 다져 놓으면 네게도 좋지 않냐.
빙빙 둘러말했지만 연수지가 박기혁이랑 잘되길 원했다.
칠성 그룹에서 아버지의 명령은 절대적이었기에, 연수지가 아침부터 숍에 다녀오면서까지 미인계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일단 동생의 사과부터여서일까, 분위기는 좋았다.
나이대도 비슷하고 관심사도 같다. 여기에 탁월한 외모(?)까지 곁들여지니, 정말 아버지의 말대로 좋은 관계로 발전될 수도 있을 듯 보였다.
봐봐, 나도 아직 죽지 않았다니까.
실제로 연수지는 드넓은 등을 보며 ‘이 정도면 괜찮은데?’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칠성가의 보고(寶庫) 앞에 선 순간.
좀 더 정확히는 보고 앞에 장식돼 있는 장식들을 보던 순간.
박기혁이 눈에 띄게 즐거워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전에 대화하며 웃는 거랑은 다르게 진심으로!
……뭐야. 나 시체한테 밀린 거야?
아무래도 아버지의 권유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 * *
“이야, 멋지네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취미였어요. 당신이 잡았던 보스들의 머리를 장식해 놓는 거요.”
“초인이셨나 보죠?”
“네, 헌터셨답니다. 당시에는 꽤 유명하셨다고 해요. 지금의 칠성 그룹을 일으키신 분이죠.”
“훌륭한 분이시네요. 하긴 이런 고급스러운 취미를 가지신 분이 훌륭하지 않을 리 없죠. 암 그렇고말고요.”
“그런가…… 요.”
“여유가 있다면 잠시만 둘러보고 가도 될까요?”
“……얼마든지 즐기시길.”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내 시선이 벽에 걸린 장식들로 향한다.
민망한 수작에 적당히 호응해 줬을 때랑은 전혀 다른 눈으로.
‘정말 괜찮은데?’
이건 블러드 오크 샤먼이고, 트롤 챔피언. 호오, 저건 트윈헤드 오우거잖아. 세이렌은 왜 저기 놔뒀데……
실력이 있었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가 보다. 잡아 본 입장에서 하나같이 까다로운 놈들뿐이네.
그중에서도 내 눈을 사로잡은 놈은 이 녀석이다.
염소의 대가리에 웅장한 뿔이 인상적인 놈. 여기서 유일하게 내가 잡아 본 적이 없는 놈이다.
그런데 저 완전 암흑으로 가득 찬 눈은…… 아무리 봐도 악마잖아?
“얘는 뭐죠?”
“바포메트란 악마종 보스예요. 프랑스 파리에 출몰했던 놈으로 4차 레이드에 걸쳐 겨우 잡았다고 해요.”
“이야.”
“당시 워낙 인명 피해가 컸던 탓에 이 보스가 있던 게이트를 ‘저주의 붉은 달’이라고 불렀다고 해요. 눈치채신 것 같네요. 맞아요. ‘레드 게이트’였죠.”
레드 게이트(Red Gate)
들어 봤다. 발생 즉시 몬스터를 토해 내는 돌발 게이트. 최악의 재앙으로 불리며 ‘나이트’가 생긴 이유이기도 했다.
“자세한 건 저도 몰라요. 너무 예전 일이라서요. 다만 할아버지가 자서전에서도 언급하실 정도로 악명 높았던 보스였죠.”
“아마도 그럴 겁니다.”
아직도 귀기(鬼氣)를 유지할 정도면…….
“구경 잘했습니다. 훌륭한 ‘장식’이네요. 이만 가죠.”
“그럴까요? 여기로.”
연수지가 안으로 들어가면 이런 장식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을 거라 큰소리쳤지만.
글쎄……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과연 그게 가능할까.
난 바포메트의 머리를 스치듯 보고는 안으로 향했다.
* * *
그날 밤.
박기혁이 칠성의 보상을 받고서 집으로 향했을 때, 변호사 최하늘은 옵티멈 본사로 향했다.
“그러니까, 이게…… 우리 기혁이가 선택한 거란 말이죠.”
“네, 그렇습니다.”
김연희가 안경을 고쳐 쓰며 패드를 뚫어져라본다.
처음으로 보이는 건 아공간 주머니 100호. 쉽게 말해 100평짜리 아공간 주머니란 말이다.
100평 정도면 개인이 쓰기에는 터무니없이 크다. 그래서 대형 몬스터 사체를 운반해야 하는, 이른바 대형 에이전트 같은 법인 사업체들이 운용하는 아티팩트였다.
확실히 돈이 있어도 사기 힘든 아티팩트인만큼 마냥 나쁘다고 할 수 없는 선택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입장에서지.
박기혁의 뒤에 있는 건 김연희.
세계 5대 에이전트로 꼽히는 옵티멈의 주인이다.
“얘는, 아공간 주머니가 필요하다면 말을 하지. 괜히 아깝게 이런 걸…… 최 팀장이 좀 말리지 그랬어요.”
“한사코 말렸습니다.”
“말렸는데도 굳이 이걸 골랐단 말이죠. 음, 그렇게 수준이 낮았나요? 칠성 그룹의 보고라는 거기요.”
“당연히 저희에 비할 바는 아니었습니다만, 분명히 간간이 쓸 만한 것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요?”
“두 개만 꼽자면, 7레벨 보스 ‘카랑카’의 곤봉을 개조한 카랑카의 징벌과 그리고 전에 대표님도 그토록 찾으셨던.”
“설마 ‘이그니스의 핵’ 말이에요?”
“네, 이그니스의 핵이 오리지널 형태로 있었습니다.”
“그게 거기 있었어요?!”
최상급 정령 이그니스에게서 아주 극소량으로 나오는 이그니스의 정령석.
화 속성을 다루는 초인에게는 천연 영약이며, 동시에 특급 무구를 제련하는 데 꼭 필요한 재료라 에이전트에게는 늘 부족한 재료였다.
아공간 주머니 100호와 이그니스의 핵.
길을 가는 누굴 잡고 물어봐도 이그니스의 핵이 월등히 가치가 높다.
“아, 그걸 가져왔어야지.”
그녀가 왜 그토록 이그니스의 핵을 찾았는가. 다 박기혁 때문이 아닌가.
다 자기를 위해서인데, 쓸모없는 아공간 주머니나 가져오고!
벌써부터 배가 살살 아픈 김연희이었다.
“그런데 대표님, 이 말을 드려도 될지…….”
“괜찮아요.”
“그게, 제가 돌아오는 길에 이그니스의 핵에 대해 말했습니다. 제련에 들어가고 대표님이 박기혁 군의 무구를 만들어 주길 원하신다고요.”
“깜짝 선물은 물 건너갔네요. 계속해 보세요.”
“그때 박기혁 군이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뭐죠.”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데요?”
“……!!”
정령석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마석보다 한 단계 위로 취급받는 정령석을?
“제가 잘못 들었나요? 정령석을 만든다니. 하하하. 우리 아들, 그렇게 안 봤는데 허풍이 세네. 이런 건 지 아빠를 닮았다니까.”
“그, 그런가요.”
“네, 최 팀장도 못 들은 걸로 해요. 아직 어리잖아요.”
“하긴 그렇습니다. 그맘때는 뭐든 부풀리고 싶은 법입니다.”
둘 다 웃으며 말을 끝맺었지만.
이때는 몰랐다. 박기혁이 정말 정령석을 만들어 내며 다시 한번 세계에 옵티멈의 명성을 진동시킬 줄 말이다.
“후우, 좋아요. 어차피 기혁이가 받을 보상, 그 아이가 원하면 가지는 게 맞아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된다.
“바포메트의 머리? 이 흉측한 건 왜 받아 왔을까요. 혹시 아는 거 있나요?”
“그게.”
최하늘이 곤란하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오른팔’을 만든다고…….”
“오른…팔이요? 레프트, 라이트. 그 오른팔?”
“네, 오른팔.”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 * *
늘 생각하지만 시간은 언제나 빠르다.
내가 입학시험을 치른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5차 시험이 끝났다. TV에서 연일 유망주들로 도배되며 그제야 나에 대한 화제도 한풀 꺾이더라.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귀찮았거든. 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인데 여기 기자란 놈들은 내 예상보다 훨씬 집요하더라.
내가 뭐 먹는지, 어떤 운동을 하는지, 인사를 한 이웃이 사실은 오래된 내연녀이라는 둥.
미친 거 아닌가? 걔는 아직 학생이야! 누굴 범죄자로 몰고 있어.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거다. 이 세계는 초인에 관심이 많구나.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허허 웃었겠지.
그런데 현재 이 몸이 지금 바쁘다. 한창 ‘오른팔’을 만드느라 극도로 예민한데 기자까지 알짱거리니 얼마나 열 받겠나.
아마 관심이 시들지 않았으면 언제 터져도 터졌을 거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 짓도 오늘로 끝이다.
이제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까.
“…….”
질질.
고블린의 시체들을 끌고 와, 던져 넣는다.
산처럼 솟아오른 고블린 시체 더미 속으로.
“666마리.”
드디어 녀석이 요구한 숫자는 다 모았다.
까다로운 녀석. 손을 탈탈 털고는 시체 더미를 의자 삼아 앉았다.
그렇다. 이곳은 게이트 안.
‘고블린 부락’이라는 이름의 1레벨 게이트였다.
원래 난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 법적으로 ‘라이선스’를 취득하지 않으면 게이트에 출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들어왔냐고? 왜 이래, 아마추어처럼. 법대로만 돌아가면 그게 어디 세상인가?
마나를 느낀 초인의 경우, 보증인이 있을 시 게이트 참관이 가능하다.
쉽게 말해 보증인만 확실하다면 게이트 출입이 가능하단 것이다. 불법이 아니란 거지. 특혜면 모를까.
“다른 애들도 이렇게 논다고 했으니.”
돈 있고 빽 있는 놈들은 이런 식으로 게이트에서 훈련하는 게 보통이라더라. 여담이지만 어머니가 내게 이 방법을 권하지 않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떨어질 줄 알아서.
혹 떨어지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않게, 부담 주고 싶지 않으셨단다.
“믿음이 부족해, 믿음이.”
어쨌든 어머니의 도움으로 오늘 이 게이트는 나 혼자다.
오늘 하루 여기서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발가벗은 채 탭 댄스를 추든, 지금처럼 고블린을 학살하든.
아무도 모른다는 거다.
설령, 악마를 불러낸다 해도.
“그러니 마음 편히 대화해 보자고.”
아공간이 열리며 무언가 나온다.
기괴하게 솟은 뿔과 염소를 닮은 머리.
과거 유럽을 공포에 물들였던 붉은 달의 주인.
무수한 사상자를 남긴 것도 모자라, S급 헌터와 나이트 수십을 먹어치운 악마.
“바포메트, 네가 원하던 재물이다.”
드디어 죽어 있던 바포메트가 눈을 뜬다.
칠흑의 눈동자에 진짜 ‘마(魔)’가 담긴다.
그리고 그 순간.
세계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 * *
인간은 무지하다.
또한 나약하며, 어리석기까지 하다.
하지만 바포메트는 그토록 얕잡아 봤던 인간에게 죽임당했다.
아니, ‘사냥’당했다.
부끄러웠다.
수치스러웠다.
대악마인 자신이 벌레만도 못한 인간에게 사냥당하다니, 원통해서 눈을 감을 수조차 없었다.
다행히 인간 놈들은 이 바포메트를 고작 ‘악마’ 정도로 생각했고 고작 몇 번의 정화 작업만으로 안심하더라.
어리석은 인간들, 나 바포메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노니.
언젠가 내가 눈을 뜨는 순간.
내가 곧 너희들의 파멸이 되리라.
그렇게 때를 기다렸다.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해 바포메트는 수치를 무릅쓰고 전리품이 되었다.
그리고 세월의 흐름 속에 몸을 맡긴 채 살아가던 바포메트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다.
“얘는 뭐죠?”
커다란 몸뚱이만큼이나 미련한 놈이었다.
놈은 겁도 없이 머리를 들고 가더니,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깨어나라고!
말에는 힘이 있는 법.
죽음의 문턱에서 잠들어 있던 바포메트는 그 말에 다시 깨어났다.
드디어 죽음에서 깨어났다. 죽음을 극복하며 한층 강해진 영혼이 역동적으로 꿈틀댔다.
하지만 참았다. 아직 힘이 모자라다.
바포메트는 요구한다. 666마리의 제물을 바쳐 달라고. 그러면 네가 원하는 힘을 얻을 것이라 교활하게 속삭였다.
놈은 멍청하게 제물을 준비했다. 역시 인간은 어리석다니까.
바포메트는 어둠 속에서 비웃었다.
이제 힘을 되찾고 몸을 뺏은 뒤 세상에 현신하면.
끝이다.
인간을 죽이고 마구 죽이리라.
세상은 나를 파멸로 부르리라.
그렇게 환희가 가득 찬 마음으로 놈의 몸으로 들어서는데.
……이상했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완벽한 어둠.
바포메트가 걸음을 옮겨 보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는 어디인가? 이 어둠이 무언인가?
내가 앞으로 가는 게 맞는가? 뒤로 가는 게 아니고? 지금 걷고 있는 건 맞아?
얼른 벗어나야 해. 빨리 목적지로. 목…… 적지로…….
목적지가 어디지? 무엇을 하려고 여기에 왔…… 지?
그런데……
“나는 누구지?”
세상은 상대적이다.
별은 태양 앞에 자취를 감추며, 어둠은 더 큰 어둠에 잠식될 뿐이니.
이것이 세계의 진리이리라.
어둠에 먹혀 가는 바포메트.
한낱 악마가 견디기에, 마왕의 어둠은 너무도 어두웠으니.
“존재여, 네 이름이 궁금한가.”
“그, 그렇습니다.”
“네 이름은 바포메트. 나의 오른팔이다.”
어둠 속에서 마왕이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