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238)
비틀….
무릎이 살짝 꺾이며 몸이 휘청거렸다.
시야도 흔들렸다.
곧장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화살 하나를 꺼내 허벅지를 찔렀다.
그제야 흐릿해지려던 시야가 돌아왔다.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스윽… 슥….
여전히 주변의 시선은 바람의 창에 머물러 있었다.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여섯만 잡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아니, 무조건 여섯은 잡고 쓰러지리라 다짐했다.
찌릿….
첫 번째 목표를 정했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왕울이를 상대하던 진 발키리였다.
스윽….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바람의 창이 이내 반응을 보였다.
둥둥….
스슷….
손목을 비틀었다.
시위에 걸려있다가 발사된 화살처럼 바람의 창이 빠른 속도로 튀어 나갔다.
쐐애애애액!
타깃이 된 진 발키리가 흠칫했다.
뭔가 반응을 보이려고도 했지만, 이미 늦었다.
웬만해서는 눈으로 좇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로 날아간 바람의 창이 순식간에 진 발키리를 지나쳤다.
퍼어어어억!
진 발키리를 지나치고도 한참이나 날아간 바람의 창이 내 손짓에 다소 억지스러운 궤도로 U턴을 하며 허공에 멈춰 섰다.
“끄으으윽….”
바람의 창에 당한 진 발키리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경직된 몸은 부들부들 잔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경악으로 물든 표정도 그랬지만, 명치 부근에 뚫린 주먹만 한 구멍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툭….
풀썩….
부들부들 떨던 진 발키리의 몸이 앞으로 기울다가 완전히 엎어졌다.
지면에 닿는 순간, 유리병이 깨지듯 산산조각이 나며 파란색 연기로 기화해 버렸다.
자신의 동료가 당하는 것을 똑똑히 본 다른 진 발키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키리!”
“키이이이….”
앞서 상대하던 오식이나 린은 이미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나를 향해 몸을 틀고 움직였다.
상대하던 적을 눈앞이나 곁에 두고서 다른 곳에 한눈을 파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짓이었다.
그러나 진 발키리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린은 이미 전투 불능이었고, 오식이 또한 바로 움직이기에는 힘든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와라… 그래, 조금만 더… 꼬치처럼 꿰어 주마!’
하나씩 덤벼드는 것보다는 한데 뭉쳐서 달려드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었다.
위험부담이 몇 배나 클 테지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단축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었다.
다가오는 진 발키리들을 주시하며 타이밍을 쟀다.
‘옳지… 조금만, 조금만 더….’
긴장으로 뒤덮인 순간이었다.
손바닥과 이마에 땀이 맺혔다.
나도 모르게 침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꿀꺽….”
그때였다.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휘이익….
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을 스치고 지나갔다.
시원함… 아니,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청량감이 느껴졌다.
우뚝….
멈칫….
나를 향해 다가오던 진 발키리 다섯이 동시에 제자리에 멈춰 섰다.
이어, 모두 다 고개를 쳐들고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
의아함이 먼저 들었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도 고개를 들어 같은 곳을 쳐다봤다.
‘헐….’
하늘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여전히 시뻘건 색으로 물든 하늘이었다.
하지만, 이전과 다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확히는 시계 방향으로 돌고 있었다.
자세히 봐야 알 수 있을 정도로 느릿했지만, 분명히 그랬다.
스스스스스스….
내가 본 것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알려 주듯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움직임도 확실해져 갔다.
끝내는 화를 내듯 으르렁거리기도 했다.
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궁!
웅장하고 묵직한 하늘의 으르렁거림에 정신이 돌아왔다.
‘헛! 어디에다가 한눈을….’
화들짝 놀라서는 진 발키리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진 발키리들은 여전히 돌아가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든 채로 완전히 넋이 나가 있는 듯했다.
‘기회다!’
천금 같은 기회였다.
이대로라면 못해도 셋 정도는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터였다.
정신을 집중하고 오른손을 움직여 바람의 창을 조종했다.
둥둥….
스으읏….
대기하고 있던 바람의 창이 이내 자세를 정비하며, 언제든 쏜살같이 날아갈 태세를 취했다.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진 발키리를 주시한 채, 손목을 힘껏 비틀었다.
바람의 창이 매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쐐애애애액….
이번에도 타깃이 된 진 발키리가 반응을 보일 틈이 없었다.
그대로 바람의 창이 적중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릴 참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쐐애애액….
푸슉!
엄청난 속도로 날아드는 바람의 창이 진 발키리에게 닿기 직전, 번쩍하는 빛과 함께 사라진 탓이었다.
“에?”
갑작스럽고, 황당한 상황에 놀라 버렸다.
그에, 컨트롤 되지 않은 바람의 창이 그대로 지면에 꽂혀 버렸다.
콰과과과과과….
빠른 속도와 엄청난 파괴력에 녹음으로 물든 지면이 흉측하게 변했다.
뿌연 흙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기도 했다.
“크으!”
영문 모를 뜬금없는 상황과 컨트롤 미스에 의아했고, 자책했다.
재빨리 오른손을 움직였다.
지면을 파고들어 보이지 않던 바람의 창이 풀과 흙더미를 밀어내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다행이란 생각과 함께 아직 가시지 않은 흙먼지 너머로 진 발키리들을 찾았다.
그때였다.
푸슉!
겨우 찾아낸 진 발키리의 실루엣이 다시금 빛으로 번쩍이다가 사라졌다.
이번엔 놀랄 틈도 없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흙먼지 안에서 몇 번의 번쩍임이 더 이어졌다.
‘뭐, 뭐야?’
돌아가는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어리둥절한 채 주위를 돌아봤다.
황당하고, 놀라운 일이 계속되고 있었다.
진 발키리뿐만 아니라, 주위를 메우고 있던 그냥 발키리들도 번쩍이는 빛과 함께 하나둘 사라지고 있었다.
푸슉! 푸슉! 푸슉….
여전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뭐라도 떠올려 보겠다고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이미 내 몸이 한계를 넘어선 탓이었다.
‘어, 어….’
머리가 핑 돌았다.
그대로 몸이 뒤로 넘어갔다.
이제는 거의 회오리나 소용돌이를 연상케 하듯 엄청난 속도와 실로 무시무시한 비주얼을 뽐내고 있는 시뻘건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아, 돈다… 돌아….’
회전하는 시뻘건 하늘을 멍하니 바라봤다.
솔직히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마치, 최면에라도 걸리는 듯한 착각과 함께 정신이 점점 아득해져 왔다.
언제 그렇게 됐는지도 모른 채,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얼마쯤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정신이 돌아왔다.
자연스럽게 깼다기보다는 괴로움에 억지로 깨어난 듯했다.
누군가 나를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어딘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있다 여겼다.
내 사지를 꽁꽁 묶은 채, 입과 코로 물을 들이붓는 그런 물고문 말이다.
몸을 전혀 옴짝달싹할 수 없었고, 코와 입으로 사정없이 들어오는 물줄기에 숨을 쉬기가 힘들었으며, 콧속이 따끔따끔한 통에 진심 죽을 맛이었다.
‘으으… 괴, 괴로워….’
살려 달라거나 괴롭다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저항의 뜻을 말하고 싶었지만, 겨우 꿈틀거리는 게 다였다.
이런 와중에도 나름의 침착함을 발휘했다.
‘여긴 어딜까? 누가 날 괴롭히고 있는 거지?’
답은 바로 나왔다.
어딘가는 발할라고, 누군가는 발키리들이 분명할 듯했다.
이내, ‘그럼, 죽는 건가?’라는 암울한 결과도 떠올랐다.
솔직히 억울하다고 말하기에는 좀 그랬지만, 그래도 억울했다.
이대로 고통받다가 죽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뭐라도 해서 목숨을 연명하는 게 최선이었다.
해서, 그나마 좀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 머리와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어댔다.
주르륵….
조준이 빗나간 물줄기가 또다시 콧속으로 흠뻑 들어왔고, 눈과 이마는 물론 머리까지 적셔댔다.
콧속 끝에서 이는 시큰함을 넘어선 따끔함에 본능적으로 크게 재채기를 했다.
“에에… 에취! 에에취이!”
이어, 목구멍으로 넘어가 고인 듯한 물줄기를 격하게 뱉어 내고, 쏟아 냈다.
“커어억! 컥! 컥! 우에에엑!”
그러자 좀 살 것 같았다.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가에 눈물이 잔뜩 고였고, 얼굴은 이미 만신창이가 됐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조금은 편안해지고, 어떻게든 살았다는 생각에 기뻤다.
“후아… 후아….”
크게 호흡했다.
천국과 지옥… 정신없이 생과 사를 넘나든 내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오빠! 괜찮아요? 사, 살아난 거죠?”
리나였다.
솔직히 처음엔 긴가민가했다.
이미 내가 발할라로 잡혀 와 발키리들에게 고문을 당하고 있다 여기던 터라, 환청을 듣나 싶었다.
겨우겨우 눈을 뜨고, 흐릿한 시야에 리나의 얼굴이 잡힌 뒤에야 내가 큰 착각을 했다는 걸 알았다.
“아아앙… 살아서 다행이에요오, 으아아아앙!”
리나가 내게 와락 안기며 펑펑 울어댔다.
가뜩이나 몸이 욱신거리고,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데, 너무 격하게 안기는 것도 모자라 무게까지 실으니, 더 죽을 맛이었다.
진심,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리나에게 속삭였다.
“야아… 비켜어… 디, 디질 것 같아….”
그래도 리나는 나를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힘주어 나를 안고, 이리저리 흔들어 댔다.
“으으….”
골이 흔들렸다.
욱신거리는 몸이 아팠다.
이내, 걸쭉한 욕설이 목구멍을 치고 나오려 했다.
전혀 참을 생각 없이 시원하게 한바탕 쏟아 내려던 그때, 리나가 슬그머니 내게서 떨어졌다.
까비….
정신을 마저 차리고, 몸도 좀 추슬렀다.
원래 제 몸 먼저 챙기고, 가누는 것이 우선이라지만, 그제야 다른 녀석들의 안위가 떠올랐다.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오식이가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있었다.
축 늘어진 어깨나 푹 숙인 고개가 절로 안쓰러움을 자아내게 할 정도였다.
‘얼마나 다치고, 지쳤으면….’
그렇게나 튼튼한 녀석이 나와 리나의 다소 ‘웃픈’ 소동에도 전혀 관심이나 반응을 보이지 못할 정도라는 건 정말로 상태가 안 좋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었다.
더없이 측은한 눈빛으로 오식이를 쳐다보는데, 리나가 짧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휴우, 아까부터 쟤는 저렇게 앉아서 자고 있어요.”
“….”
어디선가 까마귀 한 마리가….
“흠흠!”
헛기침을 하고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린과 왕울이가 함께 있었다.
왕울이는 평소처럼 배를 깔고 누운 자세가 아니라 옆으로 몸을 눕힌 채, 완전히 널브러져 있었다.
린은 그 옆에 있는 나무에 상체를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쟤들은 어때?”
내 물음에 리나의 얼굴이 잔뜩 어두워졌다.
“린 언니는 괜찮아요. 제게 몇 가지를 알려 주고, 당부하다가 좀 전에 잠들었고요. 왕울이는….”
기절 직전의 일들을 떠올렸다.
최후의 수단으로 궁니르를 꺼내 들기 전부터 다른 녀석들도 그랬지만, 특히나 왕울이의 상태가 심각했었다.
“야, 약은? 회복 물약 먹였어?”
“네… 린 언니가 알려 줬어요. 언니도 마셨고, 왕울이도 먹였어요. 쟤도 그리고 언니가 오빠는 꼭 살려야 한다고 해서, 오빠한테는 두 병이나 먹였어요.”
말을 하며 옆으로 시선을 주는 리나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빈 회복 물약 두 병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지면을 적신 많은 양의 빨간색 액체도 보였다.
갑자기 코끝이 찡해지고, 콧속이 따끔거려 왔다.
“킁킁!”
“…?”
힘들지만,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리나가 바로 일어나 나를 부축했다.
리나의 도움을 받으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린과 왕울이에게 다가갔다.
“흐음….”
린과 왕울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들은 대로 린은 그나마 좀 말짱한 듯싶었다.
하지만, 왕울이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하악… 하악… 크르르… 하악….”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로 거칠게 호흡하는 것이 이대로 두면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가, 가방… 내 가방 어디 있지?”
“가방이요? 저, 저기… 가져올까요?”
“응! 빨리!”
리나가 내 배낭을 가져왔다.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배낭을 열었다.
그것만으로도 힘들었다.
더는 내가 할 수 없어서 리나에게 부탁했다.
“이거… 이것 좀 꺼내 봐.”
리나가 배낭 안에서 노란색 구슬을 꺼냈다.
생기의 미약이었다.
“구슬을 조심스럽게 깨. 그리고 왕울이의 입과 코에 가져다 대.”
“네.”
리나가 생기의 미약을 깼다.
이내, 노란색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것을 왕울이의 주둥이 근처에 가져다 대자, 거친 호흡으로 인해 순식간에 빨려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