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237)
못해도 여섯 부대… 얼추 잡아 서른이 넘을 발키리들이 모여 있었다.
무리의 선봉에 선 화려한 차림의 진 발키리 여섯을 보고 추측한 수였다.
‘사, 산을 넘은 것인가?’
이대로 쭉 전진하면, 던전 마을에서 발할라로 가기 위한 일반 루트가 나온다.
산과 계곡이 있는 길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넘었던 두 개의 험난한 산과 골렘의 계곡을 그들도 넘은 듯했다.
시작은 다소 여유를 부렸고, 신호를 보고 나서는 제법 서둘렀지만, 며칠이나 걸렸던 길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근 하루 만에 넘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나를 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발키리들이 동원된 것일까?
나 하나를 잡기 위해 그들은 얼마나 개고생을 한 것인가?
뭔가 중요한 인물이 되어 대우(?)를 받은 기분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어쭙잖은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다들 튈 준비해.”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곁에 서 있는 리나를 봉인했다.
‘봉인!’
여기까지 오는 동안의 여정이 힘들어서였을까?
아니면, 수적으로 너무나 우세한 그들의 여유였을까?
빛으로 물든 봉인의 과정을 그대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우리로서는 정말로 다행인 일이었다.
‘한 번 더?’
리나의 봉인을 마치고, 오식이나 린 중의 하나를 더 봉인할까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듯해 생각을 고쳐먹었다.
“왕울, 준비됐지?”
“크륵!”
왕울이의 반응을 확인하고는 작게 카운트를 헤아렸다.
“하나, 두울, 세엣!”
셋과 동시에 왕울이의 등에 올라탔다.
녀석이 곧장 몸을 반 바퀴 돌리고는 지면을 박찼다.
린과 오식이도 동시에 뒤로 돌아 뛰었다.
고개를 돌려 오식이를 바라본 채, 봉인 스킬을 사용했다.
‘봉인!’
오식이의 거대한 몸뚱이가 작은 빛과 함께 사라졌다.
녀석의 덩치에 가려져 있던 시야가 뻥 뚫리면서 폭풍우처럼 우리를 향해 우르르 달려드는 발키리의 무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젠장! 린, 봉인!”
린도 곧 빛과 함께 모습을 감췄다.
이제는 최고 속도로 달려도 될 터였다.
“왕울! 뛰어!”
“크르륵!”
순식간에 기어를 바꾼 왕울이가 허공을 날 듯이 몇 미터씩이나 점프하며 힘껏 내달렸다.
얼굴로 쏟아지는 날카로운 바람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주변 나무들의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이마와 볼을 스치며 따끔한 생채기를 만들어 냈지만, 그마저도 신경 쓸 수 없었다.
쉬익! 쉬이익!
귀 끝을 스치는 바람 소리 너머로 우리를 쫓는 발키리들의 발걸음 소리도 들려왔다.
분명, 발로 뛰는 것일 터인데, 어째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것인지….
두두두두두둣!
“조, 조금만 더 힘내!”
왕울이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조금이 아닐 듯했다.
발키리들은 끝까지 우리를 쫓을 테니까.
‘아, 어쩌지?’
쉽게 거리가 벌어지지 않았다.
아니, 곧 잡힐 것 같이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왕울이도 지쳐 가고 있었다.
결단을 내려야 할 타이밍이었다.
이대로 도망치다가 지쳐서 잡혀 죽느냐, 아니면 용감하게 맞서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느냐였다.
“젠장, 탓할 것도 없지….”
어느 모로 봐도 처참할 것 같은 결과에 한 치의 남 탓도 할 수가 없었다.
모두 내가 저지른 일에서 비롯된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저, 뭣도 모른 채 목숨을 잃은 이들과 나를 따르다가 희생되어야 할 녀석들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후우우….”
굳은 결심의 종지부를 찍듯 긴 한숨을 내쉬고는 왕울이에게 말했다.
“왕울아, 멈춰!”
“크륵?”
“싸운다. 맞서서 싸우다가… 그냥, 싸운다!”
비극적인 결말을 말하려다가 끝에 가서 말을 바꿨다.
그래도 일말의 희망쯤은 남겨 둬야 할 것 같았다.
아니, 뻔한 결말을 말하기가 차마 두려웠다.
처억….
왕울이가 멈춰 섰다.
두두두둣….
우리의 뒤를 따르던 발키리들도 거리를 두고서는 멈춰 섰다.
멈춘 발소리를 듣고는 왕울이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다소 경직된 몸을 억지로 돌려세웠다.
뿌연 모래 먼지가 한가득 일어 있었다.
“췟! 분위기 죽이는구만….”
비장함도 일고, 꽤 멋진 연출이란 생각이 들었다.
“소환!”
녀석들을 차례대로 불러냈다.
오식이, 린, 리나 순이었다.
리나는 불러내지 않을까 했지만, 어차피 우리는 한 팀이고, 동료이기에 마지막도 같이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소환했다.
딱히 설명을 하지 않아도 돌아가는 분위기나 상황에 다들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오식이의 얼굴에도 비장함이 그려져 있었고, 린도 말없이 빗자루를 꺼내 들며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동안 즐거웠다.”
나도 모르게 끝인사를 하고 말았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은 상황에 입맛이 씁쓸해지려 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린이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앞으로도 즐거워야죠, 주인님!”
오식이도 한마디 거들었다.
“빨리 끝내고, 맛있는 거 먹자, 형님!”
피식하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등에 메고 있던 엘프의 활을 꺼내 들며 말했다.
“그래, 얼른 끝내고 배 터지게 먹자!”
내 말의 끝을 시작의 신호로 삼고, 녀석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제일 앞서 나간 것은 오식이였다.
쿵쿵쿵!
일부러 더 크게 발을 구르며 앞으로 뛰어나간 녀석이 수많은 발키리들을 향해 힘차고 거센 포효를 발사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우렁참이 천지를 뒤흔드는 수준이었다.
적들의 기세를 꺾어 놓는 효과를 가진 스킬인 탓이었다.
녀석의 포효 스킬이 발키리들에게 먹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것을 따지기 전에 화살부터 장전했다.
끼기긱….
힘껏 활시위를 당겼다.
딱히 조준도 하지 않고, 그대로 화살을 날렸다.
티잉! 팅!
쐐애애액! 쐐애액!
두 발의 화살이 빠르게 발키리들을 향해 날아갔다.
멈출 새도 없이 계속해서 화살을 시위에 걸고 무작정 발사했다.
티잉! 팅!
쐐애액! 쐐액!
퍼어어엉!
티잉! 팅!
쐐애애액! 쐐애액!
퍼어엉!
여기저기에서 파탄이 터졌다.
그리 큰 피해는 없는 듯했지만, 발키리들을 혼비백산시키고, 진형을 흐트러뜨리는 데는 나름의 효과를 본 듯했다.
두두두둣!
다다다닷!
슈우욱! 슈욱!
발키리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앞서 있는 오식이를 향해 꽤 많은 수의 발키리들이 몰려들었다.
“크아아아아앙!”
녀석이 거센 포효와 함께 모닝스타를 크게 휘둘렀다.
부우우우우웅!
무식함이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을 입을 것 같았다.
재빠른 발키리들이었기에 제대로 맞추지는 못했다.
하지만, 선두에 서서 꽤 많은 수의 발키리들의 이목을 끌고, 붙잡아 두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하아압!”
“크르륵!”
린과 왕울이가 소수의 인원을 상대로 마음껏 싸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줬다.
“좋아! 잘하고 있어!”
계속해서 파탄을 날려대며 격려의 말을 쏟아 냈다.
진심, 우리는 발키리들과 맞서서 잘 싸우는 중이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얼핏 봐서는 우리 쪽이 승기를 잡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근 열 배에 가까운 수적 열세가 있었다.
겨우 두 팀에게도 밀렸던 전적이 있는데, 단 몇 시간 만에 그보다 많은 여섯 팀을 상대로 우위를 보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저것들이 움직이기 전에 최대한 많이 잡는다.’
‘끝판왕’처럼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상황을 지켜보는 여섯의 진 발키리들이었다.
그녀들이 나서지 않기에 그나마 우리가 대등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당연히 진 발키리들이 나선다면, 전세는 바로 역전이었다.
‘조금만 더… 그래, 조금만 더 가만히 있어 줘라!’
우리에게 조금 더 시간을 달라 빌고 빌며, 진 발키리들을 예의 주시했다.
그렇게 처절한 전투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
끼기긱!
티잉!
쐐애애액!
투카아아앙!
린을 공격하기 위해 허공을 날던 발키리의 이마에 화살이 적중했다.
순간, 발키리들의 진형에서 더없이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젠장!”
나도 모르게 쓴소리를 뱉어 냈다.
언제까지고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라 예상했던 진 발키리들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큰일이었다.
아직 우리가 앞서기에는 너무나 불리했다.
아니, 시간이 지나며 쓰러지는 발키리의 숫자가 늘어나기에 점점 우리가 유리해지리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도 온갖 사력을 다해 싸우는 중이었기에 형세의 기울기는 제자리걸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와중에 쌩쌩하고, 강한 진 발키리 여섯의 난입은 정말이지 지옥의 문이 열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샤샤샷! 샤샷!
스스슷! 스스스슷!
잔상이 인다고 여길 착각까지 불러일으키는 진 발키리들의 빠르고, 현란한 움직임에 눈이 어지러웠다.
그녀들이 대놓고 뿜는 기세와 기운 또한 장난이 아니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상태.
여전히 가장 선두에 서 있는 오식이가 타깃이 되어 위험한 순간을 맞이했다.
파아아앗!
파앗! 파아앗!
진 발키리 셋이 동시에 움직였다.
하나는 위로, 나머지는 양옆으로 방향을 틀었다.
오식이의 머리와 시선이 바쁘게 움직였다.
셋 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드는 통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막아!”
크게 소리쳤다.
뒤로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타이밍도 녹록지 않았다.
어떻게든 공격을 막아내고, 뒷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게 내가 떠올린 최선이자, 최고의 방법이었다.
“크르르르!”
진하게 으르렁거린 오식이가 모닝스타를 든 양팔을 ‘X’자로 교차하며 얼굴을 막아섰다.
다리는 땅에 단단히 고정한 기마 자세를 취했다.
녀석의 최대 방어 스킬인 ‘웅크리기’였다.
‘그래, 저거라면!’
귀염둥이 시절이긴 하지만, 왕울이의 최대 필살기인 ‘핏빛 달의 분노’나 저주받는 저택 던전의 주인인 리차드의 돈 자루 공격, 게다가 강철 말의 강력한 몸통 박치기도 견뎌 낸 스킬이었다.
상대의 수준이나 버티고, 받아내야 할 공격의 결이 좀 다르긴 했지만, 그래도 믿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투카아아앙!
까아아앙!
까아앙!
거의 동시라고 봐도 좋을 연속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무지막지한 공격을 해댄 세 명의 진 발키리들이 하나같이 충격에 뒤로 물러났다.
반면, 오식이는 그 자리에 그 자세 그대로 버티고 있었다.
“나, 나이스!”
웅크리기 스킬이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음에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꺄아악!”
난데없이 들려온 린의 비명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였는지 두 명의 진 발키리들과 싸우던 중, 어깨에 큰 상처를 입은 린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리, 린!”
다급하게 린의 이름을 부른 순간.
“깨애애앵!”
반대편에서 왕울이의 처참한 비명도 터져 나왔다.
녀석은 이미 온몸에 피를 흠뻑 적신 채로 쓰러져 있었다.
“이, 이런….”
어느 쪽을 먼저 신경 써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정할 수 없는 고민에 하나의 선택지가 더 추가됐다.
까아앙!
까앙! 까앙!
공격이 막힌 세 명의 진 발키리가 오식이의 웅크리기를 깨 버리겠다는 듯이 마구잡이로 검을 내리치고 있었다.
얼핏 보기로는 별 이상이 없는 듯했지만, 자세히 보면 지면을 딛고 있는 녀석의 발이 조금씩 밀리는 게 보였고, 굳건하다 여겨지는 어깨와 등짝도 점점 들썩이거나 움찔거리는 중이었다.
이대로면 몇 차례의 공격에 웅크리기 스킬이 깨질 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결과는 처참함의 수준을 넘길 것도 뻔한 일이었다.
‘아, 안 돼!’
최후의 수단을 써야 할 듯싶었다.
시작도 전에 이미 제 컨디션은 아니었다.
크게 무리가 없는 더블샷과 파탄만을 사용한 상태였지만, 어쨌든 간에 체력은 소모된다.
이런 상태에서 최후의 수단인 궁니르를 사용하는 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되든 안 되든 시도는 해 봐야 했다.
아니, 당장에 정신을 잃고 기절한다고 해도 반드시 궁니르를 꺼내 일말의 기회라도 마련해야만 했다.
꾸우욱!
양 주먹을 힘껏 말아 쥐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제발!’이라는 절실한 기도와 함께 궁니르를 시전했다.
“궁니르!”
푸하하하하하악!
거센 바람이 발밑에서부터 일며 삽시간에 주변을 휩쓸었다.
발바닥이 지면을 뚫고 들어갈 것처럼 온몸이 무거워지며 푹 가라앉았다.
순간, 전장의 수많은 모든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을 집중했다.
거센 폭풍이 회오리치며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휘리리릭!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는 바람의 창이 완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