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223)
꿈이 아니었다.
우리는 정말 피라미드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것도 마을… 발할라의 구역을 벗어난 곳이었다.
린과의 대화를 통해 사정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대로 내가 쓰러지더란 말이지?”
“네, 바닥에 부딪혔을 때, 소리도 엄청 컸어요.”
피라미드 안에서 갑자기 머리가 핑 돈 이후에 그대로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흔들어 깨워봤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음….”
“그때, 발키리 씨가 빨리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고 했어요.”
“…?”
“날이 밝으면 석실의 문이 닫힌다고 했거든요.”
린의 말에 한쪽에 떨어져 있는 소녀를 돌아봤다.
소녀는 우리의 대화를 얌전히 듣던 중에 내가 돌아보자, 황급히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웠다.
곧장 소녀를 불렀다.
“이리 와 봐.”
살짝 머뭇거리던 소녀가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소리지? 날이 밝으면 석실의 문이 닫혀?”
“네, 동이 트면 석실의 문이 알아서 닫히고, 해가 저물면 다시 문이 열립니다.”
“저 혼자서? 자동으로?”
“네.”
피라미드의 최상층 석실이었다.
특별하다면 특별한 방식으로 열어야 할 만큼 중요한 것들이 숨겨져 있기도 했다.
나름의 보안 장치가 하나 더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린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서, 그다음엔?”
“쓰러진 주인님을 모시고,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왔어요. 그 뒤에는 발키리 씨만 아는 비밀 통로로 빠져나왔고요.”
“비밀 통로?”
반문하며 다시 소녀를 쳐다봤다.
소녀는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반응했다.
그에, 입가에 미소를 그리고는 다독이듯 물었다.
“괜찮아, 얘기해 봐. 너만 아는 비밀 통로가 있어?”
이번에도 살짝 뜸을 들이던 소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만 아는 건 아니고요. 그렇다고 제가 만든 것도 아니고요….”
제법 긴 변명과 발뺌 후에 본론이 이어졌다.
요약하자면, 어떤 누군가가 무슨 이유로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발할라의 어느 건물 지하부터 피라미드 아래로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땅굴을 파 놨단다.
무척이나 허름하고,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곳을 통해서라면 보초에게 걸리지 않고 몰래 피라미드로 진입할 수 있었다.
또한, 1층부터 최상층 바로 아래까지는 또 다른 비밀 통로… 듣자 하니, 더도 덜도 아닌 딱 엘리베이터 같은 것을 타고서 단숨에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다고 했다.
“헐… 그런 것도 있었어?”
피라미드의 최상층에 오르기까지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챙겨 갈 만한 것들이 있을까 싶어 샅샅이 뒤지느라 그러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허탕을 쳤었다.
만약, 다른 곳들은 죄다 꽝인 것을 미리 알고, 엘리베이터까지 있다는 걸 알았다면, 괜한 시간 낭비도 없었을 것이고, 훨씬 더 편안하게 일을 보지 않았을까 싶었다.
‘뭐,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네.’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정보들이었다.
흡족함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녀를 향해 물었다.
“해가 지면 다시 석실이 열린다고 했지?”
“네.”
“땅굴을 지나는 데는 얼마나 걸리지? 오래 걸리나?”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 아니, 최대한의 안전을 위해서 자정에 가까운 밤이 되면, 다시 피라미드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목적지는 당연히 피라미드의 최상층.
목표물은 남은 아홉 개의 금속판과 네 개의 붉은빛 구였다.
‘금속판은 아니더라도 붉은빛의 구는 모두 다 챙겨 와야지, 흐흐!’
아직 뭐에 쓰는지 모를 금속판은 그렇다 치더라도 붉은빛의 구는 무조건 다시 가서 챙겨야 할 것들이었다.
이유야 뭐,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겠지?
‘다른 것들도 굉장한 것들이겠지?’
분명히 그럴 것 같았다.
생각만으로도 미소가 절로 그려지고,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애초의 계획은 피라미드를 빠져나오기 전에 그것들을 모두 챙겨 나오는 것이었다.
개고생을 해 가며 겨우 들어왔는데, 똑같은 짓을 되풀이하고 싶은 마음은 죽어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영문도 모른 채 갑작스럽게 쓰러지고, 정신을 잃은 뒤 깨어나 보니 피라미드 밖이었다.
나름의 계획이 강제로 물거품이 되어 있었다는 얘기다.
사실, 그 때문에 고민을 했었다.
다시 피라미드 최상층의 석실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분명, 처음보다는 쉽고, 시간도 앞당겨지겠지만, 개고생은 필수였다.
그러나 그에 따른 보상은 끝내줄 터.
고민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뜻밖의 횡재 같은 수가 생겼다.
보초들의 눈을 완전히 따돌릴 수 있는 비밀의 땅굴과 힘들이지 않고도 피라미드의 최상층까지 오를 수 있는 엘리베이터라니….
‘그러면 무조건 콜이지!’
못 먹어도 고!
아니, 먹을 패가 나밖에 없는데, 스톱을 외친다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었다.
혼자서 싱글벙글하며 흐흐 대는 나를 보던 린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다시 들어가시려고요?”
“응? 아아, 응! 가져올 게 있거든.”
싱글벙글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그런 내 기분을 다운시키는… 어째 불길한 느낌의 1차 태클이 들어왔다.
“혹시, 땅굴을 이용할 생각이세요?”
“당연하지. 또다시 그런 짓을 하기는 좀 그렇잖아?”
“아아….”
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고개를 갸웃하며 바로 물었다.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게… 이제 땅굴은 들어갈 수가 없어요.”
“엥? 왜? 어째서?”
“무너져 버렸거든요.”
“헉!”
청천벽력과도 같은 린의 말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런 내 기분을 알아챘는지, 린이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묻지도 않은 궁금증을 풀어 줬다.
“아까, 발키리 씨가 그랬잖아요. 땅굴이 무척이나 허름하고, 위험하다고요. 그게 진짜로 그랬거든요. 저나 발키리 씨는 그래도 괜찮은데, 주인님은 지나가기가 살짝 버거울 정도로요.”
“….”
“그런 곳을 기절한 주인님을 모신 채 빠져나오기란… 게다가 왕울 씨랑 오식 씨도 있고….”
“그,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오식 씨랑 왕울 씨가 힘을 합쳐 땅굴을 넓히면서 나왔어요. 그러다가 뒤쪽부터 무너지기 시작했고요.”
“헐….”
진심, 땅굴이… 아니,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짙은 망연자실함에 빠져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고, 반응도 보일 수가 없었다.
그저, 저 먼 곳의 어딘가를 멍하게 보고 있어야만 했다.
‘아니야,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지!’
어차피 땅굴 따위는 계획에 있지도 않았다.
그것 때문에 고민의 저울이 한쪽으로 확 기울기는 했지만, 일단 보상을 택하기로 한 만큼 그쪽 길로 가닥을 잡고서 생각하는 게 옳았다.
‘그래, 아직 우리에겐 엘리베이터가 있으니까!’
요란스러움에 한바탕 난리가 난 터라 똑같은 방법을 쓰지는 않겠지만, 일단 보초들을 따돌리고 피라미드 안까지만 들어가면 될 일이었다.
그 뒤에는 편안하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그것들을 모두 챙긴 뒤에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 된다.
뭐, 다시금 보초들의 눈을 따돌려야겠지만, 그때 가면 상황에 맞는 적절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까?
‘여차하면 아주 그냥 화려한 불꽃 축제를 벌이지 뭐!’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바닥까지 떨어졌던 기분이 빠르게 회복됐다.
그런 내게 예상치 못했던 2차 태클이 날아들었다.
“지금 석실로 들어가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거죠?”
옆에서 나와 린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소녀의 물음이었다.
자연스럽게 나와 린의 시선이 소녀에게로 향했다.
우리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소녀가 입을 다물었다.
역시나 불안하고, 불길한 느낌에 버럭대듯 소녀를 재촉했다.
“아, 뭔데? 빨리 말해!”
소녀가 놀라서는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눈까지 질끈 감았다.
그 상태에서 빠르게 말했다.
“오, 오늘부터는 절대로 피라미드에 들어갈 수 없어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오늘부터는 피라미드에 들어갈 수 없다니….
그것도 절대로라고?
“아니, 왜? 어째서? 빨리빨리! 빨리 말해 봐!”
미친 듯이 소녀를 다그쳤다.
린이 내 팔을 잡으며 말리기까지 했다.
질끈 감았던 눈은 떴지만, 더욱더 몸과 어깨를 움츠러뜨린 소녀가 죄라도 지은 것처럼 답했다.
“오늘부터 축제가 시작됩니다. 축제가 시작되면 피라미드의 경비가 더욱더 삼엄해져요. 외부인도 많이 오고, 내일 있을 중요한 행사에 쓰일 것들이 그곳에 있으니까요. 그래서….”
더 듣지 않아도 대충 알 것 같았다.
무너졌다가 다시 솟아오르던 기분, 마음, 희망, 하늘 등이 또다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다시는 재건할 수 없을 만큼 폭삭, 완전히, 완벽히 말이다.
그런 내 상태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소녀가 쐐기를 박듯 말을 끝까지 마무리 지었다.
“오늘부터는 오딘 님을 모시는 발키리 부대가 피라미드 곳곳에 배치가 됩니다. 무턱대고 들어갔다가는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거에요.”
마지막 불씨… 아니, 불씨조차 남지 않은 잿더미에 물까지 부어 깔끔하게 정리해 버린 소녀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
부푼 기대와 꿈이 한순간에 모두 물거품으로 변해 버린 탓에 아무런 의욕도 일지 않았다.
어떻게 숙소로 돌아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다.
잠을 잔다거나 쉬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저 멍한 상태로 있을 뿐이었다.
“형님….”
평소에도 이런 내 기분 따위는 개나 줘 버리라는 듯, 오로지 본능에 충실한 오식이 녀석이 배가 고프다며 징징거렸지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기도 싫었다.
“린, 네가 좀 알아서 해.”
린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고는 계속 망연자실의 세계에서 헤맸다.
“쉬잇….”
린의 지시하에 다들 조심하고, 조용히 움직였다.
그래도 간간이 들려오는 소리에 상황은 대충 파악이 됐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렴 어떠냐였다.
“우리 먼저 씻을까요?”
린과 소녀가 먼저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고 나온 린이 나를 한참이나 주시했다.
침대에 엎어져 있었고, 눈도 같은 터라 보이지는 않았지만, 시선과 감정 등을 느낄 수는 있었다.
아마도 씻으라고 하려던 모양인데, 내 상태와 눈치를 보다가는 끝내 돌아섰다.
“오식 씨랑 왕울 씨도 얼른 씻어요.”
오식이랑 왕울이를 욕실로 몰아넣은 린이 소녀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저는 먹을 것 좀 사 올 테니까, 주인님 좀 잘 살피고 계세요. 오식 씨랑 왕울 씨가 나오면 말썽을 부리거나 사고 치지 못하게 해 주시고요. 금방 다녀올게요.”
그렇게 린이 밖으로 나갔다.
린이 나간 것을 알기라도 하듯 이내 욕실 안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린의 당부를 전달받았지만, 처음이고 어색한 탓에 소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눈치였다.
‘끄응….’
오식이와 왕울이의 우당탕하는 짓거리보다 소녀의 안절부절못하는 서성거림이 더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기분이 뭐 같기에 어떻게든 무시하려 했지만, 한 번 필을 받으니 점차 커져만 갔다.
끝내는 소녀를 향해 한 소리를 날리고 말았다.
“야! 그냥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어!”
“네? 아, 네….”
소녀가 황급히 자리에 앉았다.
서성거리지 말고 의자나 소파에 앉아 있으란 뜻이었는데, 소녀는 그냥 그 자리… 맨바닥에 앉아 버렸다.
그에,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우….”
나도 모르게 계속 신경을 쓴 탓에 망연자실의 세계에서도 완전히 빠져나와 있었다.
한 번 더 긴 한숨을 뱉어 내고는 몸을 돌려 똑바로 누웠다.
내 행동에 소녀가 바짝 긴장을 했는지, 허리를 쭉 펴고는 앉은 자세를 고쳤다.
그런 소녀의 행동이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피식해 버렸다.
우당탕탕….
욕실에서 또다시 녀석들이 소란을 피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우며 사자후를 날렸다.
“이 자식들아! 얌전히 못 씻어?”
쩌렁쩌렁한 울림에 녀석들이 얌전해졌다.
소녀는 더욱더 긴장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런 소녀를 향해 말을 걸었다.
“야, 너! 이리 좀 와 봐!”
널찍한 침대의 비어 있는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