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222)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소녀와 함께 있는 것이 짜증 났고, 머릿속에는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일단 나가자, 그 뒤는… 뭐 어찌 되겠지!’
어차피 말도 통하지 않는 거 그냥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야, 너! 고개 들어 봐!”
소녀가 움찔하더니 한참이나 뜸을 들이며 고개를 들었다.
속이 터지려는 걸 꾹 참고서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아까 했던 말 다시 해 봐.”
“네? 아, 주, 죽여주….”
“아, 그거 말고! 이 바보 멍충아!”
살짝이 터진 흥분에 목소리가 커졌다.
심호흡을 하고는 조금은 차분하게 다시 말했다.
“그 전에 했던 말… 뭐, 밤낮이 어쩌고 했던 거 있잖아.”
내 말에 소녀는 곧장 자신이 했던 말을 상기하려 눈동자를 위로 붙인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다시 나를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직, 오딘 님만을 섬기고 따르겠다는 마음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련에 정진했다는 얘기 말인가요?”
“어, 그래. 그거!”
뭔가 좀 달라진 느낌이기는 했지만, 뜻은 같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 반응을 살핀 소녀가 그게 어쨌다는 것이냐는 눈빛을 내비치며 내 입술을 쳐다봤다.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켜고는 소녀의 바람에 응해 줬다.
“그러면 이제부터 날 믿고, 따라와!”
“네?”
“그게 꿈이었다며? 그 꿈 들어주겠다고, 내가!”
내 말에 소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당황한 것인지 헷갈렸다.
해서, 바로 물어봤다.
“뭔데?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소녀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답답함에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설명을 하려 폼을 잡았다.
하지만,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아니야, 해 봤자 내 입만 아플 거야.’
고개를 한 번 가로저은 뒤, 강요를 담아 말했다.
“야, 됐고. 그냥 내 부하가 되도록 해! 오케이?”
대답 대신에 잠시 멍을 때린 소녀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딘 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이제는 됐다 싶었다.
서약이 체결됐다는 신비한 목소리를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신비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괜히 허공을 째려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잘못됐나 본데? 아, 이름!’
소녀가 대답할 때 오딘의 이름을 넣었다.
그건 내가 아니니, 제대로 서약이 되지 않은 것이라 여겼다.
“야야, 다시 다시!”
“…?”
“음… 일단, 오딘이란 이름 대신에 선우라고 바꿔 봐.”
“네? 서, 선우요?”
낯선 이름에 소녀가 의아해했다.
뭔가 그럴싸한 변명이 필요했다.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게 그러니까… 아, 그래! 오딘은 그냥 좀 남들한테 강해 보이려고 쓰는 별명 같은 거고, 내 진짜 이름은 선우야.”
“아….”
조잡한 거짓말에 소녀가 속은 듯했다.
물꼬가 트이니 다음 거짓말은 술술 나왔다.
“너는 아직 모르겠지만, 시험을 치른 발키리들은 다 알아. 그래야 서약을 하든 말든 할 테니까.”
“아아, 그렇군요.”
소녀가 내 거짓말을 완전히 믿어 버렸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는 다시 말해 보라며 재촉했다.
고개를 끄덕인 소녀가 무릎 꿇은 자세를 고쳐 앉고는 제법 진지한 투를 뽐내며 말했다.
“영예로운 발키리의 이름을 걸고, 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선우 님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소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신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상(견습 발키리)과의 ‘서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대상(견습 발키리)이 당신의 카드에 봉인됩니다.]
“됐다! 만세!”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발키리의 카드를 보며 만세를 외쳤다.
이내 붉은색의 공간이 부풀어 올랐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이어진 짓눌림을 견뎌 냈다.
강렬한 짓눌림의 압박 속에서도 이전에 없던 행복함을 느꼈다.
….
교감의 상태를 빠져나와 현실 세계에서 눈을 떴다.
“주, 주인님!”
린이 걱정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오식이도 그렇고, 왕울이도 비슷한 눈빛과 표정이었다.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며 괜찮음을 어필했다.
“아, 괜찮아.”
“괜찮은 거 맞으세요? 눈이랑 목이….”
“아, 이거… 일이 좀 있었어. 하하!”
멋쩍게 웃으며 괜찮음을 다시금 어필했다.
린의 눈빛은 반신반의하는 듯했다.
한 번 더 안심을 시켜 줘야 할듯했다.
“진짜야,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회복 물약도 마셨어.”
“네… 그나저나 서약은 잘 맺으신 거죠?”
“당연하지!”
살짝 오버하며 말했다.
주먹까지 들어 보였다.
린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저게 우리의 새로운 동료인가요?”
“응?”
린의 말에 곧장 의아함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로 서약을 맺은 발키리는 아직 카드 속에 봉인된 상태였다.
소환도 하지 않았는데, 볼 수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예의 바른 린이 사람한테… 누가 봐도 소녀인 발키리한테 ‘저거’라는 표현을 쓸 리가 없었다.
절로 갸웃해지는 고개를 억지로 틀며 린의 시선이 머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렇게 눈에 들어온 것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토해 내야만 했다.
“헉!”
그곳에는 바람의 창… 궁니르가 떡 하니 허공에 떠 있었다.
“저, 저게 왜….”
궁니르가 왜 그곳에 있는지 의아해하다가 곧장 이유를 알아챘다.
꺼내 놓고, 잘 사용하다가 다시 집어넣지 않았으니까.
더불어 꺼내는 법은 대충 알 것 같은데, 다시 집어넣는 법은 모르고 있었으니까.
‘설마, 이렇게 계속 달고 다녀야 하는 건가?’
크게 나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문제가 될 것도 같아 살짝 걱정이 됐다.
뭐, 일단은 어찌할 방법을 모르니, 그대로 둬야만 했다.
“아, 저건 아니야. 새로운 동료는 따로 있어.”
“아아, 네… 다행이네요.”
“응? 뭐가?”
“아, 아니에요. 그럼, 새로운 분은….”
린이 화제를 돌렸다.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린이 싱긋 웃어 보이고는 재촉하듯 말했다.
“얼른 새로운 분을 소개해 주세요.”
“그래, 잠시만….”
곧장 소녀를 소환했다.
카드 밖으로 나온 소녀가 살짝이 어리둥절하고, 어색함을 드러냈다.
보기에 따라서는 얌전해 보일 수도 있었고, 순진해 보일 수도 있는 모습이었다.
천방지축이던 본모습을 감추는 소녀의 내숭에 ‘아, 얘도 여자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뭐,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이라 그런지 다들 서먹서먹하고, 어색해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서야만 할 듯싶었다.
“자, 이쪽은 우리의 새로운 동료 발키리. 그리 이쪽은….”
먼저 소녀를 소개하고 이어서 다른 녀석들을 차례대로 소개하려던 그때였다.
“…?!”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어어… 왜 이러지?’
내가 왜 이러나 싶은 생각을 하는 와중에는 세상… 주변이 빙글빙글 돌았다.
“주, 주인니이이이임….”
린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 뒤로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입술을 적시고, 입과 목으로 흘러들어오는 물줄기에 어렴풋이 정신을 차렸다.
“으음….”
곧장 다급함과 걱정으로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 주인님, 괜찮으세요? 정신 좀 차려 보세요.”
린의 목소리였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힘겹게 대답했다.
“어, 어… 괘, 괜찮….”
끝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
또다시 정신이 꺼지려고 했다.
본능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물며 가까스로 버텼다.
“이, 이것 좀 더 드셔 보세요. 회복 물약이에요.”
린이 빠르게 말하고는 내 입속으로 회복 물약을 흘려 넣어 줬다.
제대로 먹지 못해 옆으로 질질 흘리고 있음을 인지했다.
하지만, 내 힘이나 뜻대로 그것을 막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이 와중에도 돌아가는 상황이 궁금했다.
그러나 그뿐….
더는 생각할 힘도, 정신을 집중할 수도 없었다.
그냥 그대로… 린이 계속해서 입안으로 흘려 넣어 주는 회복 물약을 간신히 목구멍으로 넘기며 한참이나 꼼짝없이 있어야만 했다.
….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신이 돌아오자, 몸에도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스흐읍… 후우우… 스흐으읍… 후우우우….”
깊게 심호흡을 하며 몸의 구석구석을 하나씩 체크했다.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었음을 스스로 인지하고는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스으윽….
새하얀 구름 몇 조각이 뜬 푸르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맑고, 청명하네….’
가을의 하늘을 떠올렸다.
평온함이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왜 하늘이 보이지?’
하늘이 보일 리 없었다.
우린 피라미드 안에 있었으니까.
보인다면, 돌로 막혀 있는 천장이 보여야 했다.
‘뭐지? 꿈인가? 그렇다면, 아직 난 정신을 못 차린 건가?’
연이은 의문에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고 보니, 양쪽 눈이 전부 떠지고 있었다.
그에,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 확신했다.
“주인님, 이제 좀 괜찮으세요?”
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인 것을 인지한 터라 편안하게 대답했다.
“어, 괜찮아. 기분도 좋고.”
“아아, 다행이에요. 저는 주인님이 진짜 어떻게 되시는 줄 알고… 흑흑!”
린이 울었다.
꿈이지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도 정신을 못 차리는 날 보면서 걱정하고, 슬퍼하려나?
그렇다면 빨리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야 하는 거 아닌가?
아아, 어떻게 깨어나야 하지?
볼이라도 꼬집으면 깨어나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연이어서 하던 그때였다.
뚝! 뚝!
손등으로 떨어지는 뜨거운 물방울의 느낌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
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지금 꿈속에 있었다.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없다는 소리다.
하지만, 여전히 그 느낌이 남아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말이 안 된다고 여기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흐느끼고 있는 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자연스럽게 린이 내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헐….’
분명 느껴지지 않아야 할 느낌이었다.
그런데 너무나 또렷하게 느껴졌다.
따스함과 부드러움은 물론, 흐느끼는 린의 떨림까지 모두 다 말이다.
‘뭐, 뭐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얼떨떨한 투로 린에게 물었다.
“리, 린… 지금 나 꿈을 꾸고 있는 거 맞지?”
내 물음에 흐느끼던 린이 나를 쳐다봤다.
이미 촉촉하게 젖을 대로 젖은 눈빛이 크게 일렁거렸다.
이내 가득 차오른 일렁임이 아래로 쭉 하고 떨어져 내렸다.
린의 손을 잡고 있던 내 손등으로 뜨거운 흐름이 전해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아, 꿈이 아니구나….’
잠시 멍해짐을 느끼다가는 벌떡 하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다급하게 린을 향해 물었다.
“어, 어찌 된 거야? 우리가 왜 이곳에… 우린 분명히 피라미드 안에….”
내 갑작스러운 반응과 행동 그리고 질문에 깜짝 놀란 듯한 린의 너머로 다른 녀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같이 흙투성이가 된 모습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린도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깔끔함의 대명사이자, 선천적으로 결벽증을 타고난 평소의 린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볼 수도 있을 수도 없는 모습이었다.
“역시, 꿈인가?”
다시금 헷갈렸다.
이런 상황을 확인하는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휘익!
쫘아아악!
X바….
겁나 아프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눈물이 핑 돌았다.
“주, 주인님….”
놀란 반응의 린을 향해 완전히 돌아가 버린 턱과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어어, 이제 정말 괜찮아. 완전히 정신 차렸어.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