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221)
정확했다.
빠르게 점멸하던 붉은색 점이 사라지며,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뜻 모를 단어.
곧장 소녀의 내리꽂기가 작렬하려던 순간, 내가 조용히 흘려 냈던 단어.
그것이 바로 ‘궁니르’였다.
‘흠….’
여전히 나는 이 단어의 뜻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소녀는 아는 듯했다.
아마도 지금 내 주위를 호위하듯 둥둥 떠다니는 저 바람의 창을 보고 하는 말이겠지?
정확한 확인이 필요했다.
이제는 바람의 창이 아닌 나를 보며,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녀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너 이것의 이름ㅇ….”
이름을 아느냐는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녀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오, 오딘 님!”
그러고는 갑자기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털썩!
당황했다.
얘가 또 왜 이러나 싶었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소녀는 제 이마가 바닥에 닿든 말든 납작 엎드리고서 다시금 소리를 질렀다.
“주, 죽여주십시오!”
소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해졌다.
멀뚱멀뚱한 눈과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만 봐야 했다.
소녀는 고개도 쳐들지 못하고서 벌벌 떨고 있었다.
진짜로 겁에 질린 듯했다.
‘뭐야? 왜 갑자기 쫄고 그래?’
고개를 갸웃하고는 입을 열었다.
“저기….”
“예, 오딘 님! 말씀하십시오. 무엇이든 받들겠나이다.”
원래는 왜 그러는지 대놓고 물으려 했다.
그런데 자꾸만 나보고 오딘이라고 하는 것이 이상하고, 못마땅했다.
해서, 나도 모르게 툭 하니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나 오딘 아닌데?”
그러자 소녀가 더욱더 몸을 바닥에 납작 붙이며 소리쳤다.
“주, 죽여주십시오. 오, 오딘 님을 몰라본 죄, 죽어 마땅합니다.”
“거 참, 아니라니까?”
짜증을 내듯 아니라고 또 한 번 말했다.
그에, 소녀가 살짝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한 2초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바닥에 처박은 채, 더욱더 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를… 소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엥? 무슨 시험?”
“소녀는 알고 있사옵니다. 오딘 님의 그 눈… 만물의 근원과 지식을 꿰뚫어 보기 위해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본다고 익히 들어왔습니다.”
소녀의 제법 장황한 투의 말에 나도 모르게 감겨 있는 왼쪽 눈을 손으로 매만졌다.
만물의 근원이니 지식은 모르겠고, 저랑 싸우다가 목검의 파편이 튀어 이렇게 된 것을 기억 못하는 게 우습기만 했다.
속으로는 ‘이게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하는 마음도 살짝 들었다.
뭐, 그러기에는 너무나 진지하고, 진심 같은지라… 만약, 이게 농담이고, 장난질이라면 소녀는 이곳에 있을 게 아니라 카메라 앞이나 스크린 너머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소녀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오딘 님께서 불러내신 저 창… 오직 주인의 명만을 따른다는 전설의 창 궁니르가 그 명백한 증거입니다. 오딘 님의 명에 저리 움직이고, 따르는데 어찌 아니라 하십니까?”
“흠….”
창의 이름이 궁니르라는 걸 확인했다.
단호하고, 확신하는 말투가 무조건 믿어야 할듯했다.
그에,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알고 있는 게 확실하군.”
바람의 창을 알아보고, 이름까지 알고 있는 소녀의 말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흘려 낸 혼잣말이었다.
앞에 ‘정확히’라는 수식어를 붙이면 조금 더 그런 뜻이나 의미로 들리려나?
어쨌든.
그저, 그런 의미였을 뿐… 듣기에 따라 다르게 들릴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진짜로 소녀가 오해를 하고, 내 뜻과는 다른 방향으로 해석을 한 모양이었다.
“어린 시절… 먼발치라 오딘 님을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궁니르의 놀라운 창술 시연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똑똑히 남아 있기에 궁니르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약간의 오해가 있는 듯했지만, 바람의 창이 궁니르라는 것이 더욱더 확실해졌다.
눈앞에서 직접 겪은 일이나 소녀의 설명으로 상당히 괜찮은… 아니, 엄청나게 좋은 걸 얻었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 붉은빛의 구였겠지?’
석실의 사각기둥 위에 진열되어 있던 다섯 개의 붉은빛 구.
그중 하나가 달려들어 내 가슴을 꿰뚫었다.
정신을 잃고, 얼마 뒤 깨어났지만, 가슴에는 이렇다 할 상처가 없었다.
붉은빛의 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는데 말이다.
소녀의 공격을 받기 직전, 빠르게 점멸하다 사라진 붉은색 점도 아마 붉은빛의 구였지 싶었다.
내 몸속으로 들어온 붉은빛의 구가 그 순간에 점으로 점멸하며 발동했고,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 여겨졌다.
뭐, 정확한 건 하나도 없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그렇기에 그냥 그런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었다.
그 외에는 딱히 이유가 없기도 했고 말이다.
어쨌든.
그 사이, 소녀는 잠시 숨을 고르는 듯 얌전히 있었다.
어쩌면 내 말이나 행동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떻게 오해를 풀어야 한다?’
분명히 나는 오딘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데 소녀는 믿지를 않았다.
우선적으로 오해부터 풀어야 할 듯싶었다.
‘뭐라고 하면 믿어 주려나?’
딱히 떠오르는 방법은 없었다.
계속해서 고민을 하는데, 딴생각만 났다.
그러다가 짜증까지 났다.
‘하, 생각해 보니까, 열 받네….’
한참 전에 말해서 기억할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첫사랑이자 꿈에 그리기를 마다하지 않던 발키리를 보기 위해 이곳에 왔다.
해서, 발키리에 대한 정보는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발키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인 오딘에 관해서는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았다.
전투의 여신이자 전쟁의 처녀라 불리는 아리따운 발키리들을 제 밑에 두고서 마음껏 부리는 ‘색마 스타일’의 늙은이 정도랄까?
‘그러고 보니, 한쪽 눈에 안대를 차고 있다는 건 들어 본 것 같네.’
다시금 감겨 있는 왼쪽 눈을 매만졌다.
정말로 단순하고, 어이가 없는 부분이었다.
이따위 것을 가지고 사람을 착각하다니 말이다.
게다가 이건 소녀와 싸우다가 생긴 상처였다.
그 전에는 멀쩡하게 두 눈을 뜨고 있었다.
억울한 감이 있기에 몇 번이나 말하지만, 저랑 싸우다가 이렇게 된 걸 도대체 왜 떠올리지 못하고 딴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뭐, 그 뒤에 증거라고 말한 궁니르에 대해서는 나도 딱히 변명거리를 찾기가 힘들었다.
어릴 때의 기억이지만, 너무나 확신하고, 정확히 알아보기까진 한 궁니르를 내가 직접 소환한 뒤, 멋지게 조종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는 충분히 오해도 하고, 착각도 할 수 있었다.
해서, 나름으로 이해를 하기는 개뿔!
‘아니, 그래도 그렇지!’
다시 말하지만, 내가 아는 오딘은 다 늙어 버린 노인네다.
반면, 나는 아직 서른 살도 되지 않은 팔팔하게 젊은 모습이다.
그런 나를 보고서 그따위 늙은이랑 착각한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될 소리인가.
“아오, 열 받아!”
나도 모르게 분노를 토해 냈다.
그에, 여전히 납작 엎드려 있던 소녀의 등이 움찔했다.
어색함이 가득한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그러더니만, 소녀가 어떤 비장함 같은 걸 풍기면서 천천히 말을 전했다.
“오직, 오딘 님만을 섬기고 따르겠다며 밤낮으로 수련에 정진한 몸입니다. 그런데 오딘 님을 몰라뵙고, 검을 겨누는 것도 모자라 옥체에 상처까지 내다니….”
“….”
“소녀의 죄 너무나 크다는 걸 압니다. 오딘 님이 노하심도 당연합니다. 그 죄… 이 하찮은 목숨으로 대신하겠습니다.”
풍기는 비장함이 이상해서 말없이 지켜봤는데, 하는 말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목숨이 하찮다고? 그게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거 아닌가?’
돈이든 명예든 직위든… 목숨이 붙어 있어야 누리고 즐길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랑을 위해 죽고, 명예를 위해 죽는다는데… X바! 그게 뭔 개소리 ‘쌉소리’인가?
죽으면 아무것도 내게 남는 게 없는데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녀가 지금 뱉어 낸 말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일단은 내가 오딘이 아니니까, 소녀가 내게 욕하고, 대들고, 상처를 낸 것은 큰 죄가 아니었다.
물론, 많은 오해가 있었고, 그것들을 제대로 풀 생각 없이 성급하게 달려든 부분이 문제기는 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기에 괜찮았다.
아니, 막말로 내가 오딘이었어도 이건 아니었다.
진짜 실수이기는 했지만, 내가 소녀에게 저지른 일이 결코 가벼운 게 아니니까, 소녀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반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상황을 충분히 인지한다면, 오딘이 아니라 오딘 할아버지라 해도 소녀가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에 반대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역시 내 실수였지만, 거의 다 죽어 가는 걸 애써 살려 놨더니 뭐? 어쩌고 어째?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고, 짜증이 나서 독하게 한마디를 날려 주기로 했다.
“야! 너 미친 거 아니냐? 목숨이… 헛!”
몇 번이나 느끼는 거지만, 소녀는 너무나 성급했다.
사람 말을 끝까지 듣지 않는 지랄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처억!
소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무릎을 꿇고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옆에 떨어뜨렸던 아수라 스워드를 냅다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겁도 없이 날카로운 검날을 양손으로 잡고서 검 끝을 자신의 배에다가 가져다 댔다.
마치, 그 옛날 사무라이나 닌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끊을 때 행했다는 ‘할복’의 자세와 같았다.
사무라이나 닌자들이 주로 사용한 할복이니, 일본의 문화(?)였다.
더불어 이곳 발할라가 속한 던전은 일본 땅에 존재했다.
그래서 그런 방법을 택했나 싶었다.
‘미친… 지금 상황에서 무슨 개똥 같은 생각을 하고 자빠진 거야?’
급박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쓸데없는 생각을 한 나를 꾸짖었다.
스윽….
처억….
그사이, 아수라 스워드를 거꾸로 잡고 자신의 배에다가 가져다 댄 소녀는 검의 손잡이를 바닥에 꽂듯이 고정한 채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눈은 지그시 감은 채였고, 표정은 무표정에 가까웠다.
아니,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평온한 느낌인가?
뭐가 됐든… 양팔은 ‘X’자로 교차하여 가슴 부근에 댔고, 양손은 제 어깨를 잡은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바닥과 자신의 배에 고정된 아수라 스워드 위로 엎어지면 끝… 진짜로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안 돼!’
속으로 크게 소리치며, 즉시 오른손을 비틀듯 움직였다.
그러자, 여전히 내 주위를 천천히 돌고 있던 바람의 창… 궁니르가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쐐애애애액!
그 속도가 정말 바람과 같았다.
엘프의 활을 최대한으로 당겨 쏜 화살의 속도와 비슷했다.
그렇게 날아간 궁니르는 정확히 아수라 스워드를 향했다.
‘지금!’
정확한 타이밍… 궁니르가 아수라 스워드에 닿으려는 순간, 오른손의 손목을 비틀었다.
그에 맞춰 쏜살같이 날아가던 궁니르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했다.
휘리릭!
채애앵!
궁니르의 회전과 함께 금속성의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아수라 스워드가 멀찌감치 튕겨 나갔다.
“헛!”
깜짝 놀란 소녀가 눈을 떴다.
그러고는 자신의 눈앞에 둥둥 떠 있는 궁니르를 쳐다봤다.
이어, 내게로 향한 소녀의 시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녀를 향해 소리쳤다.
“너! 한 번만 더 이상한 짓거리 하면 진짜로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씩씩대는 나를 향해 소녀가 크게 절을 하듯 넙죽 엎드렸다.
“주, 죽여주십시오!”
하….
도무지 말이 통하지도 않고, 말귀도 못 알아 처먹는 멍청이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