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212)
노파심에 말하지만, 앞으로의 할 일은 결코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물론, ‘어떻게든 한번 해 봐?’라고 잠시 생각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금세 잊고서 그 후로는 떠올리지도 않았다.
만약, 피로에 지쳐 나도 모르게 뻗은 채 아침까지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혹시나, 지금보다 몇 시간만 더 지나 잠에서 깨어났더라면….
잠에서 깬 직후에 ‘그 일’이 새삼스럽게 떠오르지 않았더라면….
완전히 곯아떨어진 덕에 겨우 몇 시간을 잔 것만으로도 컨디션이 베스트가 되지 않았더라면….
바다가 육지라면….
ㅇ라면, ㅅ라면, ㅈ라면… 같은 라면을 내가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무슨 일이세요?”
린이 졸린 눈을 비비며 물어왔다.
씨익 하는 웃음과 함께 답했다.
“가자! 피라미드 구경하러!”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나 싶은 얼굴이 된 린이 커다란 눈을 껌뻑거렸다.
설명을 아낀 채, 채비를 서두르라 말했다.
“얼른얼른 움직여!”
얼떨결에 준비를 마친 녀석들을 카드 속에 봉인했다.
우르르 몰려다니기보다 혼자서 움직이는 게 아무래도 좋을 듯싶어서였다.
“그럼, 가 볼까나?”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숙소를 빠져나갔다.
* * *
시간이 시간인지라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딱히 으스스함은 없었고, 한적함만이 가득했다.
자박자박….
의식적으로 주위를 살피며 피라미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동물적 감각을 내세워 꽤 먼 곳의 기척도 살폈다.
다행히 가는 길에 누군가를 마주치거나 문제가 되는 낌새를 느끼지는 못했다.
“…?!”
피라미드에 거의 근접했을 때쯤, 넓게 퍼트린 동물적 감각에 무언가가 걸렸다.
급히 몸을 낮추며 주위를 살폈다.
근처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엉금엉금….
엄폐와 은폐.
주위에 있는 기물들을 이용해 몸을 숨기며, 네발로 기다시피 하여 피라미드 쪽으로 거리를 좁혔다.
넓게 퍼트린 동물적 감각에 걸린 기척의 크기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기척의 존재는 피라미드 주변을 지키는 보초들의 것이었다.
‘저거였군… 그나저나 밤에도 보초를 선다고?’
낮에 피라미드를 방문했을 때 잠시 일었던 호기심이 다시금 깨고 일어났다.
도대체 피라미드 안에 뭐가 있기에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보초까지 두면서 지키는 것일까?
‘흠… 그래서 그랬던 건가?’
이제는 완전히 끝에 다다른 호기심과 함께 피곤으로 지쳤던 몸이 저절로 깨어나고, 갑자기 피라미드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은 일이 나의 어떤 기막힌 촉에 의해서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뭐, 당연히 우연의 일치겠지만, 그냥 모든 것이 나 때문이고, 내가 잘나서 그런 거라며, 으스대는 소리였다.
‘뭐가 됐든 들어가 본다.’
숙소를 나서기 전부터 그럴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더욱더 생각과 마음이 확고해졌다.
얼마나 대단한 것이 있기에 이토록 철통 경비인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나저나 어찌 들어간담?’
보초나 경비가 그리 삼엄한 편은 아니었다.
낮에는 피라미드 전체를 빙 두른 채, 한 사람이 지나가기도 힘들 만큼의 거리를 두고서 빼곡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겨우 두 명씩 짝을 이루고서 피라미드의 한 면씩을 지키는 수준이었다.
뭐, 다른 곳을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그럴 듯싶었다.
게다가 많았던 인원 대신에 녹각목… 통나무 끝을 뾰족하게 깎아 세운 바리케이드가 줄줄이 늘어서 있는 상태.
바리케이드의 높이가 1미터도 채 되지 않으니, 그냥 가볍게 뛰어 넘어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내가 숨어 있는 곳과 보초를 선 이들이 있는 곳까지 아무것도 없는 휑한 공터라는 것이었다.
‘그냥 해치울까?’
고작 두 명이었다.
그것도 낮에 본 10대의 소녀들이었다.
빠르게 달려들어 거리를 좁히고, 순식간에 해치우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물론, 여기서 ‘해치운다’라는 의미가 ‘죽여 버린다’는 뜻은 아니라는… 그저 살짝이 어루만져 기절시키겠다는 뜻이라는 건 다들 알고 있으리라 본다.
아무튼.
그렇게 한 뒤에 바리케이드를 넘어 피라미드에 잠입하는 것이 가장 쉽고 편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보초들이 교대를 한다든가, 기타의 일 등으로 쓰러진 이들을 발견하게 되면, 그것도 문제가 될 터였다.
‘그럼 어쩐다?’
한참을 고민했다.
나름의 묘안이 떠올랐다.
‘흠… 잘 돼야 할 텐데….’
기원의 뜻으로 손바닥을 삭삭 비비고는 엘프의 활을 꺼내 들었다.
화살을 장전한 뒤, 피라미드의 반대쪽… 보초들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으로 활을 겨누었다.
표적으로 삼은 것… 아니,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틈새였고, 거리도 겨우 10미터 남짓 될까 말까 했다.
더불어 소리를 최대한 줄여야 했기에 소심하게 활시위를 당기고, 세심하게 화살을 날렸다.
디잉! 딩!
휘잉! 휘이잉….
빈약하기 그지없는 소리와 함께 두 발의 화살이 비틀거리며 날아갔다.
참으로 맥 빠지는 모양새였지만, 보초들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계획에서 보자면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을 터였다.
투욱… 툭….
날아간 화살이 표적인 건물과 건물 사이로 사라졌다.
살짝이 소리가 났지만, 보초들이 있는 곳에까지는 들리지 않을 크기였다.
‘다섯… 넷… 셋….’
속으로 역 카운트를 헤아리며, 한껏 더 몸을 낮췄다.
‘둘… 하나… 퍼엉!’
정확한 타이밍에 파탄이 터졌다.
흠칫!
보초들이 놀라 반응하는 기척이 동물적 감각을 통해 또렷하게 느껴졌다.
이내, 하나의 기척이 거리를 좁히며 빠르게 다가왔다.
‘췟!’
둘이 동시에 움직이기를 바랐건만, 한 명만 움직인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거기까지도 이미 생각해 둔 터라, 빠르게 아쉬움을 털어 내고는 미리 장전한 화살을 한 번 더 같은 곳에 날렸다.
디잉! 딩!
휘잉! 휘이잉….
그러고는 최대한 숨을 죽인 채, 기척이 내 앞으로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다다다닷….
제법 빠른 내달림으로 소녀 하나가 내 앞을 스치며 지나갔다.
2미터쯤의 거리였다.
파탄의 폭음에 놀라고, 소리가 들려온 곳에만 신경을 쓰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조금만 민감하고, 약간만 세심하다면, 숨어 있는 나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할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내가 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냥이에게 배운 ‘그림자 숨기기’ 스킬을 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앞으로 지나간 소녀가 금세 멀어졌다.
그림자 숨기기를 해제하고는 다시금 속으로 역 카운트를 헤아렸다.
‘셋… 둘… 하나… 펑!’
이번에도 정확한 타이밍… 소녀가 건물과 건물 사이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파탄이 폭음을 일으키며 터졌다.
“꺄악!”
소녀의 날카롭고 짧은 비명이 이어졌다.
어디를 다쳤다기보다는 그저 폭음에 놀라 내지른 비명이었다.
흠칫!
피라미드 쪽에 남아 있던 기척이 반응했다.
그러고는 이내 앞선 소녀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록 움직였다.
몇 초 뒤, 그림자 숨기기로 기척을 완전히 지운 내 앞으로 소녀가 지나갔다.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 그림자 숨기기를 해제하고는 피라미드 쪽을 향해 최대한 소리 없이 이동했다.
샤샤샤샤샤샥….
바리케이드가 가까워졌다.
내심 걱정했던… 피라미드의 다른 면을 지키고 선 소녀들까지 반응하면 어쩌나 했던 일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확실치는 않지만, 동물적 감각으로 미약하게 느껴지는 기척으로는 살짝이 긴장한 채,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듯했다.
‘좋아! 마음에 들어!’
직접 해 줄 수 없고, 소녀들로서는 전혀 이롭지도 않을 칭찬을 속으로 한껏 날려줬다.
그러고는 급정거와 함께 몸을 돌려세웠다.
이어, 한 번 더 화살을 장전했다.
처억!
장전한 화살 끝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겨누었다.
있는 힘껏 활시위를 당겼고, 거침없이 화살을 날렸다.
티잉! 팅!
쐐애애액! 쐐애액!
멋진 소리와 함께 두 발의 화살이 시커먼 밤하늘로 사라졌다.
전혀 쉴 틈 없이 한 번 더 화살을 시위에 걸고는 허공을 향해 발사했다.
티잉! 팅!
쐐애애액! 쐐애액!
화살이 사라지는 것도 확인하지 않은 채, 곧장 바리케이드를 뛰어넘고는 피라미드의 입구로 들어갔다.
그와 거의 동시에 상당히 큰 굉음이 들려왔다.
퍼어어어어엉!
히죽 새어 나오는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숨을 죽인 채 밖의 상황을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번의 굉음이 들려왔다.
퍼어어어엉!
….
상당히 요란스러운 작전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흠… 어쩌겠어, 이미 저지른 짓인걸.’
무책임을 무마하듯 어깨를 으쓱했다.
곧장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일단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두 번이나 되는 파탄의 굉음이 울려 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라미드 앞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몸을 숨긴 채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살펴보니, 소녀들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았던 누님 한 분이 합세해 있었다.
‘와우….’
누님의 모습에 속으로 탄성이 새어 나왔다.
누님은 하늘거리는 원피스 같은 걸 입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그것이 꼭 잠옷… 정확히는 슬립이라 불리는 그것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누님은 딱 그것 하나만 입고 있었다.
‘아무리 자다가 나왔다지만….’
자다가 급히 연락을 받고 달려왔을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지, 옷은 제대로 입고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면, 위에 뭐라도 좀 걸치고 나오든가.’
속으로 이러니저러니 투덜거렸지만, 예정에 없던 눈 호강에 내심 즐거웠다.
크크!
그런 나와 달리, 누님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
“그게… 갑자기 하늘에서 폭죽이 터졌습니다.”
“폭죽? 누가 이 늦은 시간에… 정찰대는?”
“보고와 함께 바로 정찰대도 움직였습니다.”
얘기를 듣던 누님이 내가 숨어 있는 피라미드의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흠칫 놀라 잽싸게 내밀고 있던 고개를 숨겼다.
들켰을까 조마조마했는데, 곧장 들려온 대화의 내용상으로는 문제가 없는 듯했다.
“안쪽은? 피라미드 안으로 침입한 흔적은 없었느냐?”
“네, 없었습니다. 저희가 계속 지키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같은 상황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당장에 터지고 날아들 질책을 피하기 위한 변명이기에 나름 이해할 수 있기도 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잘못이 들통나면 더 큰 책임을 물어야 할 테지만, 뭐 그것까지 내가 걱정할 바는 아니었다.
“흠….”
여자의 촉이란 참으로 놀랍고도 무서운 것이었다.
아니면, 이런 상황에서는 확실하게 점검을 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었을까?
뭐가 됐든 간에, 누님이 기어코 불편한 결정과 판단을 내렸다.
“너희 둘, 나를 따라오거라. 아무래도 안을 좀 살펴야겠다.”
누님과 소녀 둘이 피라미드 쪽으로 걸어왔다.
재빨리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네발로 기어서는 안쪽으로 들어왔다.
입구부터 안쪽으로는 그리 넓지 않은 통로가 쭉 이어진 모양새라 마땅히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없었다.
게다가 누님과 소녀들이 다가오는 시간을 생각하면, 통로 끝까지 가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뭐, 죽을 힘을 다해 힘껏 내달린다면 아슬아슬하게 가능할 것도 같았지만, 그랬다가는 커다란 기척에 오히려 안 하니만 못한 짓이 될 게 뻔했다.
‘아아, 어쩌지?’
다급한 심정으로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실낱같은 돌파구를 찾아냈다.
무엇 때문에 있는지 전혀 감도 잡히지 않는 통로 천장의 좁은 틈새였다.
뭐를 따지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당장에 벽을 도움닫기 삼아 천장 위로 뛰어올랐다.
휘익!
틈새로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어찌나 안성맞춤인지, 꼬옥 하고 조이는 것이 어째 포근하고, 안정감을 주는 듯했다.
‘미친….’
엉뚱한 생각을 지우고는 양팔과 다리를 힘껏 뻗어 떨어지지 않게 몸을 지탱했다.
자박자박….
누님과 소녀들이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