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210)
하압! 합! 하앗!
구역을 넘어가기 전.
여럿이 합을 맞춘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공기의 흔들림도 살짝 느껴졌다.
“와우….”
목검을 든 수십의 소녀들이 정확하게 오와 열을 맞추고 수련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장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고, 박력까지 넘치는 모습에 탄성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저쪽에 있는 아이들이 그대로 큰 것 같아요.”
이제는 보이지 않는 뒤쪽을 가리키며 린이 속삭였다.
린의 말대로 앞서 본 꼬꼬마 아이들의 각양각색이던 피부색이나 헤어스타일을 한 소녀들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훨씬 예뻐진 것 같기도 하네.”
“맞아요, 어쩜 저렇게들 예쁘게 생겼을까요?”
린이 약간이지만, 부러운 듯 말했다.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너도 예뻐.”
“네? 아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본 린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붉게 물든 목덜미에 얼굴은 완전히 홍당무가 됐겠다는 예상을 할 수 있었다.
피식하고는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겠다.”
3미터쯤 되는 높이에 기다랗게 뻗어 있는 벽을 따라 크게 이동했다.
빙 돌아가는 길을 따라가며 다른 무리의 소녀들을 더 구경할 수 있었다.
역시나 무기 내지는 방패 같은 것들을 들고서 여럿이 한 몸인 것처럼 움직이며, 멋진 그림을 자아냈다.
….
다음 구역은 일반 도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양한 모양새의 건물들과 오고 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인파와 북적임을 피해 좀 더 안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또 다른 북적거림과 활기가 넘쳐 나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와아, 예쁘다. 주인님, 저것 좀 보세요.”
린이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알록달록한 천들이 곳곳에서 하늘거리며 나부꼈다.
풍선인지 아니면 공인지는 모르겠지만, 천들만큼이나 다양한 색의 둥근 무언가도 엄청나게 많았다.
꽃다발과 꽃목걸이는 물론, 머리에 쓰는 화환을 비롯해 온갖 꽃 장식도 넘쳐났다.
축제… 정확히는 축제를 준비하는 모습으로 다들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힘듦을 내비치거나 찡그리는 이가 하나 없는 것이 모두가 진정으로 축제 준비를 즐기는 듯했다.
린이 축제 준비로 화려한 주변을 홀린 듯이 두리번거릴 동안, 오식이는 전혀 다른 것에 반응했다.
“킁… 킁… 냄새가 난다.”
“…?”
“저쪽이다, 형님!”
“뭐가?”
“맛있는 냄새가 난다!”
녀석의 말에 바로 왕울이를 쳐다봤다.
내가 무엇을 물어보는지 알겠다는 눈빛의 왕울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형님! 나 배고프다!”
오식이가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하긴, 배가 고플 때도 됐다.
아니, 한참이나 지났다.
그러고 보니, 나도 배가 고팠다.
여전히 주변 구경에 넋을 빼고 있는 린을 불렀다.
“린, 배 안 고파?”
“네?”
“오식이 난리 났어.”
내 말에 어리둥절하던 린이 오식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곧장 상황을 파악한 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밥 먹으러 가자. 어차피 시간은 많아, 게다가 본편은 아직이라고.”
“네.”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는 린에게서 오식이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오식아, 앞장서라. 제일 맛있는 냄새가 나는 곳으로 네가 안내해.”
“알았다, 형님! 나만 믿어라!”
오식이가 자신 있게 앞장섰다.
녀석의 뒤를 따랐다.
발걸음을 옮기는 중에 린이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주인님….”
“응?”
“기분이 안 좋으세요?”
역시, 린이었다.
나쁜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다운된 내 기분을 눈치챘다.
짐짓 아닌 척을 하며 되물었다.
“그래 보여?”
“네….”
괜찮다는 의미로 미소를 얼굴에 그렸다.
억지스럽고, 어색함이 내게도 느껴졌다.
눈치 빠른 린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더는 묻지 않고 조용히 땅을 보며 걸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사실 기분이 가라앉은 것이 맞다.
또한, 다들 알다시피 이곳으로 향하는 동안… 동이 틂과 동시에 거대한 문 앞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엄청나게 조급한 마음에 부랴부랴 서둘렀고, 기대감에 두근거렸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엄청난 기대감의 결과가 계속된 평범함과 무난함에 휩쓸려 무뎌짐으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도착해 거대한 문을 지나 우리가 처음 본 것은 무리를 지어 놀고 있는 ‘여자아이들’이었다.
다음으로 본 것은 칼같이 반듯한 오와 열을 자랑하며 멋들어진 수련을 하는 ‘소녀들’이었고 말이다.
그다음은 린의 눈과 관심을 홀딱 뺏어 버린 축제 준비의 현장이었는데, 그곳에서 웃고 떠들며 즐겁게 축제 준비를 하는 이들은 3, 40대쯤 되어 보이는 ‘누님들’이었다.
더불어, 멀리서 풍기는 음식 냄새를 맡은 오식이의 안내로 들어선 먹자골목 내지는 시장통 같은 곳에서 이것저것을 파는 이들은 50대 이상의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이었다.
그랬다.
여자아이, 소녀, 누님, 아주머니, 할머니….
이곳엔 죄다 여자들뿐이었다.
왜 이곳에는 여자들만 있는가?
대체,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이 질문의 답으로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이곳이 바로 ‘발할라’이기 때문이었다.
맞다.
처음 거대한 문을 지났을 때, 또 다른 신비하고, 섹시한 목소리가 우리를 환영하면 소개했던 이곳의 이름이 발할라였다.
뭐, 발할라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은 따로 검색을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고….
이미 발할라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무언가를 떠올린 이들이라면, 내가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도 충분히 알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보통, 발할라라 하면 ‘오딘’ 그리고 ‘발키리’를 떠올릴 수 있다.
먼저, 오딘은 북유럽 신화로 전해지는 이야기에서 최고의 신 중 하나로 꼽히는 자이며, 그를 칭하는 이름이나 호칭만 수십 개에 에피소드는 그것을 훌쩍 넘는 수준으로 매우 유명하다.
하지만, 나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최고이기는 하나, 남자에다가 노인이기까지 한 자에게 관심을 줄 이유가 뭐가 있을까?
내 관심사는 따로 있었다.
발키리.
오로지 발키리뿐이었다.
발키리는 오딘의 충성스러운 부하… 정예 부대쯤으로 생각하면 됐다.
북유럽 신화에서는 그녀들을 ‘전쟁의 처녀’라고 소개했으며, 오딘의 명으로 전사자들… 전쟁에서 죽은 자들을 모아 발할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책이나 영상물로 제작된 내용은 거의 가 다 그런 내용이었다.
또한, 신화니, 전설이니 하는 것들은 허구와 상상이 대부분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와 인물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존재하게 됐다.
어떻게?
당연히 던전 때문이지.
어린 시절, 우연히 본 영상물에서 처음 발키리의 존재를 알게 됐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될 정도로 아름답고, 멋지고, 섹시한 모습의 발키리는 완전히 내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그러한 마음은 10대 중, 후반의 청소년기에도 계속됐다.
남들은 실제 이성 친구를 만나고 사귀는 동안에도 나는 늘 환상 속에서만 살았다.
더없는 가난에 찌들어 힘겨웠던 시절, 그래도 나름 생겨 먹은 외모에 말을 걸어오거나 관심을 보이는 여자도 있었지만. 상상 속의 발키리 때문에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상상 속에서만 그리던 발키리를 직접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를 희망이 생겼다.
스웨덴의 어느 곳에서 발할라로 추정되는 던전이 발견된 것이었다.
당연히 그 던전 안에는 발키리가 있었다.
물론, 괴물이란 이름 아래 각성자들과 피 튀기는 사투를 벌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발할라 던전 안의 발키리는 신화나 매체에서 다룬 것처럼 엄청나게 아름다웠다고 했다.
더불어 끔찍할 정도로 강했다고도 했다.
무려 레벨이 60에 달할 정도라 했으니까, 말해 무엇할까?
하지만, 끝내는 던전을 정화하는 데 성공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던전이 되었고, 발키리도 더는 볼 수가 없게 됐다.
‘그래도 언젠가는 또 나타나겠지?’
분명히 그럴 것이라 여겼다.
그때부터 ‘내 삶에 그런 기적이 올 리 없어!’라고 생각했던 각성의 행운을 매일같이 간절하게 바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바람과 다르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내게 또 다른 발키리가 등장했다.
TV 화면을 꽉 채운 그녀의 이름은 ‘하나쿠’였다.
다들 알고 있는 하나쿠 짱 말이다.
완전한 상상 속의 첫사랑.
그런 그녀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약하고, 조그마한 가능성이 생겼으나, 각성이라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을 수 없어서 점점 지쳐 가고, 포기하기에 이르던 순간.
훨씬 더 큰 가능성과 넘치는 순애보를 대체하고도 남을 존재가 나타난 것은 내게 또 다른 기적이자 기회나 다름이 없었다.
‘내 사랑은 영원히 하나쿠 짱뿐이야! 꼭 그녀와 결혼하겠어!’
소박하면서도 원대한 꿈을 이루는 데에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각성을 하지 않아도 됐다.
그냥 무슨 짓을 하든 돈만 있으면 이룰 수 있는 그런 꿈이었다.
그게 그리 쉽지 않다는 걸 나중에 알고 또 좌절했지만, 그렇게 나는 새로운 사랑인 하나쿠 짱으로 인해 발키리를 잊을 수 있었다.
이후의 이야기는 대충들 알고 있을 것이다.
웃긴 점이라면,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고 얼마 되지 않아 내가 각성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하나쿠 짱이 내게 가져다준 행운이라 여겼다.
하지만, 행운은 개뿔… 쓰레기로 5년을 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어쨌든 간에….
결국에는 꿈에 그리던 하나쿠 짱을 품을 수 있었다.
생각했던 것만큼 기쁘지 않고, 더없는 허탈감에 빠져 그녀를 깨끗이 잊기로 했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렇게 하나쿠 짱을 완전히 지운 내게 첫사랑이었던 발키리가 다시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어쩌면 신의 장난질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그것도 하나쿠 짱을 품은 이곳… 북유럽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일본에서….
게다가 앞선 던전의 형태나 서식하는 괴물들과도 전혀 연관성이 없는 곳에서 완전히 잊고 있던 발키리의 소식을 들은 건 정말이지 뭐라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었다.
‘만나고 싶어, 만나고 싶다, 꼭 만나고 말겠어!’
바램//바람은 간절해졌고, 기대감은 커져만 갔다.
그러다 때가 되었고, 마침내 이곳 발할라에 도착했다.
다시 말하지만, 불과 몇 시간 전….
거대한 문을 앞에 두고, 통과하면서는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 진심으로 미칠 듯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귀엽고, 예쁜 여자아이들을 보면서….
청초하며, 예쁜 소녀들을 보면서….
포근하고, 예쁜 누님들을 보면서….
군계일학이라는 말이 있다.
본래의 뜻은 좀 다르지만, 평범한 것들 속에 뛰어난 단 하나가 있어야 빛나 보인단 의미는 일맥상통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학이 너무나 많았다.
아니, 평범한 닭은 하나도 없고, 죄다 예쁜 학뿐이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하아… 질려….’
그랬다.
어디를 봐도 예쁘기만 한 여자들이 가득가득하니 질려 버렸다.
아니, 감흥이 점점 떨어지다가 이제는 완전히 무뎌진 꼴이었다.
곁에 있는 린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일 수도 있지만, 살짝이… 솔직히 말해서 이곳에 있는 발키리(?)들과 비교해 조금, 아주 조금 떨어지고, 부족해 보이는 린이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그래… 뭐, 봤으면 됐지. 그냥 축제나 즐기자.’
그나마 아직 남은 하이라이트.
내일부터 시작될 본격적인 축제와 모레 있을 예정인 대망의 하이라이트를 즐기는 것으로 무뎌진 마음을 달래면 될 일이었다.
분명히 그러고서 그냥 떠나면 될 일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