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201)
“주인님… 주인님….”
린이 조심스레 나를 깨웠다.
늦게까지 뒤척이다가 새벽녘에 겨우 잠이 들었다.
너무나 피곤했고, 너무나 졸렸다.
“으음… 조, 좀만 더 잘게….”
몸을 말아 돌리며 일어나기를 거부했다.
등 뒤로 난감함이 느껴졌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순식간에 다시 잠에 빠져들려던 찰나.
“주인님… 누가 찾아 왔습니다.”
“….”
“일어나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
찾아올 사람이 없었다.
아는 사람이 있어야 그러기라도 할 텐데, 다들 알다시피 그럴만한 사람이 없었다.
약간의 귀찮음을 표하며 물었다.
“누군데?”
“모르겠습니다. 무장한 남자 다섯입니다.”
“…?!”
무장을 했다는 말에 정신이 들었다.
여전히 귀찮았고, 힘겨웠지만 일단은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몸이 무거웠고, 머리까지 띵했다.
“어디 있지?”
“문 앞에 있습니다.”
“무장을 했다고?”
“네. 한 명은 제법 높은 지위에 있는 것처럼 차려입었고, 나머지는 경갑 수준입니다.”
“흠… 잠시만 기다리라 해.”
“네, 알겠습니다.”
린이 물러났다.
몇 초쯤 그대로 앉아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다.
무의식중에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가 어질어질한 탓에 후회했다.
“끄응….”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미 오래전에 깨어있던 것 같은 오식이와 왕울이가 내 눈치를 살폈다.
평상시의 모습과 너무 다른 오식이를 향해 물었다.
“야, 너 어제 무슨 일 있었냐?”
내 물음에 오식이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해서,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린한테 맞기라도 한 거야? 너답지 않게, 왜 이리 얌전한 건데?”
진짜 맞기라도 한 것인지, 녀석이 이제 막 문을 열고 들어오는 린을 힐끔거리며 주저했다.
끝내는 녀석에게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곁으로 다가온 린이 공손하게 말했다.
“주인님, 말씀 전했습니다.”
“뭐래?”
“기다리겠답니다.”
“흠….”
정신이 거의 다 돌아와서일까?
문밖의 그들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대충 세수를 하고는 자리를 만들었다.
그래 봤자, 거실의 소파와 테이블이었지만….
“린, 모셔 와.”
“네, 주인님.”
린이 물러났다.
오식이와 왕울이가 눈에 들어왔다.
“너희들은 방에 들어가 있을래?”
녀석들이 얌전히 침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린과 함께 다섯의 사내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린의 말대로 화려한 차림의 한 명과 마치, 그를 호위 또는 보좌하는 듯한 네 명이 함께였다.
빠르게 그들의 모습을 조금 더 살폈다.
‘흐음….’
화려한 차림의 남자는 30대 후반쯤 되어 보였다.
키는 나와 비슷한 180센티미터쯤 되어 보였고, 체격은 딱 적당했다.
걸음걸이도 그렇고, 표정도 그렇고, ‘내가 어디 가서 대우 좀 받는 사람이다’라는 느낌을 줬다.
그를 따르는 네 명의 사내는 딱히 말할 특징이 없었다.
그냥…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쯤 되는 나이에 170을 간신히 웃도는 정도였다.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화려한 차림의 남자가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인사했다.
“켄지라고 합니다. 이곳 자트란드에서 활동하는 길드의 일원이죠.”
“아, 네… 썬더 길드로군요.”
자신을 켄지라 소개한 남자와 일행이 썬더 길드원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왼쪽 가슴께에 박힌 번개 표시가 너무나 또렷했기 때문이었다.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그와 마주 앉았다.
다른 일행들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그때였다.
똑똑!
난데없는 노크 소리에 분위기가 깨졌다.
이 시간에 누군가가 문을 두드릴 리 없었다.
해서, 그들의 일행이 더 있나 싶어 물었다.
“누가 더 오는 겁니까?”
“아닙니다. 저희가 답니다.”
그도 의아함을 내비치며 답했다.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곁에 서 있던 린이 무릎을 살짝 굽히고는 작게 말했다.
“제가 차를 준비시켰습니다.”
“아… 그, 그래….”
“가져오겠습니다.”
“응.”
린이 뒤로 물러나 문 쪽으로 향했다.
뒤에 서 있던 네 명의 사내들 눈빛이 린을 따라 움직였다.
‘칫! 예쁜 건 알아 가지고….’
뿌듯함에 절로 어깨에 힘을 들어갔다.
사뿐사뿐….
린이 찻주전자와 찻잔이 담긴 쟁반을 들고서 다가왔다.
그 모습이 마치, 한 마리 나비 같았다.
어색한 분위기에 남자들만 가득한 곳이라 그런지, 린의 행동 하나하나가 단연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린을 등지고 선 켄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넷은 완전히 린에게 빠져 홀린 듯했다.
스윽….
린이 쟁반을 테이블 끝에 내려놓고는 그 옆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어, 주전자에 담긴 차를 찻잔에 따랐다.
쪼르르르….
별것 아니라 생각할 수도 있는 동작과 모습이었다.
하지만, 켄지나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마저도 눈길이 가는 모양이었다.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켄지의 입 모양과 표정이 ‘오오!’의 감탄사를 그리고 있었다.
차를 다 따른 린이 찻잔을 나와 켄지 앞에 내놨다.
“감사합니다.”
켄지가 잔뜩 목소리를 깔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린이 입가에 살짝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켄지의 얼굴에 봄이 피었다.
뭐, 곧 사라질 봄이었지만….
스윽….
린은 마지막까지 조신함의 끝을 보여 주며,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으로 물러났다.
역시나 다른 이들의 시선이 린에게 쏠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켄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달그락….
스으윽….
그가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차를 좀 마셔 본 것인지, 본능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코로 향을 느꼈다.
순간, 그의 미간과 눈썹이 꿈틀거렸다.
‘크크크!’
그럴 줄 알았다.
튀어 나올뻔한 웃음을 억지로 참아 냈다.
아직 남은 하이라이트를 위해서였다.
다른 이들은 물론, 나 또한 오랜만에 린의 조심함과 예쁨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이내 코를 자극하는 익숙한 향에 정신이 들었다.
차에서 흘러나오는 향… 한 번만 맡아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그 향… 바로 로믄 차의 향이었다.
린의 최애 차이자, 오식이마저도 마시기를 거부하는 ‘마셔도 죽지는 않는 독극물’ 말이다.
차의 정체를 알았으니, 당연히 나는 마실 생각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하이라이트를 위해 그에게는 적극적으로 권할 생각이었다.
“식기 전에 드시죠.”
“아, 네….”
내 권유에 그가 살짝 머뭇거리다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호… 호… 호로록….”
뜨거움을 식히고 드디어 그가 차를 마셨다.
얼굴에 긴가민가한 표정이 그려지나 싶더니만, 이내 인상을 구긴 그가 차를 뱉어 내며 구역질을 해댔다.
“우에엑!”
순간, 린에게 정신을 팔고 있던 네 명의 사내들이 화들짝 놀라며 켄지 곁으로 몰려들었다.
“케, 켄지님! 괜찮으십니까?”
그중, 하나는 검까지 뽑아 들고 나를 겨눴다.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양쪽 손바닥을 내보인 채 반쯤 들어 보였다.
어느새 빗자루를 빼 들고 전투태세에 들어간 린을 향해서도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무, 무슨 짓이냐? 서, 설마 독?”
다른 이가 따지고, 호통을 치듯 소리쳤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믿지 못하는 얼굴들이었다.
“크으….”
맛이 쓰고, 지랄 같을 뿐이지, 목숨에는 전혀 지장이 없기에 켄지는 곧 정신(?)을 차렸다.
사뭇 창백해진 얼굴로 거친 숨을 헉헉대기는 했지만 말이다.
나를 향한 추궁은 잠시 멈췄고, 그런 켄지의 케어가 이어졌다.
사실, 그를 골탕 먹이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처음에는 말이다.
솔직히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와 단잠을 깨운 것이 좀 그렇기는 했지만, 무슨 일 때문에 왔는지, 어떤 사람들인지조차 모르는 이들을 골탕 먹이고, 실수를 자처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한다면, 내가 시키지도 않은… 만약에 알았다면, 분명하고 단호하게 그러지 말라고 했을 린의 독단적인 로믄 차 대접이었다.
게다가 린이 차를 따름과 거의 동시에 차의 정체를 알게 됐을 때는 뭣도 모르는 켄지에게 슬쩍 언질을 주려고도 했었다.
맛이 좀 독특하니, 생각을 좀 해 보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접게 만드는 일이 발생했다.
다소곳하게 차를 따르는 린의 모습을 쳐다보던 켄지의 얼굴에 봄이 그려지던 시점이었다.
그 순간, 켄지의 눈빛에서 묘한 것을 캐치했다.
남자라면 대부분이 즉시 알아볼 수 있는….
경계심이 남다르거나 촉이 좀 좋다고 자부하는 여자들은 물론, 남자들을 꽤 만나 봤다고 자부하는 여자들도 파악할 수 있는 그런 눈빛….
바로 ‘음흉의 눈빛’이 그것이었다.
던전과 게이트 시대 이전부터 19금과 성인문화에 앞장섰던 일본이었다.
당연히 지금 시대에 와서도 일본은 자신들의 특기이자, 장기인 그것을 놓지 않고 있었다.
아니, 다른 나라들이 던전 사업과 헌터 육성에 열을 올리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거의 독점이라고 봐도 좋을 만큼 그쪽 계통의 산업은 단연코 일본이 세계 제일이었다.
그런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였다.
다들 알지 않는가, 이전의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이다.
흠흠!
어쨌든….
나름 전문가에 속하는 내가 보기에 린을 향한 켄지의 눈빛은 음흉 그 자체였다.
대체 어디까지… 어느 정도 수위까지 상상하고 있는지는 나조차도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일단은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그 이상의 지랄이 그의 머릿속에서 그려지고 있다 여겼다.
‘네깟 놈이 감히 누굴 넘보는 거야?’
그때부터였다.
그에게 로믄 차의 쓰디쓴 맛을 보여 주겠다고 생각한 게 말이다.
결과는 뭐, 보시다시피… 흐흐!
….
어느 정도 상황이 수습됐다.
켄지는 거의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잠시 미뤄졌던 나에 대한 추궁이 이어졌다.
“뭐 하는 놈이냐? 무슨 이유로 켄지님께 이런걸….”
“설마, 네놈… 레드 쪽의 첩자였나?”
레드라는 말에 켄지를 포함한 모든 이들의 눈빛이 변했다.
그냥 봐도 적대감이나 불편함이 진하게 풍겨 왔고, 전해졌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실을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어떤 길드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어째서!”
호통이 날아들었다.
차분하고, 여유롭게 대처했다.
“뭐가 왜고, 뭐가 어째서입니까? 저는 그저 찾아온 손님에게 차를 권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 차가 문제….”
다소 흥분한 채 소리치던 이를 만류하며 다른 이가 나섰다.
“마셔 봐라.”
“…??”
“아무런 문제가 없고, 계략 따위가 없다면, 너도 그 차를 마셔 보란 말이다.”
제법 생각이란 걸 할 줄 아는 놈이 무리에 끼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의 말처럼 내가 차를 마시면 모든 게 확실해진다.
뭐, 한 번 당해 보라는 심산에 친 장난이었지만, 나 역시 로믄 차를 마신다면 켄지와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 분명했다.
독이 아님은 확실해도 그런 격한 반응에 오해를 면치 못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올 것 정도는 이미 예상했다.
당연히 빠져나갈 수도 생각해 둔 상태였다.
태연하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 저는 식전이라… 제가 식전에는 차를 마시지 않아서요.”
“이잇! 어디서 그런 꼼수를 부려? 우리랑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내게 섣불리 검을 겨누고, 계속해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던 이가 또다시 열을 냈다.
피식거림과 함께 어깨까지 으쓱하며 그를 더 자극했다.
그에, 다른 이들도 한껏 인상을 구겼다.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켄지까지도 말이다.
그런 그들을 향해 씨익 웃고는 린을 향해 손짓했다.
“린, 이쪽으로 좀 와 볼래?”
“네, 주인님.”
대답과 함께 린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시선이 쏠렸다.
아랑곳없이 린에게 말했다.
“나 대신 차 좀 마셔 주겠어?”
“네, 주인님.”
린이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역시나 그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결과야 뭐… 하하하!
으쓱!
뭐가 문제냐는 표정과 뉘앙스를 또렷하게 풍기며 어깨를 으쓱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