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197)
엘리자의 비명에 나도 놀랐고, 당황했다.
그녀를 끌어안은 채 다급하게 말했다.
“에, 엘리자. 나, 나야. 나라고!”
엘리자의 고개가 살짝 돌려졌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반가움의 미소를 그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애틋한 재회가 드디어 이루어지나 싶었다.
아니었다.
그녀의 두 번째 비명이 울려 퍼졌다.
“꺄아아아아악!”
격심한 발버둥과 함께였다.
힘으로 붙잡으려면 쉽게 그럴 수 있었지만, 혹여 엘리자가 다칠까 싶어 팔과 손에 힘을 풀었다.
사실, 당황과 난처함의 영향도 좀 컸다.
어쨌든.
내 품에서 빠져나간 엘리자가 허둥지둥하다가 바닥을 굴렀다.
크게 다쳤을까 싶어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며 앞으로 나섰다.
완전히 겁에 질린 그녀가 뒤로 물러나며 세 번째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아악!”
“에, 엘리자! 왜 그래? 나야, 나라고!”
앞으로 나서기를 멈추고 나라는 것을 강렬하게 어필했다.
엘리자는 여전히 겁에 질린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상황이 조금 진정되려는 듯 보였다.
다시금 나라는 것을 알렸다.
“이제 좀 정신이 들어?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나야, 선우… 당신의 달링이라고!”
애틋함보다는 서운함이 조금 더 깃들어 있었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계속 쳐다보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뗐다.
“사, 살려 주세요. 나, 남편이 있는 몸이에요.”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순간 울컥했고, 감격했다.
‘하, 이게 그런 느낌인 건가?’
그런 얘기가 있다.
아주아주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스갯소리 중 하나로 ‘술에 잔뜩 취해 들어왔을 때, 아내에게 사랑받는 법!’에 관한 것이다.
고주망태가 되어 집에 들어와 그대로 침대에 뻗는다.
화가 난 아내는 남편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못 들은 척하고는 그대로 버틴다.
아내는 더욱더 짜증을 내지만, 그대로 자게 둘 수 없기에 억지로라도 남편의 옷을 벗긴다.
그때!
몸을 뒤척이거나 아내의 손을 뿌리치며 단호하게 말한다.
“손 치워! 내 옷은 우리 XX이 밖에 못 벗겨!”
여기서 말하는 ‘우리 XX’이란, 당연히 아내의 이름이다.
그에, 감격한 아내는 머리끝까지 솟았던 화가 가라앉고, 다음 날 아침에 얼큰하고 시원한 해장국까지 끓여 준다는 그런 얘기다.
뭐, 재미와 농담의 유머로만 볼 수도 있지만, 우리 선조들… 특히 남자 선조 님들의 재기발랄한 삶의 노하우가 제대로 느껴지는 것이기도 하다.
불현듯 그 얘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감격했다.
비록, 서류상으로 뭔가가 있거나, 도장을 찍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더불어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엘리자와 나는 할 거 안 할 거 다 하면서 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함께 밥을 먹으며 부대끼던 동거인 사이였다.
아이를 몇 명이나 낳자는 얘기까지 스스럼없이 하던 뭐, 그런….
금방 돌아오겠다고 굳게 약속하고서는 여러 날이 지나도록 소식도 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돌아와서는 기척도 없이 다가가 놀라게 했다.
다 이유가 있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만, 당하는 엘리자의 입장에서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도 제대로 되지 않을 만큼 어리둥절하고 당황스러울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남편이 있다면서 외간 남자로부터 제 몸을 지키려는 ‘열녀’의 모습이라니….
앞서도 말했지만, 나와 엘리자는 그렇고 그런 사이.
당연히 그녀가 외친 ‘남편이 있어요’에서의 남편은 나를 두고 하는 말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니 어찌 감격하고, 울컥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크으, 내가 뭐라고….’
그녀에 대한 미안함과 애정이 더욱더 커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 나야… 엘리자, 당신이 그렇게 그리던 내가 왔다고….”
콧잔등이 시큰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겨우겨우 참아 내며 말했다.
이제는 좀 알아봐 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은 이 뜨거운 그리움과 애절함을 어서 빨리 폭발시키며 서로 끌어안은 채 목놓아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미안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어… 하지만, 이렇게 돌아왔잖아. 당신의 나, 남ㅍ….”
진심 어린 사과도 했고, 감정에 잔뜩 취해 낯간지러울 법한 말까지 꺼내려던 찰나였다.
벌컥!
난데없이 집 문이 거칠게 열렸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남자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고, 제법 건장한 체구였다.
남자는 술에 취한 듯했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에 붉어진 얼굴, 게다가 옷차림도 후줄근한 걸레짝 같았다.
한 손에는 반 이상 비어 있는 큼직한 술병도 들고 있었다.
“….”
뜬금없는 상황이라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몸을 움직이기는커녕,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그런 나를 빤히… 아니, 흐리멍덩한 눈으로 쳐다보던 그였다.
“너 므야? 웬 느민데, 나므 집 아페서 소라니야?”
남자가 잔뜩 꼬여 버린 혀를 놀려댔다.
잠시 나간 넋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터였지만, 기분이 과히 좋지는 않았다.
그런 나를 더욱더 황당하게 만들고, 어이없게 하는 일이 곧이어 벌어졌다.
어기적어기적….
엘리자가 여전히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앉은뱅이 자세로 기어서는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그것도 아주아주 애절하게 도움을 청하듯이 말이다.
‘허….’
더없는 충격이었다.
묵직한 해머로 뒤통수를 때려 맞은 충격… 아니, 아예 통째로 뇌가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그런 나는 안중에도 없는 듯 그들만의 커뮤니케이션 이어졌다.
“여, 여보… 글쎄, 저 사람이 갑자기… 흑흑!”
“뭐, 뭐? 저 새키가?”
또다시 강렬한 충격이 머리통을 후려쳤다.
엘리자가… 나의 엘리자가… 생판 처음 보는 놈팡이를 향해 애원하고, 흐느끼는 것도 모자라, ‘여보’라는 호칭까지 사용하다니….
나를 향한 남자의 욕설은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정말이지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고, 눈이 뒤집혔으며, 심장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야, 이 새키야! 너 내 마누라하테 무슨 지슬한 거야?”
취기에 흥분까지 얹혀 이리저리 새는 발음으로 소리치며 삿대질을 하던 남자가 이어,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걸어 나왔다.
“아아, 여, 여보….”
그를 말리듯 엘리자가 애원했다.
“나 봐! 이씨… 다 주거써!”
엘리자의 붙잡음에 살짝 내려간 바지춤을 우스꽝스럽게 끌어올린 남자가 갈지자의 스텝을 밟으면 내게로 점점 다가왔다.
그러고는 휘청이는 몸짓으로 내게 다짜고짜 주먹을 날려 왔다.
휘이익!
이건 뭐, 맞으라고 해도 못 맞을 수준이었다.
조준도 제대로 안 됐고, 느리기도 엄청 느렸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남자의 주먹을 피했다.
“어쭈… 피해? 이 자시기!”
남자의 난잡한 주먹질이 이어졌다.
그저 약간씩 돌리는 고개의 움직임이나 상체의 비틂 정도로도 전혀 닿지 않는 수준이었다.
“어쭈우… 이 새키… 자꾸 피하네? 이 새키야, 너 내가 누군지 아라?”
알 리가 없다.
알고 싶지도 않다.
아니, 알아야 했나?
“키키키… 너 내가 누군지 모르지? 뭐또 모르면서 이 새키가 까불고 이써….”
혼자서 웃고 화내며 떠들던 남자가 다시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이번에는 그대로 그의 주먹질에 얼굴을 내줬다.
퍼억!
물러 터진 주먹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어쩌지 못할 만큼 약했다.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몸을 살짝 움찔한 그가 멈칫했다.
여전히 흐리멍덩한 상태지만, 내가 뿜어내는 살기를 느끼긴 한 모양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나직하게 속삭였다.
“뭣도 모르는 건 너 같은데?”
남자의 명치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일명 ‘명존쎄’였다.
퍼어억!
묵직한 충격과 함께 남자가 뒤로 날아가 벌러덩 자빠졌다.
격한 통증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아직 화가 덜 풀린 터라 그를 향해 다가가려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와 거의 동시에 뒤쪽에 떨어져 있던 엘리자가 황급히 기어와 그를 감싸 안았다.
“헛….”
다시금 날아드는 배신감과 어이없음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이어진 그녀의 다급하고 절규에 찬 외침.
“사, 살려 주세요. 아무도 없어요? 사, 사람 살려어어어어어!”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가슴과 머릿속이 뜨거운 뭔가로 가득 차올랐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엘리자의 미친 듯한 외침이 다시금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도, 도와주세요. 제발, 누가 좀 도와주세요오오오!”
근처에서 기척이 일었다.
누군가가 창문을 열었고, 누군가는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치잇!”
이 어이없는 상황을 파악하고, 바로잡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좋지 않다고 여겼다.
어쩌면 더욱더 곤란한 상황에 부닥칠 수도 있었다.
곧장 몸을 뒤로 날려 자리를 피했다.
멀어지는 엘리자의 모습 위로 흐드러진 물방울 몇 개가 띄워졌다.
….
“젠장, 이게 무슨 일이야?”
도무지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를 보고 반가워하기는커녕, 놀라기만 한 엘리자.
거기에 생판 처음 보는 고주망태의 남자가 우리의 집에서 버젓이 나타났다.
그런 그에게 엘리자는 여보라는 호칭을 쓰며, 내 속을 뒤집어 놓았고, 급기야 살려 달라면서 고래고래 악을 쓰며, 나를 괴한이나 침입자 취급까지 했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가?’
내가 약속을 어기기는 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사이에 다른 남자가 생겼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니, 현재 상황으로 보자면 이미 딴 남자가 엘리자의 곁에 있었고, 결혼까지 한 상태였다.
“참나….”
말하면서도 겁나게 어이없고, 황당했다.
막장 드라마도 이렇게 막 나가는 스토리를 쓰지는 않을 듯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하는 건 진심 너무했다.
“으으, 머리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가슴은 더욱더 아팠다.
이런 내 상황을 누가 좀 알아주고, 위로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카드 속에 봉인된 녀석들은 아무래도 아닌 듯싶었다.
터덜터덜….
정처 없이 걸었다.
한참이나 고개를 숙인 채 걷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낯익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당장에 저기다 싶은 마음이 들었고,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벌컥!
짤랑짤랑!
문을 열자 달려 있던 종이 요란하게 울어댔다.
이내 안쪽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살집 풍만한 남자가 벌떡 일어나 습관적이고, 기계적인 인사를 건네왔다.
“어서 오세요.”
그의 앞으로 곧장 다가가 손님용으로 놓인 의자에 털썩 앉았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고, 어깨와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기막히고, 안쓰러움을 알아 달라는 의미였다.
“흐음… 무슨….”
“아, 말도 마, 알버트. 어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그의 말을 끊고는 푸념처럼 말을 늘어놨다.
당연히 알버트는 풍만한 살집의 남자였고, 그는 마정석 가게의 주인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훨씬 많았다.
하지만, 이곳에 있던 지난날 동안, 하루가 멀다고 찾아와 마정석 거래를 하며 친분을 쌓았다.
워낙에 그가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하고,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터라 나이의 격차까지 무시한 채 금세 절친이 되었다.
게다가 엘리자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글쎄, 엘리자가… 그녀가 좀 이상해. 아니, 너무 많이 이상해.”
“….”
“이상한 놈이랑 같이 살고 있고, 결혼까지 한 것 같아. 내가 이곳을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렇게 되다니, 이게 말이나 돼? 응? 네가 좀 말해 봐!”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그 정도로도 뭔가 속이 좀 풀리는 기분이었다.
아직 풀어야 할 게 산더미 같았지만 말이다.
한참이나 조용하던 알버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기… 실례지만, 누구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