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190)
솨아아아….
욕실 문 너머로 물소리가 들려왔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고,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두리번두리번….
안절부절….
머리와 시선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다리도 달달달 떨어댔다.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서성거렸다.
‘어쩌지? 어째야 하지? 아아, 어떻게 하지?’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가며 고민했다.
문득, 하얀 천과 이불로 덮여 있는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꿀꺽….”
크게 침을 삼키고는 욕실 쪽을 힐끔거린 뒤, 침대로 다가갔다.
잠시 고민했고, 천천히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흐음….”
또 한 번 고민한 뒤에 침대에 누웠다.
‘옷을 벗고 있는 게 좋을까? 이불은 어쩌지?’
방어구지만 평상복과 다름없는 겉옷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안에 껴입은 전투 타이츠는 얘기가 다르다.
벗는 것도 버겁고, 애를 좀 써야 한다.
역사적이고, 다급한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장애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 전투 타이츠만 벗자!’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벗었다.
초조하고, 급한 마음에 하마터면 발이 걸려 옆으로 쓰러질 뻔했다.
“끄응차!”
쯔어어억….
내 몸과 하나 된 전투 타이츠의 가공할 밀착력을 이겨 내느라 진땀을 빼야만 했다.
“후우우우….”
거친 숨을 몰아쉬고는 벗어 놓은 겉옷을 다시 챙겨 입었다.
‘좋아, 됐어!’
확실히 홀가분해진 몸과 마음으로 침대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이불도 잘 덮었다.
한쪽 팔을 들어 베개 삼아 베고는 다소 느끼하고, 여유로운 포즈를 잡아 보기도 했다.
두근두근두근….
계속해서 두근대는 심장은 좀처럼 안정되지 않고 있었다.
그때였다.
솨아아아아….
뚝….
욕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끊어졌다.
동시에 내 숨도 멎었다.
심장이 폭발 직전까지 요동을 쳐댔다.
두근두근두근….
잠시간의 정적.
이어, 굳게 닫혀 있던 욕실 문이 나지막한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끼이이익….
….
번쩍!
눈을 떴다.
낯익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나 낯익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
눈을 깜빡거렸다.
꿈인지 현실인지 파악했다.
현실이었다.
‘뭐지?’
의문과 함께 직전의 기억을 되짚었다.
엘리자가 샤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안절부절못하다가 끝내 전투 타이츠를 벗고 침대에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소리가 끊기고 욕실 문이 열렸다.
그 뒤로 기억이 없다.
휘익!
이불을 걷었다.
옷이 벗겨져 있었다.
팬티 차림이었다.
“헛….”
뭔 일이 있긴 있었던 듯했다.
그런데 기억이 없다.
미칠 노릇이었다.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테이블 위에 내 옷가지들이 잘 개어진 채 놓여 있었다.
그 위에 뭔가도 있었다.
“…??”
침대를 벗어나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쪽지였다.
“….”
뭐라 적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하트 표시와 입술 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연인 사이의 좋은 내용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쩝….”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
밖으로 나왔다.
한밤중이었다.
원래는 그냥 엘리자의 집에서 그녀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밤사이… 아니, 낮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꼭 알아야만 했고, 알고 싶었다.
하지만, 배가 고프다며 난리를 쳐대는 오식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오게 됐다.
므흣하고, 역사적인 상황을 앞두고 일부러 단절했던 녀석들과의 정신적 교류를 푼 것이 실수였다.
‘어차피 짐도 찾아야 하니까….’
배낭과 엘프의 활 등이 여관에 있었다.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돈만 낸 것이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설마, 버리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서둘러 여관으로 향했다.
다행히 물건은 그대로 있었다.
“더 머물지 않으실 건가요?”
직접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며칠 더 묵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짐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더 머물지 않고, 짐만 찾아간다니까 보인 아주머니의 반응과 표정 등이 그랬다.
짐을 찾고는 식당으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라 손님이 거의 없었다.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오식이가 식당 안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크르르르….”
마지막 식사를 한 지 하루를 온전히 넘기고도 몇 시간이나 지난 상태였다.
충분히 녀석의 심경을 헤아릴 수 있었다.
“미안… 마음껏 먹어. 다 시켜 줄 테니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안한 마음에 차고 넘치도록 음식을 주문했다.
“우적우적… 와구와구….”
시작과 동시에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녀석의 치열한 먹방이 펼쳐졌다.
“하하… 죄송해요. 깨지거나 더러워진 것들은 변상할 테니, 주문한 음식들이나 빨리 내주세요.”
식당 주인에게 양해를 구했다.
놀람과 당황, 멋쩍음 등으로 한껏 표정을 굳힌 그에게 일단 금화 두 개를 건넸다.
그제야 그가 주방 쪽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조리를 재촉했다.
….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섰다.
어젯밤 엘리자와 얘기를 나눴던 공터로 가 잠시 쉬다가 녀석들을 다시 카드에 봉인했다.
술집이 문을 닫을 시간이 거의 다 됐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술집을 향해 걸어갔다.
어슬렁어슬렁….
술집 앞에서 어슬렁거렸다.
들어갈까 말까 고민 중이었다.
한참이나 그러다가는 끝내 술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멀리서 나를 알아본 엘리자가 환하게 웃으며 아는 척을 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빈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마무리 중이라 그런지 손님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달링! 어서 와!”
신을 내며 활기차게 다가온 엘리자가 건넨 인사에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들뜸과 애정이 느껴지는 달링이란 호칭 때문이었다.
뭔가 어색하면서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었다.
“아아… 으응….”
“내가 써 놓은 쪽지 본 거지?”
“응?”
“심심하면 가게로 놀러 오라 했잖아.”
그제야 쪽지의 내용이 그렇다는 걸 알게 됐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음을 던졌다.
“언제 끝나?”
“음, 이제 곧… 기다리는 동안 맥주 한잔할래?”
배가 불렀다.
하지만, 그냥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 맥주 줘. 아, 안주는 됐고.”
“응, 잠시만 기다려.”
엘리자가 바로 돌아섰다.
맥줏값을 내기 위해 주머니를 뒤지려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선불이지 않았나?’
어제는 분명 술값과 안줏값을 선불로 냈었다.
팁을 가장한 삥도 뜯겼다.
어쨌든 간에 잠시 후, 엘리자가 맥주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돈은 끝내 내지 않았다.
….
술집이 문을 닫기 직전 밖으로 나왔다.
어제처럼 가게 밖 골목에서 엘리자를 기다렸다.
“달링! 나 왔어!”
신을 내며 달려온 엘리자가 대뜸 내 팔에 매달렸다.
뭉클함과 부드러움이 팔뚝을 타고 전해졌다.
아무리 떠올리려고 애를 써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 역사적인 그 일이 미치도록 아쉬움을 유발했다.
“빨리 가자.”
“으응.”
엘리자의 집으로 향했다.
궁금함에 입이 근질거렸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
엘리자의 집에 도착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엘리자가 팔로 내 목을 감싸며 진하게 안겨 왔다.
쪽쪽 거리는 소리를 동반한 뽀뽀도 해 왔다.
‘흐미….’
짜릿하고 부드러운 엘리자의 입술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빠져 버렸다.
집에 도착하면 곧장 풀어내려던 궁금증은 까맣게 잊은 채였다.
더듬더듬….
스슥삭삭….
엘리자의 손길이 빠르게 움직였다.
내 손도 본능적인 테크트리를 탔다.
엘리자의 손길에 내 겉옷이 먼저 벗겨졌고, 내 손길에 그녀의 겉옷이 막 벗겨질 참이었다.
뚜우….
….
‘….’
꺼져 버린 전원이 들어오듯 정신이 돌아왔다.
곧장 눈을 떴다.
번쩍!
낯익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같은 것을 본… 거의 똑같았던 상황을 겪은 기억이 났다.
이런 걸 ‘데자뷔’라고 하던가?
“…?!”
잠시 멍하게 있다가는 깜짝 놀라 흠칫했다.
옆에서 느껴지는 기척 때문이었다.
기척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엘리자였다.
세상 모른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더듬더듬….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불 속의 내 몸을 더듬었다.
역시나 팬티 하나만 입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내 옷도 그렇고 엘리자의 옷도 모두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하아아….”
한숨이 새어 나왔다.
상황으로 봐서는 분명 뭔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전혀 기억이 없었다.
억울하고, 아쉽고, 답답하고, 미칠 지경이었다.
‘아아, 대체 뭐야? 왜 이런 거야?’
물음을 던져도 대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옷가지들.
그로 인해 나는 지금 팬티 한 장만 걸친 반나체 상황이었다.
내 옆에 누워서 곤히 잠들어 있는 엘리자의 옷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도 속옷만 입고 있을 터.
그게 아니면… 흠흠!
‘그래, 그거라도… 뭐, 그 정도는 괜찮잖아?’
기억을 못해서 그렇지, 정황상으로는 분명 어떤 일이 벌어진 게 확실했다.
만에 하나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냥 그렇다고 여겼다.
그렇다면… 엘리자와 내가 므흣한 짓을 한 사이라면, 그녀의 알몸 정도를 보는 것은 결코 죄를 짓거나 나쁜 짓이 아니었다.
그것이 그녀의 허락을 받지 않은… 곤히 잠들어 있는 무방비 상태에서의 몰래 관찰이라 해도 말이다.
두근두근… 쿵쿵쿵….
갑자기 심장이 요동을 쳤다.
어찌나 크게 뛰던지, 엘리자가 듣고 깨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할짝….”
말라 버린 입술을 혀끝으로 살짝 적셨다.
어느새 거칠어진 호흡을 완전히 멈췄다.
조심스럽게 이불 밖으로 손을 빼냈다.
더욱더 조심스럽게 검지와 엄지를 이용해 엘리자가 덮고 있는 이불을 붙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스으윽….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조, 조금만 더… 조, 조금만….’
주문처럼 조금만을 되뇌며 0.001쯤 되는 밀리미터 단위로 이불을 들어올렸다.
수 초의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막 엘리자의 몸을 감싸고 있던 이불이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며 미친 듯이 머릿속에 그려지던 그림이 눈앞에 드러날 찰나!
뚜우….
그렇게나 또렷했던 정신의 전원이 그대로 꺼져 버렸다.
그리고 얼마 뒤에 꺼졌던 전원이 다시 들어왔다.
번쩍!
낯익은 천장이 보이는 데자뷔를 일으키면서였다.
‘씨X….’
….
생각하면 할수록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말짱하던 정신을 무작정 잃어버리고 말다니 말이다.
더 웃긴 건, 나는 분명히 정신을 잃었고, 깨어나서도 전혀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분명히 어떤 짓을 이어 나간다는 것이었다.
그게 그냥 관찰이든, 어떠한 행동이든 간에 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젠장!’
참으로 지랄 같고, 젠장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뭐,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뿐만 아니라 이곳에 들어온 모든 이들이 이와 똑같은 상황을 겪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다들 정신을 잃었고,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그렇고 그런 일을 했으며, 그렇게 일이 진행된 상태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또한, 이런 상황이 단지 므흣하고, 음란한 것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었다.
어떤 사고나 사건에 의해 던전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가령,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폭력을 행사하려 한다거나 더 나아가서는 목숨을 노리는 경우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는, 꽤 과잉보호적이라 볼 수도 있었는데, 물리적인 뭔가를 하기도 전에… 일정 수준 이상의 생각이나 앙심을 품어도 발동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이런 뭣 같은 상황에서 나는 엘리자와 강제적인 플라토닉 러브의 동거를 하며, 이곳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