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151)
사박사박….
열린 문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오는 이들은 모두 세 명이었다.
작고 어여쁜 소녀가 앞장을 섰다.
뒤로는 늘씬하고 아리따운 여인과 과한 후덕함을 자랑하는 남자가 함께였다.
화려하고, 부티가 잘잘 흐르며, 한 가족처럼 보이는 그들은 모두 우리가 아는 인물들이었다.
맞다.
어여쁜 소녀는 마리안느.
아리따운 여인은 로레나.
과하게 후덕한 남자는 리차드였다.
‘음… 분위기가….’
그동안 상대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살벌함이나 지랄 맞음 대신에 단란하고, 화목하고, 평온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느낌을 뽐내고 있지만, 분명히 그들이었다.
“주인님, 검을 내려 주세요.”
린이 부탁하듯 속삭였다.
살짝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아수라 스워드를 내렸다.
잠시 멈춰 섰던 이들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
절로 몸이 움찔했다.
분명히 티가 났음을 깨달았고, 쪽팔림에 얼굴이 화끈해졌다.
하지만, 바로 곁에 있던 린을 포함해 그 누구도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쩝….”
입맛을 살짝 다시고 일정 거리까지 다가온 이들을 주시했다.
3미터쯤 거리를 두고 서로를 마주했다.
흡사, 3:3의 매치 전 상황처럼 보이기도 했다.
누가 봐도 우리 쪽이 악당이었다.
압도적인 비주얼의 오식이가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직전까지 사투를 벌였던 우리의 꾀죄죄한 몰골과 꽃단장에 한껏 차려입은 것도 모자라, 더 없는 품위까지 내세운 그들과의 차이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과히 좋은 기분은 아니로군….’
슬며시 피어오르는 억울함을 느낄 즈음.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던 리차드가 대뜸 허리를 숙여 왔다.
꾸벅….
이어, 그를 따라 로레나도 기품 있는 동작으로 인사했고, 마리안느도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부끄러움을 살짝 발하며 얼굴을 붉혔다.
‘이 분위기는 뭐지?’
의아함이 넘쳤다.
의심도 가득했다.
그 와중에 인사를 받았다고 본능적으로 움찔하려는 몸뚱이를 억지로 자제시켜야만 하기도 했다.
‘쯧! 주책없기는….’
그러나 그대로 인사를 하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어진 상황들이 그러한 분위기로 진행됐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린이 나를 대신해서 인사를 한 덕분에 완전히 어색해지는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어쨌든!
어떠한 사전 정보도 없고, 뜬금없기까지 한 상황의 주는 ‘감사’였다.
당연히 상대방 쪽에서 우리에게 표하는 감사였고, 이유 또한 명백한 것이었다.
“마리안느의 탄생은 저희 부부에게 크나큰 축복이었습니다.”
차고 넘치는 이들에게 내려진 또 하나의 선물.
하지만, 축복이라 여긴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마리안느가 영문 모를 열병에 걸리며 저주는 시작되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전혀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딸이었다.
부부는 아이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온 나라를 샅샅이 뒤져 용하다는 의사를 불러들였고, 귀하다는 약재도 모두 공수했다.
그러나 차도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지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가 있었습니다.”
신을 모시며, 수행하는 사제라 했다.
우연히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고, 정성스러운 기도로 아이의 병을 고쳐보겠다며 부부를 회유했다.
그들 부부로서는 혹할 만한 일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만 하는 상황에 가릴 것이 어디 있었겠는가.
“의심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일단은 남자의 정체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또한, 난다긴다하는 의사도 손을 놓고, 고개를 가로젓는데, 고작 기도로 뭔가를 한다는 것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게다가 아프고 어린 딸 곁에 외간 남자를 둔다는 것이 문제였다.
“작은 방 하나를 내달라며, 그 안에서 혼자 기도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모든 문제와 의심을 날려 버릴 한방이었다.
밑져야 본전이었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기도의 의식을 시작한 지 이틀 만에 아이의 얼굴에 핀 열꽃이 사라졌습니다.”
놀라운 일이었다.
오랫동안 무슨 짓을 해도 전혀 나아질 기미조차 없던 병세가 겨우 이틀 만에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남아 있던 일말의 의심조차 모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부부에게 남자는 세상 누구보다 믿는… 지푸라기 내지는 실낱같은 기대나 희망이 아닌 튼튼한 동아줄 같은 믿음의 존재가 됐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기도의 힘을 높이기 위해서는 아이와 함께 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이미 기적을 체험한 상태였다.
기대와 희망에 부흥하는 믿음도 생겼다.
당장에 아이 곁에서 기도의 의식이 행해졌다.
효과는 탁월했다.
“그래도 완치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1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병마와 싸우던 고통스러운 3년의 세월과 비교하면 문제도 아니었다.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습니다. 그럴 수 없었습니다. 기적적으로 완치된 기쁨도 잠시 아이가 점차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안느가 완전히 회복되고 며칠 후, 남자는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온다간다는 말도 없었고, 무엇 하나 남긴 것도 없었다.
마치,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자리뿐만 아니라 애초부터 세상에 없던 사람인 듯했습니다.”
처음에는 감사를 전하기 위해서… 후에는 다른 의미에서 백방으로 그를 찾고, 수소문도 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그 누구에게도, 그에 관한 어떤 것도 듣거나 찾을 수 없었다.
완치된 마리안느가 이상 증세를 보인 것은 그로부터 얼마 뒤였다.
혼자 있기를 원했고, 대화조차 나누려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오랜 병마와 싸운 후유증 정도로만 여겼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애써 위안했다.
하지만, 상태는 갈수록 심각해졌다.
“또 다른 근심과 걱정에 괴롭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혼자 있을 아이의 방에서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즉시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방 안에는 아이 혼자만 있었다.
이후로도 몇 번이나 같은 일이 반복됐다.
그나마 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을 때는 혼자서 일인 다역을 한다고 여길 수도 있었지만,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는 상황에서는 이해도 되지 않았고, 소름도 돋았다.
그런 일이 자주 있게 되자, 끝내는 아이가 제 방문을 굳게 걸어 잠가 버리면서 상황은 더욱더 심각해져 버렸다.
“계속해서 남자를 찾았습니다. 헛수고였습니다. 아이의 상태나 상황도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습니다.”
굳게 닫힌 방문 너머에서는 두런두런하던 대화 소리를 넘어 어떤 때는 치고받고 싸우는 듯한 소리도 나기 시작했고, 정체불명의 괴상한 울음소리나 굉음도 들려왔다.
근심과 걱정에 견디다 못한 부부는 억지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실로 엄청난 것을 목격했다.
“방 안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있었습니다. 커다란 말이 있었고, 새와 토끼도 있었습니다. 끔찍하게 생긴 광대와 병정도 있었습니다.”
리차드의 말에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동시에 지금껏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눈에도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들이 시야에 잡혔다.
바로 바닥과 선반 등에 굴러다니는 조그마한 장난감들이었다.
알록달록한 상자에 구겨지듯 담겨 있는 용수철 광대의 머리통과 쓰러져 있는 병정 모양의 팽이.
보기에도 묵직해 보이는 강철 말과 나무로 깎아 만든 새 모양의 장식품.
한 쪽 귀가 뜯겨 나간 토끼 인형까지 모두 있었다.
“처음엔 무척이나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랍고, 끔찍한 광경에 이후로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습니다.”
일반인이라고 봐도 좋은 그들 부부가 거대화되고, 살아 움직이기까지 하는 장난감 괴물들을 보고서 얼마나 놀랐을지는 바로 짐작이 됐다.
그러나 그들 부부를 진짜로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마리안느였다.
마리안느는 침대에 서 있었다고 했다.
온몸을 축 늘어뜨린 이상하면서도 끔찍한 모습으로 말이다.
그 모습이 어디선가 본 듯했다고도 했다.
그것을 떠올렸을 때, 마리안느의 머리와 양팔, 그리고 양다리에 연결된 금색의 실을 발견했다.
더불어 금색의 실을 따라 시선을 들자 눈에 들어온 거대한 손까지도 말이다.
“그 남자의 손이었습니다. 현실을 직시한 순간 깨달았습니다. 우리 마리안느가 그자의 꼭두각시… 마리오네트가 됐음을 말입니다.”
리차드의 예상은 옳은 것이었다.
믿음의 동아줄인 줄 알았던 것이 저주받은 꼭두각시의 줄이었던 것.
당장에 사랑하는 딸을 구하고, 이 어처구니없으며, 끔찍한 상황을 벗어나야만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남자의 경악스러운 마수는 순식간에 그들 부부와 저택의 모든 이들에게로 뻗쳤고, 제 마음대로 조종하기에 이르렀다.
“오랜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자에게 조종당하는 우리를… 불쌍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해 줄 은인이 나타나기를 매일 같이 빌고 빌었습니다.”
리차드가 울컥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러더니 다시금 깊이 허리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로레나와 마리안느도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번에는 나도 예의를 갖춰 감사의 인사에 답했다.
….
이렇게 저주받은 저택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모두 알게 됐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건 그 어디에도 적혀 있거나 공유되지 않는 것이었다.
아니, 절대 그 누구도 얻을 수 없는 정보였고, 그 누구도 알지 못할 얘기였다.
왜냐고?
이런 결과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이나 상황이 사실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일단, 모든 이들은 마리안느와의 교전이 시작되면, 그녀를 향해 끊임없이 공격을 날릴 게 분명했다.
던전의 클리어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정보와 공략법이 그렇게 하도록 말하고 있으니까.
나 역시 그런 마음이었고, 그럴 생각이었다.
마리안느를 공격하지 말아 달라고 린이 애원하는 일이 없었더라면… 하물며, 중간에도 마음이 흔들릴 정도였으니, 무조건 남들처럼 공략법을 따랐을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바로 게임은 끝이었다.
마리안느를 물리치고, 이내 등장한 마리안느 코어까지 부수면, 저주받은 저택 던전을 완전히 클리어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뒤의 얘기는 없는 것이었다.
혹시나 어떠한 사정이나 이유로 마리안느를 공격하지 못해 거대한 손이 등장하는 상황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뭐, 조건이나 상황이 지랄 맞은 탓에 현재까지 밝혀진 바가 없고, 앞으로의 가능성마저도 극도로 희박해 보이지만, 어쩌다 보니까 거대한 손을 등장시키게 됐다고 하자.
아니, 양쪽 손을 모두 쓰러뜨리는 데까지 성공했다고 치자.
그 뒤로 이어지는… 진심 아무런 맥락도 없어 보이는 기다림은 어쩔 것인가?
바로 끝을 볼 수 있는 마리안느 코어를 부수지 않고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은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뭐, 거기까지도 좋다.
맥없는 기다림 끝에 굳게 닫힌 방문이 열리며, 리차드와 로레나 그리고 마리안느가 등장하는 데까지 왔다고 하자.
또, 놀람과 당황의 순간도 넘기고, 그들의 인사까지 받았다 치자.
이후에 줄줄이 늘어놓는 리차드의 설명은 어찌 알아들을 수 있을까?
나처럼 리스닝이라는 스킬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건….”
몇 번이나 감사의 인사를 하던 리차드가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검은색 상자였다.
이게 뭐냐는 뉘앙스를 풍기며 고개를 갸웃했다.
“…??”
“갚을 길 없는 크나큰 은혜의 약소한 보답이라고 여겨 주십시오.”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상자를 받았다.
바로 뚜껑을 열어 확인하려는데, 그들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왔다.
어영부영 인사를 마쳤고, 이내 그들은 조용히 사라졌다.
“….”
잠시 멍을 때렸다.
“주인님.”
“…??”
“이제 마무리를 할 시간입니다.”
린이 흐뭇하게 웃으며 옆으로 시선을 던졌다.
마리안느의 코어가 눈에 들어왔다.
“아….”
바로 오식이를 향해 턱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