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145)
순간, 혼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다리에 힘이 저절로 풀렸고,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며 오식이를 쳐다봤다.
구부정한 몸에 늘어진 팔로 미동조차 없이 서 있는 오식이였다.
추우욱….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그러나 무엇부터 해야 할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몇 초 간 그렇게 멍하게 있었다.
그런 나를 대신하듯 린이 먼저 반응했다.
“오, 오식 씨….”
린도 무척이나 놀란듯했다.
확실하게 떨리는 음성이 그랬고, 머뭇거리며 크게 움직이지 못하는 게 그래 보였다.
그때였다.
미동조차 없던 오식이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돌았다.
우리를 향해서였다.
울컥!
녀석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가슴이 울렁거렸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처참하고, 안타깝고, 불쌍하다는 감정이 먼저 치솟았기 때문이었다.
오식이와 눈이 마주쳤다.
다시금 울컥하려던 찰나, 멍해짐과 의문의 물음표가 동시에 날아들었다.
“…??”
나를 향한 오식이의 눈 모양이 웃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잘 못 본 줄 알았다.
하지만, 더욱더 확실하게 웃음 짓고 있는 입가를 확인하고는 그제야 내가 녀석에게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허….”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틈을 타고 녀석이 먼저 입을 놀렸다.
“내가 이겼다. 크크큭!”
다시금 나가 버렸던 정신이 확 돌아왔다.
폭발하는 감정에 꽥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런 미친놈아! 깜짝 놀랐잖아!”
과한 격함에 ‘삑사리’가 난무했다.
털썩….
린이 제자리에 주저앉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면, 녀석은 아마 나한테 맞아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상황과 감정을 추스르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와 린을 혼란에 빠뜨렸던 오식이의 장난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고, 그 때문에 회복과 마무리가 빨라질 수 있었다.
“강했다. 그래도 버텼다.”
강철 말과 부딪치는 순간, 오식이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그만큼 강렬한 충격을 받은 것이다.
‘하긴….’
눈을 감아 버린 탓에 볼 수는 없었지만, 고막을 자극하던 굉음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부분이었다.
놈의 레벨이 39이긴 하지만….
저택 4층에 도전하는 이들의 최소 레벨이 45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레벨이 48이긴 하지만….
놈의 일격 필살에 가까운 몸통 박치기는 정말로 강렬한 것이었다.
보통…. 그러니까 평범한(?) 각성자들은 놈의 몸통 박치기에 대부분은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놈의 공격을 방어하거나 버틸 수 있는 스킬이 없는 린은 말할 것도 없고, 웅크리기 스킬을 가진 나도 그 충격을 감당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나마 오식이니까 버틸 수 있었다는 얘기다.
놈의 거대한 덩치 탓에 딱히 피할 곳도 마땅치 않다.
어떻게든 최소한의 충격만으로 버텨야만 하는 상황.
정말로 재수가 없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고, 나가떨어짐이 과하다 보면 먼저 상대했던 회차의 괴물과 다시 싸워야 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해서, 저택 4층을 클리어 하기 위한 조건에는 다량의 회복 물약과 나름으로 몸빵이 되는 이들이나 숙련도 높은 방어 스킬을 장착한 이들이 필수로 따라붙었다.
“회복 물약은 안 마셔도 되겠어?”
“아직은 괜찮다.”
“흠… 그럼 육포라도 좀 먹든가.”
“그건 좋다.”
화색을 발하는 녀석에게 육포를 건넸다.
“우물우물… 쩝쩝… 맛있다!”
맛있게 육포를 뜯은 오식이가 신을 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몸을 풀었고, 살짝 비장한 표정을 지은 뒤, 앞으로 나섰다.
“정신 바짝 차려.”
“안다. 두 번의 방심은 없다.”
오식이는 굳은 의지와 단호함을 내비쳤다.
고오오오오….
두 번째 강철 말이 묵직한 위용을 자랑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
“후아아… 끝났네요. 오식 씨, 수고하셨어요.”
열 번째 강철 말의 공격을 막아낸 오식이를 향해 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치하했다.
오식이가 제 팔뚝을 이리저리 주무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냉정함을 내비치며 말을 뱉어 냈다.
“아직 긴장들 풀지 마.”
“크륵?”
“왜 그러시죠?”
오식이와 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한 번 더 오식이가 나선다. 또다시 놈이 나올지도 모르잖아.”
“아아….”
내 말을 알아들은 린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회복 물약부터 좀 마시도록 해.”
“알았다.”
조금 늦게 의미를 알아챈 오식이도 곧장 내 말을 따랐다.
“벌컥벌컥… 꿀꺽꿀꺽!”
회복 물약마저 맛나게 마셔대는 오식이를 보다가 복도의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이, 설마… 놈이 연속으로 나오는 건 반칙이지….’
또다시 강철 말이 나올지도 모를 상황을 억지로 부정하며 7회차에 들어갔다.
일진이 그리 사납지는 않았는지, 걱정과 우려를 씻어 주듯 다른 놈이 나타났다.
“끼이익!”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등장한 놈은 36레벨의 ‘다리 없는 새’였다.
“좋아! 린, 네가 맡도록 해!”
“네, 주인님!”
린이 힘차게 대답하고는 오식이와 자리를 교대했다.
거의 동시에 놈이 날개를 활짝 펴고 빠르게 날아들었다.
쐐애애애액….
타이밍에 맞춰 린이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목표를 잃은 놈이 날개를 파닥이며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재차 날갯짓을 하며 위로 솟구쳐 올랐다.
파다다닥….
그 모습이 너무나 불편해 보였다.
갑작스러운 감속과 방향 전환은 놈에게도 무리가 있었던 것.
이미 많은 이들로 인해 드러난 놈의 치명적인 약점이자 공략법이었다.
“이야압!”
린의 먼지떨이가 놈의 몸뚱이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퍼어어억….
빵빵하게 속이 찬 베개가 터지듯 온몸의 깃털들을 대량으로 폭발시킨 놈이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나이스!”
화끈하고, 깔끔하게 놈을 처리한 린을 향해 찬사를 날렸다.
린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자자, 후딱후딱 끝내자고!”
“네, 주인님!”
어렵지 않게 다리 없는 새를 공략하며 7회차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
정말로 일진이 나쁘지 않은 날이었던 모양이다.
신의 가호를 받으면 0회, 행운이 따르면 1회 미만, 엎어져도 코가 깨지는 날은 2회 이상… 뭘 해도 안 되는 인간은 줄줄이 사탕으로 나온다는 강철 말이 더는 나오지 않았다.
8회차는 용수철 광대가 나왔다.
당연히 내가 나섰다.
9회차는 다시 다리 없는 새가 나왔다.
린이 도맡아서 처리했다.
10회차에서 한 쪽 귀가 없는 토기가 등장하더니만, 11회차도 놈이 우리를 맞이했다.
나와 린이 교대해 가며 적당히 상대했다.
“나도 한다!”
중간에 몇 마리는 오식이가 날려 버렸다.
“이거 진짜 운이 좋구만?”
앞선 실수를 생각지 않은 채 대놓고 기뻐했다.
이제는 말로써 운빨이 뒤집히거나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자, 마지막이다. 다들 기억하고 있지?”
“안다. 가자, 형님!”
린보다 오식이 녀석이 먼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하고는 오른쪽 팔을 빙빙 돌리며 어깨 근육을 풀었다.
그 모습에 활짝 웃었다.
이번에도 짜 놓은 계획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대견해서였다.
“주인님, 저도 준비되었습니다.”
린에게도 따스한 미소를 건넸다.
쿵쿵….
오식이가 선두에 섰다.
다음으로는 린이 자리했고, 끝자리는 내 차지였다.
“고!”
내 외침에 오식이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
나선형 복도의 나머지 50미터 구간.
마지막 12회차는 랜덤 등장의 룰이 깨지며, 단 하나의 괴물만이 출현한다.
아차차….
두 마리가 동시에 나오니까, 복수를 사용해 괴물들이라 불러야겠군….
아무튼.
놈들의 레벨은 마지막인 것에 걸맞게 복도 내에서 등장하는 괴물들 레벨의 최고치인 40레벨이었다.
그것도 두 마리 모두 다 말이다.
고오오오오오….
강렬한 기운의 아우라를 뽐내며 놈들이 나타났다.
강철 말처럼 5미터 앞이 아닌 1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였다.
우아우아….
블링블링….
화려하기 그지없는 복장에 기품 가득한 자태마저 풍기며 나타난 놈들은 다름 아닌 리차드와 로레나였다.
“흠….”
저택 2층에서 처음 만난 로레나는 30레벨이었다.
저택 3층에서 등장한 리차드는 35레벨이었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리차드와 로레나는 모두 40레벨이다.
그다지 한 것도 없어 보이는 것들이 건물 한 층 올랐다고 레벨이 껑충 뛰어오르다니… 겁나 불공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자세히 따지고 보면 또 그렇지도 않았다.
분명히 레벨은 올랐다
그로 인한 능력치의 상승도 있었다.
하지만, 놈들을 상대하면서 까다로웠던 부분… 로레나의 기품의 아우라와 리차드의 재력 과시 등이 사라졌다.
해서, 오히려 다운그레이드됐다고 보는 게 옳았다.
쿠웅!
리차드와 로레나의 정면에 황금빛 방벽이 나타났다.
재력의 방벽과 색이나 모양새가 똑같아 보였지만, 크기와 두께는 훨씬 작았다.
탁!
보이지 않는 황금빛 방벽 너머에서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방벽이 우리를 향해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다.
쿠쿠쿠쿠쿠쿠쿠….
피할 곳은 없었다.
묵직한 소리도 그렇고, 빠르기도 상당했다.
그러나 앞서 지랄이라 여기며 걱정하던 강철 말의 돌격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것이었다.
부웅부웅….
휘이익!
앞서 있던 오식이가 빙글빙글 돌려대던 주먹을 힘차게 뻗었다.
콰아아아아아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황금빛 방벽이 산산이 부서졌다.
금화의 폭발이나 방벽의 복구는 없었다.
방벽이 부서지며, 다시금 리차드와 로레나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동시에 린이 움직였다.
타앗! 탓! 탓….
자세를 한껏 낮춘 린이 엄청난 속도로 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잇!”
로레나가 황급히 검정 부채를 빼 들고는 린을 향해 휘둘렀다.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좋아! 잘하고 있어.’
원래라면, 방벽이 부서진 후에는 로레나의 깃털 공격이 이어져야만 했다.
10미터 거리에서 자유자재로 날아드는 깃털 공격은 솔직히 부담스럽고, 귀찮을 수밖에 없었다.
해서, 빠르게 다가가 거리를 좁혀 애초에 쓰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 공략의 주요 포인트였고, 제 역할을 멋지게 해낸 린이었다.
파앗! 타앗! 그그극….
로레나의 검정 부채와 린의 빗자루가 격렬하게 부딪쳤다.
40레벨로 오른 덕에 로레나의 움직임이나 공격이 확실히 전보다는 매서웠다.
하지만, 48레벨의 린도 만만치 않았다.
조금도 물러서거나 거리를 벌리지 않은 채 로레나를 상대했다.
이 역시, 모두 작전의 일환이었다.
“으으으….”
린과 로레나의 격렬한 부딪침을 근처에서 쳐다보는 리차드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뭔가를 해야만 하는데, 전혀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택 3층에서도 그랬지만, 리차드의 유일한 공격은 돈 자루 떨어뜨리기였다.
리차드는 여기서도 그 짓거리를 했다.
다만, 돈 자루의 크기가 현저하게 작아지고, 그 숫자도 명백히 줄어든다.
돈 자루의 타깃은 역시나 리차드의 시선이 닿는 곳이나 인물이었다.
지금은 가장 가까이 있는 적인 린에게 꽂혀 있는 상태.
하지만, 로레나와 바짝 붙어 있다시피 한 까닭에 오히려 안전지대에 있는 격이나 마찬가지였다.
앞서 말했듯이 계획의 일환이자, 제대로 맞아떨어진 결과였고, 또 다른 작전을 위한 포석이었다.
끼이이익….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가늘게 뜬 눈을 사용해 확실하게 정조준까지 하고는 시위를 놓았다.
팅!
쐐애애애액!
한 발의 화살이 거침없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갔다.
퍼어어억!
통쾌한 소리와 함께 안절부절못하던 리차드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고, 이내 육중한 몸뚱이가 뒤로 넘어갔다.
쿠우우웅….
갑작스러운 남편의 죽음에 로레나가 흔들렸다.
“이이잇!”
분노를 감추지 못했고, 린을 향해 더욱더 거칠게 부채를 휘둘렀다.
그에, 살짝 뒤로 물러난 린이 무덤덤한 투로 말했다.
“그만 끝내겠습니다.”
촤아아아악….
린의 빗자루가 반원을 그렸다.
빗자루의 궤도에 로레나의 목이 걸려 있었다.
스스슥….
툭….
데구르르….
깔끔하게 잘린 로레나의 얼굴이 바닥을 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