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118)
의심 속에 론이 코바타를 피우는 동안, 차크무트가 말을 이어 갔다.
“코바타는 다그블들이 비밀리에 재배하는 식물입니다. 다 자란 코바타의 잎을 말려 종이에 싼 것이 바로 저것이지요.”
내가 아는 담배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는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동쪽 대륙의 작은 도시인 초난 태생입니다. 아버님은 초난의 성주셨죠.”
갑자기 전환된 차크무트의 자기소개.
‘뭐야? 금수저였어?’
살짝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카므스의 고향 마을은 이곳 마부투처럼 다그블들에게 침략당했다.
마을은 쑥대밭이 됐고,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다.
성주인 카므스의 아버지는 항복을 선언했고, 다그블은 카므스를 볼모로 데려갔다.
“볼모라지만, 거의 포로… 아니, 노예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매일 같이 노역에 시달렸고, 이유 없이 채찍을 맞아야 했습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던 곳에서 몇 년이나 버티던 카므스는 우연히 탈출의 기회를 얻게 됐다.
“제가 갇혀 있던 곳을 관리하던 다그블 중에 몰래 저를 챙겨 주던 놈이 하나 있었습니다.”
“…??”
뭔가 이상해서 바로 반응했다.
자신을 챙겨 주던 이에게 놈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부분이었다.
내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차크무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엔 다그블 중에도 마음씨가 착한 자가 있구나 하며, 고맙게 여겼습니다. 참으로 바보 같았죠.”
“….”
“그러다 소문을 듣게 됐습니다. 그놈이 이상한 취향과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었죠.”
“…??”
“놈은 어리고, 예쁘장하게 생긴 루파(전사 오크)를 좋아하고, 밤마다 몹쓸 짓을….”
“자, 잠깐!”
차크무트의 말을 급히 끊었다.
도무지 그냥 넘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갑작스러운 외침에 차크무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혀로 입술을 한 번 축이고는 말했다.
“놈의 취향이 예쁘장하고, 어린 오크였다고요?”
“그렇습니다.”
“루파는 전사 타입… 남자 오크를 말함이죠?”
“네, 그렇습니다.”
“그런 놈이 당신을 몰래 챙겨 줬고요. 그죠?”
“네.”
“왜요?”
어이가 없었다.
살짝 발끈하기까지 하며 왜냐고 물었다.
그에, 차크무트가 오히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왜라니요?”
“그니까, 왜요?”
“이전에 저와… 그러니까, 이렇게 변화하기 전의 저와 만나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있다.
그래서 이렇게 더 발끈하고, 기가 차서 묻는 게 아니겠는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차크무트는 피부색이 좀 적응이 안 돼서 그렇지, 생김새는 그럭저럭 볼만했다.
물론, 다른 오크들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지, 까놓고 말해서는 어디 다가 내놔도 낯부끄럽고, 한참이나 떨어지고도 더 떨어져야 할만한 수준이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흉측함과 더불어 못생김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오크인데 말이다.
그런 차크무트의 카므스 시절은 다들 알다시피 더욱더 가관이었다.
막말로 오식이가 더 유하고, 착해 보일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렇게 대놓고 헛소리를 한다고?
정말이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이런 내 속사정… 아니, 누가 들어도 어이없을 상황에서도 차크무트는 뻔뻔하고, 당당하게 계속해서 헛소리를 작렬해댔다.
“그때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리고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는 조금 부끄럽지만, 제가 좀 예쁘장한 얼굴이죠. 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티가 난다고나 할까요? 하하하!”
씨바….
지금 당장 이 새끼의 지랄 같은 주둥이를 꿰매 버릴까?
아니면, 목을 확 비틀어서 죽여 버릴까?
오크의 평화로운 역사니, 위대한 왕이니,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냥 다 엎어 버리고 깽판 한 번 오지게 내 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진심, 뭐라도… 어떻게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싸우면 진다는 것을 뻔히 알기에 참아야만 했다.
해서, 잠시 다른 곳으로 화살을 돌렸다.
“그럼, 얘는요? 이 녀석 얼굴은 어떻습니까?”
옆에 있던 오식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난데없이 지목당한 오식이가 움찔했다.
차크무트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오식이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미르다스 씨 정도면 훈남 축에 들지요. 모르긴 몰라도 여러 로틴(여자 오크)들의 마음을 뒤흔들었지 싶은데요.”
차크무트의 진지한 얼평에 다시금 말문이 막혔다.
오식이가 답례랍시고 똑같이 헛소리를 지껄였다.
“과찬이십니다. 여럿은 아니고, 한둘 정도? 뭐, 그렇습니다. 하하!”
이런, 염병….
꼴값들을 떨고 있네!
당장에 자리를 박차고서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더는 이것들과 말조차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고, 시간도 없기에 또다시 꾹꾹 참아내야만 했다.
모든 본능과 감정을 다스리는 진화한 이성… 지적 생명체의 위대함을 제대로 보여 주겠다는 일념하… 는 개뿔!
짜증에 인상까지 구기고는 하던 말이나 계속하라 재촉했다.
“하아… 뭐, 됐고! 그래서요? 그 변태 같은 놈이랑 저 코바탄지 뭐시긴지랑 무슨 상관인데요?”
내 짜증 섞인 재촉에 차크무트가 설명을 이어 갔다.
“어느 날 밤, 놈이 저를 자신의 방으로 몰래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짓을 하려 했죠. 당연히 거부하고, 반항했습니다. 그러다 놈을 죽이게 됐죠.”
카므스에게 도망을 쳐야 할 명분과 기회가 생겼다.
놈의 옷을 걸치고, 다그블들의 눈을 피해 탈출했다.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도망쳤습니다. 이미 입은 상처도 많았지만, 도망치는 중에 구르고 떨어지며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죠. 그러다 이곳 마부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차크무트의 얘기가 끝났다.
정작 말해 줘야 할 코바타에 관한 것은 빠져 있었다.
“뭡니까?”
“네?”
“아니, 지금 코바타가 뭔지 설명해 주는 것 아니었습니까?”
“아! 그렇지요? 죄송합니다. 말이 옆으로 샜군요.”
순간,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었다.
더불어….
‘이런 놈이 오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라고?’
또 한 번 역사적 왜곡을 의심했다.
“우연히 집어 든 놈의 옷 속에 몇 개비의 코바타와 씨앗이 든 주머니가 들어 있었던 것은 또 다른 우연과 행운이었습니다.”
차크무트가 말을 마치고서 다시금 틈을 줬다.
그러더니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이제 막 코바타를 다 피운 론을 향해서였다.
“론의 힘과 전투력이 얼마쯤 되는지는 이미 알고 계시리라 봅니다. 마르다스 씨는 말할 것도 없고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띤 차크무트가 오식이와 론을 앞으로 불러냈다.
앞선 말들과 돌아가는 상황에 그가 무엇을 하고, 보여 주려는지 얼추 감이 잡혔다.
‘뭐야? 설마, 코바탄지 뭔지를 피우면 힘이 세진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내 예상은 적중했다.
차크무트는 오식이와 론에게 양손을 맞잡으라 하고는 힘겨루기를 시켰다.
코웃음을 치던 오식이가 단번에 손목과 팔이 꺾이며, 바닥에 주저앉은 것은 힘겨루기가 시작된 지 불과 5초도 되지 않아서였다.
“헐….”
내 반응에 차크무트가 씨익 하고 웃었다.
“선천적으로 다그블이 샤그란보다 강함을 타고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수적인 열세는 분명히 있었죠. 그것을 뛰어넘고, 그리느브래크를 점령한 결정적 요인이 바로 이 코바타입니다.”
그랬다.
그저 기호 식품인 담배와 다름없을 것 같던 코바타는 신체적 능력을 대폭 증가시켜 주는 놀랍고도 신비한 ‘버프템’이었다.
‘무슨 이런 사기템이 다 있어?’
있을 수 있다.
더한 것도 수없이 많을 터.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쉽게 믿을 수 없고, 이해도 잘 안 되지만, 그런 것들이 차고 넘칠 정도였다.
카므스가 혼자서 마부투의 목재 건축물들을 뚝딱뚝딱 만들어 낸 것도 코바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파스트는 물론이고, 세타니에게까지 비밀로 하며, 그만의 장소… 그와 처음 만났던 숲 너머의 비밀 장소에서 코바타를 재배까지 했다.
사고로 머리를 다치면서 코바타에 관한 것을 대부분 잊었지만, 비밀의 장소와 그것을 남몰래 키워야 한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오늘의 사건이 발생했다.
놈에게 피 떡이 되도록 처절하게 당하고, 마지막 일격에 머리를 다치면서 그의 기억이 돌아왔다.
우연이고, 행운이었다.
신녀의 운명과 재능을 타고난 세타니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뭔지도 모르면서 한 개비의 코바타를 늘 품에 지니고 다녔던 것도 우연이며, 행운이었다.
거기에 진화 내지는 각성까지….
정말이지 말도 안 될 우연과 우연들이 겹치고, 행운과 행운이 쌓여 엄청나고 놀라운 일을 만들어 냈다.
게다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다그블들로서는 지랄 같은 불운을….
샤그란들에게는 진정한 축복과 행운을 가져다줄 역사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봐야 했으니까.
….
“와우….”
코바타의 효능은 정말로 놀라웠다.
론이 오식이를 가뿐하게 제압한 뒤, 자진해서 코바타를 시연한 파스트.
지팡이 없이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그가 허리를 곧게 펴고 일어났다.
거기에 고난도의 텀블링까지 여유롭게 해댔다.
더불어 일반 오크인 그가 전사 타입인 비그와 리트를 상대로 전혀 힘에서 밀리지 않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허허허! 이렇게 신통방통할 수가 있나. 하긴, 나도 소싯적엔 힘깨나 쓴다고 소문이 나서 추파를 좀 받았지.”
회춘의 경지를 체험한 파스트가 앙상한 몰골의 근육을 자랑하며 더없이 신을 냈다.
‘그나저나 이것들은 왜 하나 같이 씨알도 안 먹힐 자랑질이야?’
다른 의미에서 못마땅함이 가득했지만, 어쨌든 코바타의 효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효능의 코바타지만, 단점… 뭐, 단점이라 딱 꼬집어서 단정 짓기는 뭐한, 약간의 문제점도 있었다.
지속 시간과 재사용 시간이 바로 그것이었다.
“코바타의 지속 시간은 약 12시간쯤 됩니다. 현재 몸 상태에 따라 지속 시간이 좌우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사실, 혼자서만 사용하며 얻어 낸 측정 결과라 확실치는 않습니다.”
또한, 한 번 코바타를 사용하면, 하루 정도는 재사용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뭐, 다시 피우는 거야 마음대로 할 수 있겠지만, 바로 역효과가 나기에 사용하지 않는 게 좋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될 듯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머리가 아프고,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릅니다. 정말이지, 죽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지요.”
차크무트가 치를 떨며 말했다.
이어진 ‘고기를 보고도 구역질이 난다.’라고 했던 표현이 가장 마음에 와닿았고, 심각성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
회의… 를 빙자한 코바타의 시연이 끝나고, 각자 준비의 시간을 잠시 갖기로 했다.
차크무트는 필요한 만큼의 코바타를 챙기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파스트는 마부투의 다른 이들에게 상황을 알려 주겠다고 하며 나갔다.
그런데 그의 표정과 의미심장한 미소가 왠지 회춘한 자신의 모습을 자랑하러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설마, 저러다가 아들 하나 낳겠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가 사람을 잡을 것 같은 느낌이 좀처럼 떠나질 않았다.
론 일행과 세타니는 옹기종기 모여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쟤들은 뭐를 하기에 저리 속닥거리는 거야?”
기대라고는 없던, 혼잣말에 가까운 물음이었다.
하지만, 오식이가 바로 답을 해 줬다.
“전사의 상징을 새기려 한다.”
“엥? 네 발바닥에 있는 그거?”
“그렇다.”
“야,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거였어?”
의아함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가문이 어쩌고, 순수 혈통이 어쩌고 하더니만, 어째 말이 맞지 않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것들이 지금 대놓고 신분 세탁을 하겠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