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117)
놈이 아수라 스워드를 앞세우고 우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던 그때….
번쩍!
우리의 등 뒤에서 강렬한 빛이 번쩍였다.
당연히 깜짝 놀랐다.
“헛!”
“앗!”
“크륵!”
너나 할 것 없이 놀람의 반응을 보이고는 번쩍임의 이유를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기도 전.
번쩍임만큼이나 강렬한 바람이 나와 린을 스치고 지나갔다.
휘익!
이어, 우리를 스치고 지나간 바람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콰과과과과과과과….
우리를 향해 다가서던 놈을 덮치고, 한참이나 뒤로 밀어내면서였다.
“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놈과 바람이 부딪친 자리에서부터 시작된 지면의 상처….
마치, 도로 위의 스키드 마크를 연상시키는 뚜렷한 흔적과 그 끝에서 휘몰아치는 엄청난 흙먼지 폭풍의 장관 때문이었다.
“끝났구나….”
카므스의 변화의 끝.
놈과의 치열한 승부의 끝.
두 가지의 의미를 모두 담아 작게 흘려 냈다.
“….”
조용했다.
나도 린도 가만히 숨을 죽인 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강렬했던 바람과 지면의 흔적.
엄청난 흙먼지 폭풍을 일으킨 직전의 과정과 비교해 이어진 상황은 너무나 조용하기만 했다.
부르르….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오한과 소름을 동반한 떨림이었다.
거의 몰살 직전까지 우리를 내몰았던 지랄 같던 놈의 싱거울 만큼 허무한 죽음.
그게 가능할 정도로 벌어진 격차의 존재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잠시 후.
뿌옇게 일었던 흙먼지를 뚫고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것이 누구인지는 뻔한 일이었다.
‘카므스… 아니, 차크무트….’
그가 우리 앞에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
그를 보자마자, 확실히 깨닫고 인정했다.
2미터 30센티미터가량의 키.
이마에 새겨진 뚜렷한 증표.
더불어 단단한 강철을 연상케 하는 빛나는 잿빛의 피부색까지….
‘흠… 진짜 갑옷인 줄로만 알았지, 피부색이 잿빛일 줄은 상상도 못 했네.’
약간의 오해가 있기는 했지만, 그는 오식이가 말한 차크무트 바로 그 자체였다.
“카므스!”
등 뒤에서 세타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다닥거리는 뜀박질과 다소 격렬한 포옹의 시간이 잠시 이어졌다.
“아, 오식 씨….”
린이 이제야 생각난 듯 오식이를 찾았다.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오식이에게로 시선을 주며 차분하게 말했다.
“괜찮을 거야.”
그러리라 여겼다.
아니, 그러리라 믿고 있었다.
오식이가 놈에게 처맞고 쓰러졌을 당시에는 흥분을 이기지 못할 만큼 걱정했었다.
그러다가 나도 놈에게 처맞고서 나가떨어졌지만….
이후에는 아무런 징후가 없기에 나름으로 안심했다.
만약, 녀석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신비한 목소리가 먼저 그것을 알려 왔을 터였다.
그때… 냥이에게 일이 벌어졌을 때처럼 말이다.
“네?”
린의 반문을 뒤로하고는 확인 차 오식이의 카드를 띄우고 프로필을 열었다.
역시나 카드와 프로필 모두 별다른 이상이나 문제가 없었다.
조금 더 안심했다.
“그래도 확인은 필요하겠지?”
린과 함께 오식이에게로 갔다.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나도 모르게 조바심이 생겨났던 모양이다.
괜한 짓이었다.
“흠….”
“진짜 괜찮은 것 같네요.”
평소처럼 드르렁거리며 코를 골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숙면 모드에 들어간 오식이를 보며 린이 안심의 미소를 지었다.
….
오식이뿐만 아니라 론 일행들과 파스트도 모두 무사했다.
중상자도 있었지만, 신녀로 거듭난 세타니의 기도에 모두 치유될 수 있었다.
그들 하나하나를 살핀 세타니가 내게로 왔다.
“아프지? 내가 기도해 줄게.”
“응.”
세타니에게 퉁퉁 부은 얼굴을 내밀었다.
내 볼에 자그마한 손을 가져다 댄 세타니가 눈을 감고 기도했다.
고오오오오….
따스한 기운이 얼굴 전체를 감싸더니만, 이내 시원한 기운이 느껴졌다.
곧 순식간에 통증과 부기가 사라졌다.
“와우! 끝내준다.”
“히히! 그치? 나도 놀라는 중이야.”
“하하! 너 좀 멋진 듯!”
세타니의 웃음에 나도 미소를 지었다.
외형상으로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세타니였다.
그러나 치유 능력을 발휘하는 기도를 올릴 때의 모습이나 진지한 분위기 등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방금 봤다시피 기도의 효과와 효능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하아….”
환하게 웃던 세타니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심각한 얼굴을 했다.
고개를 갸웃하며 왜 그러냐 물었다.
더 깊은 한숨을 내쉰 세타니가 세상을 다 잃은 듯이 말했다.
“하아아… 와투루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 건 너무나 좋은데….”
“그런데?”
“파스트님이 말하기를 이제 세타니는 카므스와 절대로 결혼하지 못한대. 신녀는 그래야 한다나?”
“아아….”
“그게 너무나 슬퍼.”
말을 하며 울먹이던 세타니가 끝내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뭐라 위로를 해 줘야 했지만,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해서, 그냥 안아 주고 토닥여 주는 것으로 세타니를 달랬다.
그러던 중, 저쪽에서 린과 오식이가 다가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인기척을 들은 세타니가 급히 내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더니 빠르게 눈물 자국을 지우면 말했다.
“난 이만 가 볼게.”
“어, 어…. 그래.”
세타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막 돌아서려다가는 다시 나를 쳐다봤다.
“응? 왜 그래?”
대답 대신 목 뒤로 양손을 꼼지락거린 세타니가 이내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이거….”
“이게 뭐지?”
물음과 함께 세타니의 손에 들린 것을 살폈다.
엄지손톱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붉은 돌이 달린 목걸이였다.
“너 줄게.”
괜찮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세타니는 억지로 내게 목걸이를 넘기고는 바로 돌아서서 부리나케 뛰어갔다.
중간에서 마주친 린이 인사를 건넸지만, 듣는 척도 하지 않고서 도망치듯 내달렸다.
어깨를 으쓱해 보인 린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주인님, 파스트 님께서 다들 모이라고 하십…. 어? 그게 뭐죠?”
“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목걸이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서둘러 파스트의 집으로 향했다.
“오식아….”
걸음을 옮기는 중에 오식이에게 물었다.
“차크무트는 결혼을 안 했어?”
“그럴 리가… 그는 위대한 왕이다. 후손을 남겨야 한다.”
“그래?”
“그렇다, 그는….”
“…??”
말을 하려다 마는 오식이를 쳐다봤다.
녀석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계속 쳐다보자 녀석이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
“흠흠! 그는 정말로 대단한 왕이다. 30이 넘는 부인과 53이나 되는 전사를 낳았다.”
“헐… 자식이 53명이나 됐다는 거야?”
녀석이 멈칫하고서 다시 말한 ‘정말로 대단한 왕’이라는 의미를 단번에 깨달았다.
이건 뭐, ‘정자 왕’을 넘어선 ‘정자 대왕’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나의 놀람과 깨달음은 너무 이른 것이었다.
“루파… 전사만 53이다. 역사에 정확히 기록되지 않은 챠큰(일반 오크)과 로틴(여자 오크)을 더하면 훨씬 더 많다.”
할 말을 잃었다.
전성기의 대부분을 다그블 토벌에 바쳤다고 하더니만, 뭔가 큰 역사적 왜곡이 있지 않았나 싶었다.
‘휴우… 우리 세타니 불쌍해서 어쩌냐?’
신녀는 평생을 차크무트 곁에서 살았다고 했다.
당연히 신녀의 본분과 사명을 띠고서였다.
아직 어려서 일수도 있지만, 사랑하고 결혼까지 생각했던 남자의 곁에서 평생을 마음으로 보필하는데, 정작 그 남자는 수십의 아내와 100은 족히 넘을 자식까지 낳고 산다니….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눈시울마저 뜨거워지려 했다.
‘하, 차라리 내가 데려갈까?’
오지랖과 동정심도 있었지만, 세타니의 치유 능력도 탐이 났다.
그런 의미에서 봉인과 소환처럼 막혀 버렸을 것이 분명한 교감 스킬이 너무나 아쉬웠다.
뭐, 내가 원한다고 발동이 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킁!
….
파스트의 집에 도착했다.
이미 다들 모여 있었다.
카므스… 아니, 차크무트가 위엄 있는 포스로 상석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세타니가 자리해 있었다.
파스트와 론, 비그와 리트가 줄지어 앉은 자리의 맞은편에 오식이와 나, 린의 순서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차크무트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파스트님께 모든 말씀을 들었습니다.”
차분한 중저음의 목소리였고, 예의도 깃들어 있었다.
뭔가 배운 자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원래의 카므스를 떠올린다면,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말투와 목소리였지만, 아예 외모 자체가 바뀐 탓에 이질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와 같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다른 이들을 쓱 둘러봤다.
내 행동의 의도를 파악한 차크무트가 바로 말을 이었다.
“아, 물론 저만 알고 있는 일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뭐, 안심까지 운운할 일은 아니었다.
혼란이 야기될 수 있는 일이기에 잘했다는 생각은 했다.
잠시 틈을 준 차크무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빠르고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운을 띄운 차크무트가 진짜 빠르고, 간략하게 말했다.
오늘 밤… 지금의 회의가 끝나자마자, 놈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쳐들어가겠다고 말이다.
오식이가 해 준 역사적 사건의 진행과 시간상으로는 얼추 비슷한 순서였고, 시간이었다.
동이 트기 전에 놈들을 모두 소탕했다고 했으니까.
게다가 정찰을 보낸 이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면, 놈들이 먼저 움직일지도 모를 터.
조금이라도 빨리 쳐들어가는 게 맞는 일이었다.
“도움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의 물음에 대답을 미루고는 오식이를 힐끔 쳐다봤다.
녀석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죠. 하지만… 우리만으로 가능할까요? 놈들의 수는 200이 넘는데….”
한 번… 그것도 찰나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이미 차크무트의 엄청난 모습을 봤다.
또한,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의 힘이 여실히 느껴졌다.
능히 혼자서도 여기 있는 모두를 상대하고도 남을 수준이었고, 마지막에 해치운 대가리 급의 다그블도 수십은 그냥 씹어 먹을 거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어중이떠중이 같은 놈들이 과반수 이상이지만, 대가리 급은 물론, 그것을 훌쩍 넘어서는 놈들도 상당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론상으로 불가능할 것 같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실제 차크무트와 7인의 영웅, 그리고 신녀의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 모인 이들은 아무리 좋게 따지고 봐도 그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막말로 엄청난 힘을 가진 차크무트 외에는 쓸 만한 인재가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나 린, 오식이마저도 대가리 하나를 제대로 상대할 수 없었다.
론과 비그, 리트는 어중이떠중이들을 상대하기도 벅찰 터였고, 신녀는 너무나 어렸다.
‘게다가 우리는 여섯뿐이라고….’
미간을 좁히다가 얼핏 파스트를 쳐다봤다.
타이밍 좋게 그가 마른기침을 해댔다.
“콜록콜록!”
‘설마’라는 생각이 들려다가 이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뒤적뒤적….
스윽….
차크무트가 품 안에서 뭔가를 뒤적이다가는 테이블 위에 꺼내 놓았다.
그것은 종이를 둘둘 말아 놓은 것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이게 뭐죠?”
내 물음에 차크무트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이건 코바타라고 합니다. 왜, 놈이 피우던… 그리고 제가 피웠던….”
“아….”
기억을 떠올리고는 그것을 한 번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
놈이 피우던 것과는 사뭇 달랐지만, 다시 보니까 담배 같기는 했다.
차크무트를 제외한 다른 이들도 코바타에 관심을 표했다.
아무도 그것의 정체나 이 상황에서 등장한 이유를 모르는 듯했다.
내가 총대를 메기로 했다.
“그런데 이걸 왜….”
얼버무린 듯한 내 물음에 차크무트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얘기가 좀 길듯하니, 일단은 준비와 확인부터 하시죠.”
말을 마친 그가 코바타에 불을 붙였다.
그러더니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그렇게 두어 번쯤 코바타를 피운 차크무트가 대뜸 론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당황한 론이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괜찮다. 입에 물고서 천천히 연기를 빨아 들이마시고는 다시 뱉어 내면 된다.”
머뭇거리던 론이 코바타를 받아들었다.
또 한참이나 머뭇거린 후에야 입에 물고서 천천히 빨아댔다.
“쪼오옥… 흐으으읍… 후우우우….”
론은 처음인 것 치고는 너무나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코바타를 피웠다.
‘이 새끼… 원래 골초였던 것 아냐?’
너무나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