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116)
일단, 놈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한참이나 뒤로 물러나 있었다.
한 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반쯤 꿇어앉은 모습이나 있는 대로 못생긴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는 것이 어떤 힘에 밀려 나가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놀라게 한 충격적인 장면은 아니었다.
고오오오오….
세타니가 그리 눈부시지는 않지만, 찬란함만큼은 더없는 빛을 온몸으로 발하며 놈과 마주 서 있었다.
찬란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빛도 그렇고, 양팔을 가볍고 자연스럽게 사선으로 펼치고 선 모습이나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얼굴 전체에서 보이는 묘한 표정까지도 너무나 신비로웠다.
그 모습은 마치, 선한 인도자나 특별한 존재와도 같았고, 이내 내 머릿속에는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시, 신녀….’
이미 오식이에게서 차크무트와 7인의 영웅, 그리고 신녀라는 이들의 얘길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심으로 지금의 보이는 세타니의 모습은 더도 덜도 아닌 신녀 내지는 성녀 그 자체였다.
‘사실이었구나… 그렇다면?’
자연스레 시선이 세타니의 뒤로 넘어갔다.
확인을 위한 것도 있었지만, 이제 막 그곳에서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오오오오….
세타니의 뒤에는 당연히 카므스가 있었다.
녀석도 세타니가 발하는 것과 비슷한 빛을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천천히 거대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허, 뭐야?”
이어지는 광경에 나도 모르게 반응했다.
제법 당당한 자세로 몸을 일으켜 세운 카므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온몸을 떨어댔다.
드르르르르….
일반적인 떨림의 느낌이 아니었다.
뭔가 강제적으로… 게다가 1초에 수십, 수백은 될 법한 빠르고, 자잘한 진동과도 같았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떨림과 함께 녀석의 몸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수축… 부풀었던 풍선의 바람이 빠지며 작아지듯 녀석의 거대한 키와 몸이 쪼그라들고 있었다.
‘왜?’
당장에 의문이 생겼다.
지금의 상황이 뭔가 우리에게 이로워지려면… 지랄 같은 놈과 대등하게 싸우기 위해 무언가가 이루어지고, 변화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더 커지고 우람해지는 것이 나을 터였다.
하지만, 그와 반대되는 상황이라니….
“아아….”
린이 뭔가를 알아챈 듯한 반응을 보였다.
당장에 린을 쳐다보며 그게 뭐냐는 눈빛을 발사했다.
“자, 작다고 했어요. 분명, 오식 씨가 이만큼….”
린이 자신의 풍만한 가슴 아래쪽쯤에 손을 가져다 대며, 다소 급하게 떠들어댔다.
부족한 느낌이었지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그랬다.
오식이가 말한 차크무트의 외형은 10티온… 2미터 30센티미터가량의 키에 이마에는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이 새겨져 있고, 빛나는 잿빛의 갑옷을 입고 있다고 했다.
나와 린은 오식이의 설명을 듣고 난 뒤, 부족한 정보를 토대로 차크무트가 누구일까 추리를 했었다.
생각보다 작은 키에 론과 카므스부터 과감히 배제했다.
두 녀석은 아무리 못해도 2미터 30센티미터를 훌쩍 넘었으니까.
뭐, 솔직히 말하면 카므스는 아예 후보로도 넣지 않았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놀랍기 그지없는 상황과 변화로 인해 카므스가 차크무트일 확률이 극도로 높아졌다.
막말로 이제는 녀석이 차크무트가 아니라고 하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물론, 일말의 의심은 여전히 간직한 채였다.
‘문장… 가문의 문장은?’
곧장 카므스의 이마를 쳐다봤다.
보자마자 ‘헉!’ 해 버렸다.
얼룩진 피가 거의 다 떨어져 나간 녀석의 이마에 그림인지 글씨인지 모를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 설마 저게?’
어이가 없었다.
나도 알고, 너도 알고… 마부투의 모든 이들이 알겠지만, 카므스의 이마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불과 30여 분… 넉넉잡고 1시간 전까지는 말이다.
그랬다.
녀석의 이마에 버젓이 새겨진 그것은 놈에게 피 떡이 되도록 맞으며 생겨난 상처였다.
그런데 그것이 가문의 문장이라고?
이건 뭐 가져다 붙여도 너무 억지스럽게 가져다 붙인 날조의 증거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씨… 그럼, 갑옷! 빛나는 잿빛의 갑옷은?’
마지막 증거.
차크무트… ‘잿빛의 왕’이란 오크 족 고대 언어의 본뜻이자 그를 상징하는 잿빛의 갑옷을 확인할 차례였다.
하지만, 이내 그것을 확인하지는 못할 거라는 걸 깨달았다.
본디 갑옷이란 것은 따로 준비하고, 갖춰 입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녀석이 차크무트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기대와 의심으로 뒤섞인 감정과 마구잡이 식으로 떠올린 생각들에 내가 어디에 초점을 맞추며, 이것저것을 따지고 들었는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카므스의 변화와 과정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크르르르!”
그런 모습을 놈이 가만두고 볼 리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고, 당황은 했겠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놈이 짙게 으르렁거리고는 세타니와 카므스를 향해 다가갔다.
저벅저벅….
그나마 아수라 스워드가 멀리 튕겨 나간 것이 다행이라 여겨졌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놈이 좀 더 효율적으로 세타니와 카므스를 공격했을 테니 말이다.
뭐, 그렇다고 안전하다거나 위험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막아야 해요!”
린이 소리치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나도 정신을 차리고는 재빨리 화살을 장전했다.
이번에는 놈이 있는 쪽을 조준해서 곧장 더블샷을 날렸다.
티잉… 팅….
쐐애액! 쐐액!
두 발의 화살이 연이어 날아갔다.
당연히 파탄이 장착된 것이었고, 최종 단계의 것은 아니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화살의 시차나 파탄의 위력보다는 빠른 속도와 놈의 저지가 더 유용할 터였다.
파앗!
첫 번째 화살이 놈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갑작스레 날아든 화살에 놈이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이내 두 번째 화살이 놈을 노렸다.
파악!
두 번째 화살은 놈의 가슴 부근에 꽂혔다.
아쉽게도 갑옷 위였고, 남은 길이로 보아 화살촉의 끄트머리만 간신히 박힌 듯싶었다.
“크르르….”
놈이 나를 노려봤다.
놈을 향해 나직하게 말해 줬다.
“뭘 봐, 인마!”
그 순간.
파아아앗!
자잘한 파편들을 사방으로 튀기며 파탄이 발동했다.
“크읏!”
놈이 제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비틀거렸다.
때마침, 린이 놈에게 거의 다다라 있었다.
“이야압!”
힘찬 기합과 함께 린이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곧바로 내려오는 속도에 맞춘 먼지 털기가 놈의 정수리를 향해 정확히 떨어졌다.
빠아아악!
통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놈은 더욱더 비틀거렸고, 린의 화려한 빗자루 난타가 이어졌다.
타앗!
발바닥에 힘을 주며 지면을 박찼다.
그러고는 앞을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놈과 린이 있는 곳은 아니었다.
세타니와 카므스가 있는 곳에서도 좀 더 뒤… 충격에 의해 저만치 날아가 바닥에 떨어져 버린 아수라 스워드를 향해서였다.
덥석!
놈의 덩치에 맞게 커져 버린 아수라 스워드를 집어 들었다.
양손으로 들었는데도 묵직함이 확 느껴졌다.
사람에게 말하듯 아수라 스워드를 향해 말했다.
“인마! 이제 다시 나한테로 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수라 스워드가 빛을 발했다.
피이잉….
빛이 사라지자, 이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수라 스워드를 확인할 수 있었다.
휙! 휙!
가볍게 검을 휘둘러 감각을 정비하고는 여전히 린에게 두들겨 맞고 있는 놈을 노려봤다.
“넌 뒤졌다!”
말을 뱉어 낸 뒤,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엘프의 활을 바닥에 내려놨다.
남은 화살도 없었고, 어차피 린과 함께 놈과 맞붙어 싸울 생각이었기에 더는 필요치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벅저벅….
빠르게 걸음을 옮겨 놈을 향해 다가갔다.
“흠….”
놈에게 향하던 중에 카므스와 세타니의 곁을 지나가게 됐다.
녀석들이 뿜어내는 빛에 살짝 닿았지만 별다른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또한, 내가 곁을 지나쳐도 녀석들은 망부석처럼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린이 판단을 잘했군.’
린이 놈에게 달려들지 않았더라면… 해서, 놈이 녀석들을 공격했더라면, 그냥 맥없이 당하는 꼴이 연출 됐을 것만 같았다.
‘아닌가? 다시 방어막 같은 게 작동했으려나?’
뭐, 그랬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어쨌든… 뭐가 됐든 간에, 빨리빨리 끝내기나 해라!’
속으로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며, 녀석들에게서 눈길을 거뒀다.
그러면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 전에 우리가 먼저 놈을 끝장낼 것 같지만 말이야!”
어디서 생겨난 자신감인지는 모르겠다.
근데, 꼭 그럴 것만 같았다.
아수라 스워드도 다시 내 손에 들어왔고, 여전히 린에게 개처럼 처맞고 있는 놈을 보니까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극도로 좋은 컨디션이나 긴장감이 전혀 없는 도전은 오히려 애를 먹거나 실패하기 쉽다고 했던가?
어디서 생겨난 것인지 모를 빵빵한 자신감과 더없이 좋은 느낌이 한순간에 지랄처럼 변해 버렸다.
그것도 뭔가를 시작도 하기 전에 말이다.
부우우웅!
샌드백처럼 린의 빗자루에 난타를 당하던 놈이 거대한 팔을 크게 휘둘렀다.
딱히 제대로 된 공격을 하겠다는 의미보다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마구잡이 식의 몸부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재수 없게도 린이 그것을 제대로 맞아 버렸다.
퍼어어억!
묵직하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린의 찢어지는 비명이 이어졌다.
“꺄아아아악!”
놈의 공격에 뒤로 쭉 밀려난 린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에에?”
날아오는 린을 보고는 잽싸게 아수라 스워드를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는 린을 받아들었다.
퍼어억….
새털처럼 가볍다고 종종 말을 해 주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은 린의 무게와 날아오는 속도가 더해졌기에 제법 강렬한 충격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받아든 자세도 과히 좋지 않은 탓에 뒤로 벌러덩 넘어졌고, 두 바퀴쯤 서로 엉켜 구르기까지 했다.
데굴데굴….
멜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뒤엉킨 남녀가 서로 즐겁거나 그보다 좀 더 진한 에로 영화처럼 부드럽고, 말캉한 뭔가를 느꼈다면 참 좋았겠지만, 전혀 그런 걸 느낄 틈이 없었다.
“으아악!”
“꺄아아악!”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날아드는 통증에 서로 비명을 지르기에 바빴을 뿐이었다.
“에고에고….”
“끄으응….”
구르기가 멈춘 후, 앓는 소리를 내며 뒤엉킨 팔다리를 풀었다.
여전히 제정신이 아니었고, 충격도 컸던지라 쉽고, 빠르게 되지 않았다.
빌어먹게도 그것이 놈에게 충분한 회복의 시간을 주고 말았다.
겨우겨우 엉킨 몸을 풀고,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을 때, 화가 완전히 머리끝까지 난 듯한 놈을 목격할 수 있었다.
“크르르… 이놈이나 저놈이나… 이 버러지 같은 것들… 진짜로 다 죽여 버리겠다!”
으르렁대고, 눈에 쌍심지까지 켠 놈이 이까지 부득부득 갈아대며 진심을 다해 화를 쏟아 냈다.
어차피 진짜로 다 죽일 생각이었으면서 지금껏 뭔가 봐준 것처럼 말하는 게 좀 거슬리긴 했지만, 그보다 더 짜증이 나고, 지랄 같은 일이 있었다.
날아오는 린을 받아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동댕이친 아수라 스워드가 다시 놈의 손에 들어가 거대하게 커져 있었던 것.
“시바… 되찾은 지 얼마나 됐다고….”
투덜거림을 뱉어 낸 뒤, 어쨌거나 놈과 맞붙어 싸울 자세를 취했다.
그나마 멀쩡하다고 여겼던 온몸이 쑤시고, 결리는 건 그냥 기분상 그런 거나 착각이겠지?
“제가 막겠습니다.”
린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럴 땐 남자가 앞장서는 게 보기가 좋겠지만, 그나마 빗자루를 든 린이 막아서는 게 작전상으로도 옳은 일이었다.
“일단, 어떻게든 막아! 나는 틈을 노려 뒤로 돌아갈 테니까!”
“네!”
작전 같지도 않은 작전을 지껄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작전 같지도 않은 작전을 써 보지도 못했다.
아니, 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