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109)
나와 린이 동시에 녀석을 쳐다봤다.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길게 내쉰 녀석이 자책해댔다.
“후우우… 오는 게 아니었다. 모두 다 내 잘못이다. 내가 위대한 샤그란의 역사를 흔들어 놨다.”
지금껏 이토록 심각한 얼굴의 오식이를 본 적이 없었다.
당혹감이 절로 생겨날 지경이었다.
뭐라 말을 건네지도 못한 채 가만히 기다렸다.
린도 옆에서 눈치만 살폈다.
잠시 후.
오식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위대한 역사의 사건에는 또 다른 이들이 있었다.”
“…??”
“7인의 영웅, 그리고 신녀… 그들이 차크무트를 도와 새로운 역사를 이루었다.”
“엥? 7인의 영웅과 신녀라고? 뭐, 뭐가 그리 많아?”
말까지 더듬으며 반문했다.
마부투에는 아무리 따져 봐도 그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알겠지만, 마부투는 그리 큰 마을이 아니었다.
그곳에 사는 오크들을 전부 합쳐 봐야 50이 간당간당했다.
더불어 론 일행을 뺀 나머지는 죄다 일반 오크들이었다.
맞다.
전투 타입의 오크… 영웅이 될만한 이들은 끽해야 셋뿐… 아니, 전혀 쓸모가 없어 보이지만, 카므스를 끼워 준다고 해도 고작 넷뿐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일곱 명이라니….
‘게다가 신녀는 또 뭐야?’
다들 신녀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란 게 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간에 대놓고 ‘내가 신녀다!’하는 특별한 존재감.
신녀만의 치렁치렁하면서도 하늘거리는… 또는 화려하면서고 고혹한 의상은 물론, 뭔가 고귀하고, 느낌 있는 자태 등이 당장에 머릿속을 장식했다.
하지만, 마부투에서는 그럴만한 어떤 이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물며, 점술이나 그와 엇비슷한 일을 하는 여자… 젊은 여자는 둘째 치고, 나이 많은 노파조차도 없었다.
‘그런 이미지라면….’
옆에 있던 린을 힐끔 쳐다봤다.
머릿속에 떠올리던 하늘거리는 신녀의 옷을 린에게 입힌다면 제법 태가 날 듯했다.
“주인님… 왜 그렇게 보세요?”
내 눈빛이 너무나 뜨겁고 부담스러웠을까?
린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수줍게 물었다.
“아, 아니… 넌 뭐를 해도 예쁘겠구나 싶어서.”
“네? 그게 무슨 말씀… 아이참….”
린이 몸을 비비 꼬며 부끄러워했다.
흐뭇한 미소가 절로 그려졌다.
잠시 망각한 상황을 오식이가 헛기침으로 일깨워 줬다.
“흠흠….”
이내 정신을 차렸다.
린도 자세를 바로 하고는 내게 물었다.
“혹시, 저희도 7인에 포함되지 않을까요?”
론 일행과 카므스, 우리 셋을 합치면 일곱이 되긴 했다.
하지만, 그건 말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우리는 샤그란의 역사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었으니 말이다.
“그건 아니지 않을까?”
“그렇겠죠?”
“응… 그건 아닐 거야.”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여기며, 단정 지어 말했다.
차라리 다른 가능성을 찾는 게 나을 듯해 머리를 한 번 굴렸다.
“오식아, 혹시 우리가 알고 있는 이들 외에 다른 이들이 있는 거야? 가령, 잠시 마을을 떠났다가 돌아올 이들이라던가 하는….”
가장 현실성 있는 일일듯했다.
내 물음에 오식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다.”
실망스러웠다.
다시금 다른 가능성을 찾으려는데, 오식이가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아는 역사와 달랐다. 파스트와 상의했지만, 그도 모른다고 했다.”
“흠… 많이 바뀌었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보군.”
“그렇다.”
잠시 틈이 생겼다.
이내 떠오른 의문의 해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확실치는 않지만, 가능성이 큰 해답도 바로 생각났다.
‘있어서는 안 되는 우리가 이곳에 왔기에 그런 거겠지?’
아무래도 그런 듯싶었다.
‘그렇다면….’
절대 아니라고 단정 지었던… 7인의 영웅에 우리가 끼어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할 듯싶었다.
‘하아… 그래도 수가 맞지 않는데… 쩝!’
차크무트와 7인의 영웅, 거기에 신녀까지 합치면 모두 아홉 명이었다.
론 일행과 카므스, 우리 셋을 합치면 일곱 명이다.
나머지 두 명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답이 없었다.
“후우… 답답하구만!”
답답함을 대놓고 소리 내어 표하고는 오식이를 향해 물었다.
“뭐, 일곱이든 아홉이든 간에 그들이 모인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거지?”
오식이의 역사 강의가 다시 이어졌다.
내일… 정확히 붉은 보름달이 뜨는 날 저녁에 다그블의 무리가 마부투를 침략한다.
마부투는 순식간에 점령이 된다.
당연히 사상자도 생긴다.
그 수는 몇 안 되지만, 마을의 규모상 피해는 엄청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때! 붉은 달을 등에 지고, 영웅들이 등장한다.”
늦은 감이 있어 보이지만, 그렇게 등장한 영웅들은 마부투를 침략한 다그블 무리를 물리친다.
그 후, 남아 있던 다그블… 진을 치고 있던 다그블의 군대도 말끔히 정리한다.
“그것이 위대한 역사의 시작이다.”
차크무트와 영웅들의 활약은 계속된다.
그들의 활약상과 소문은 금세 퍼지고, 곳곳에서 그를 따르려는 이들도 넘쳐나게 된다.
결국엔 그리느브래크를 점령한 다그블을 모두 몰아내고, 흑색으로 물들었던 이 땅을 다시 녹색의 세상으로 바꾸게 된다.
….
“주인님, 정말 이대로 있어야 하나요?”
좀처럼 자리에 눕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던 린이 내게 물어왔다.
진심 어린 걱정이 한가득 깃들어 있었다.
오지랖과 친화력으로 그동안 친해지고, 마음을 줬던 마부투의 오크들이었기에 그러는 게 당연했다.
“흠….”
뒤척임을 잠시 멈추고는 나 역시 고민하고 있음을 표했다.
오식이의 이야기가 끝난 후, 조금 더 대화를 나눴었다.
우리 때문에 지나간 역사가 이상하게 틀어진 것은 다들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우리가 7인의 영웅이지 않을까 하는 내용도 있었다.
하지만, 확실치는 않은 일이었다.
“더는 역사에 우리가 끼어들면 안 된다.”
오식이가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였다.
내 생각도 그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우리 때문에 역사가 꼬여 버렸는데, 더 관여했다가는 꼬여 버린 매듭을 완전히 끊어 버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불어….
‘그들이 나랑 뭔 상관이야? 아니, 막말로 오크의 역사가 어찌 되든 나랑은 아무 상관없잖아?’
그랬다.
따지고 보면 이 일…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되든 간에 나랑은 전혀 상관이 없었다.
린도 마찬가지였다.
뭐, 그런 식이라면 오식이도… 어차피 녀석은 나와의 서약으로 인해 오크지만 오크가 아닌 오식이로 살 테니, 굳이 역사니 뭐니 따지거나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래, 그보다는….’
그것보다는 어떻게 하면 다시 원래의 세상… 내가 살던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느냐가 더 시급한 문제였다.
분명히 대화를 이어 가던 중에도 그랬고, 대화가 끝난 후에도 그런 마음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걱정을 드러내는 린의 모습과 고개를 가로젓고, 이리저리 흔들고, 세차게 털어 내도 자꾸만 떠오르는 이들의 생각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짓고 있었다.
“일단은 지켜보자.”
당장에 해 줄 수 있는 말을 해 주고는 미간을 좁히며 눈을 꼭 감았다.
“하아아….”
린의 깊은 한숨이 구겨진 미간을 더욱더 깊게 찌그러뜨렸다.
* * *
흠칫!
요란한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멀찍한 곳에서부터 웅장한 북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두둥! 둥! 두둥! 둥!
오식이와 린은 이미 북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시선을 두고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녀석들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주인님.”
“응. 그런데 넌… 잘 못 잔 모양이지?”
살짝 충혈된 린의 눈을 보며 물었다.
린이 뭐라 말을 하려다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씁쓸해지는 입맛을 다시고는 린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 줬다.
두둥! 둥! 두둥! 둥!
요란한 북소리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또한, 꺼져 가는 모닥불의 하얀 연기가 마치, 용처럼 하늘로 솟고 있었다.
가늘게 뜬 눈을 시전하여 놈들의 동태를 자세히 살폈다.
놈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미 천막은 다 걷은 상태였고, 조만간 이동할 듯 보였다.
“이동하려는 모양이다.”
가늘게 뜬 눈을 풀고는 말했다.
오식이도 린도 딱히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
두둥! 둥! 두둥! 둥!
다그닥다그닥….
저벅저벅….
북소리에 맞춰 놈들이 이동을 시작했다.
군대임을 보여 주듯 오와 열을 맞춘 진형이 제법이었다.
가장 선두에는 깃발도 되고, 창도 될 듯한 것들을 든 놈들이 말을 타고 움직였다.
그 뒤로는 그냥 보기에도 다른 놈들보다 훨씬 더 커 보이는 놈들이 앞선 놈들이 탄 말보다 크고, 튼튼하게 생긴 말… 얼핏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한 것을 타고서 이동했다.
나머지 놈들은 무장만 한 채, 줄을 맞춰 뒤를 따랐다.
“흠….”
그 모습을 보며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어제 들은 얘기와 조금 달라진 모습 내지는 광경 때문이었다.
‘한꺼번에 이동이라….’
오식이가 말하기를 마부투를 찾아간 다그블의 수는 무리의 범위였다.
지금 눈앞에서 줄줄이 이동하는 수준의 대규모 군대가 아니었단 말이다.
‘이동 후에 다시 재정비를 하는 건가?’
뭐, 그렇다면 오식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못해도 200은 될듯한데, 어찌….’
또 다른 의문도 생겨났다.
차크무트와 영웅들은 마부투를 침략한 무리를 처리하고, 곧장 진을 친 나머지 놈들까지 죄다 물리쳤다고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쪽수의 차이가 너무 심했다.
아무리 영웅이라 불리고, 위대한 왕이 이끈다고 해도, 고작 아홉 명이 이백 명을 상대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을… 아니, 불가능에 가까울 터였다.
게다가 놈들은 일반 오크도 아니었다.
말을 탄 놈들은 말할 것도 없고, 뒤를 따르는 조무래기들조차 하나같이 오식이만큼 크고 강해 보였다.
제대로 된 무장이나 흑색의 피부가 상당한 위압감을 주는 것도 한 몫을 단단히 하는 듯했지만, 어쨌거나 맞붙어 싸우기에는 도저히 승산이 없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거… 진짜로 두고 보기만 해야겠는걸?’
….
안전을 위해 적당함을 훌쩍 넘어선 거리를 두고 놈들의 뒤를 쫓았다.
놈들은 우리가 밤새도록 걸었던 숲길이 아닌 빙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뭐, 대규모의 군대가 이동하기에는 그쪽이 훨씬 용이하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다만, 너무나 뻥 뚫려 있는 길이라 몰래 뒤를 따르는 우리가 숨을 곳이 딱히 없다는 게 문제였다.
“우리는 숲으로 간다.”
놈들의 이동 경로가 보이고, 몸도 숨길 수 있는 길을 찾아 움직였다.
이따금 정찰조… 깃발인지 창인지를 든 놈들이 주변을 크게 돌며 살피기는 했지만, 발각되지 않고 잘 따라갈 수 있었다.
….
놈들의 행군은 쉼이 거의 없었다.
오전부터 정오를 훌쩍 넘기고도 남은 시간까지 계속 이어졌다.
“징한 놈들… 배도 안 고픈가?”
지치지 않는 놈들의 체력에 감탄하며, 투덜거림을 뱉어 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린이 반응을 보였다.
“배고프세요?”
그런 뜻이 아니라고 말해 주려다가 말았다.
놈들의 행군이 멈추려 했기 때문이었다.
“허… 아슬아슬했구만?”
행군을 멈추고, 부랴부랴 진지를 구축하는 놈들의 모습을 보며 혼잣말 흘렸다.
다행이라는 마음과 뜻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만 더 전진했더라면….
해서, 불과 몇백 미터 앞의 코너를 돌았더라면, 바로 마부투가 놈들의 시야에 들어왔을 터였다.
만약, 그렇게 됐더라면… 흐미!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결과가 초래됐을 것이 분명했다.
어쨌거나, 여기까지는 오식이가 말한 역사와 크게 달라짐이 없었다.
‘다음은?’
몇 놈들이 무리를 지어 마부투로 향할 것이다.
행군을 하는 동안 해대던 짓을 미루어 봤을 때, 놈들은 정찰조가 분명했다.
역시나… 얼마 가지 않아 말을 탄 정찰조 놈들이 주변을 돌아보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자!”
우리도 서둘러 마부투를 향해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