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108)
오랜 시간 세상에 군림하던 녹색 피부의 오리지널 오크들의 프라이드는 대단했다.
해서, 타 종족과 피를 섞고 태어난 흑색 피부의 오크들을 멸시하고, 괄시하는 게 당연했다.
‘고귀한 피를 더럽힌 혼혈’, ‘피부색만큼이나 추한 잡종’으로 부르면서 배척해 버렸다.
그런 녹색 피부의 오크… ‘샤그란’들의 배척에 흑색 피부의 오크… 다그블은 무참하게 당해야만 했다.
수적인 열세를 극복할 수는 없었으니까.
다그블은 더욱더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다.
강대한 힘에 굴복하여 처참하게 쫓겨난 모양새였다.
살기 위해 그들은 얌전히 숨을 죽였다.
그렇게 멸족의 위기에서 벗어난 채, 오랜 시간이 흘렀다.
샤그란이 다그블을 배척한 가장 큰 이유는 고귀한 피를 더럽혔다는 것이었다.
그것만큼 확실한 명분은 없었다.
하지만, 그 뒤에 숨겨진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바로 다그블의 타고난 힘이었다.
미지의 땅에서 존재하는 새로운 종과 샤그란 사이에서 태어난 다그블은 피부색만 다른 것이 아니었다.
엄청난 힘과 더없이 강한 육체를 선천적으로 타고났다.
그랬다.
‘전사와 일반’이라는 두 가지 부류로 나뉘게 되는 샤그란과 달리, 다그블은 오로지 전사 타입만이 태어나는 것이다.
더불어 샤그란과 다그블 중 ‘우성인자’는 다그블이었다.
그것도 멘델의 유전법칙을 완전히 무시한 절대적 우성.
둘 사이에서 태어난 오크는 무조건 다그블이었던 것이다.
다그블은 샤그란의 눈을 피해 조금씩 세력을 키워 나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들을 핍박한 샤그란과 대등한 수준에 이르게 된다.
선천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긴 세월 동안 받아 온 핍박과 서러움을 폭발시켰다.
그 힘은 무척이나 강대했고, 거침이 없었다.
드넓은 초록의 대지처럼 녹색의 샤그란으로 뒤덮였던 그리느브래크는 단숨에 흑색으로 물들어 갔다.
그렇게 결국엔 모든 종의 머리 위에 군림하던 샤크란의 자리를 뺏으며, 이 땅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
한참이나 이야기를 늘어놓은 오식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샤그란이 분명한 오식이였기에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도 과히 달갑지는 않았을 테지만, 왠지 그런 것치고도 표정과 반응이 심상치가 않아 보였다.
“뭐냐? 아직 할 얘기가 더 있는 거야?”
내 물음에 녀석이 움찔했다.
분명, 더 할 얘기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녀석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말을 아꼈다.
순간, 욱하는 기분에 소리라도 지를까 했지만, 나 역시 한 번 더 기다리기로 했다.
….
근처의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는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혹시라도 놈들에게 노출될까 싶어 모닥불 같은 건 피우지 않았다.
“이쪽으로 가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거야?”
서둘러 마부투를 떠난 이유는 물론, 어디로 향하는지조차 묻지 않았었다.
그놈의 ‘언젠가는’ 때문이었고, 이 정도는 그래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물었다.
“아니다.”
“그래? 그럼, 목적지가 있긴 한 거야?”
“없다.”
당황스러울 수 있는 답변이었다.
하지만, 이미 생각하고 있던 바가 있기에 딱히 놀라지 않았다.
혼잣말처럼 내가 생각한 바를 흘리며 녀석의 반응을 살폈다.
“흠… 그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지려고만 한 건가?”
역시나 녀석이 움찔하며 시선을 회피했다.
잠시간 틈을 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식아, 네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
“뭐,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리 하겠지? 그것도 다 이해해. 하지만….”
“…??”
“우리는 동료잖아. 그것도 생과 사를 수도 없이 오갔던 전우!”
전우라는 단어에 악센트를 강하게 주고는 잠시 말을 쉬었다.
녀석의 감정이 북돋을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
적절한 타이밍을 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혼자서만 끙끙대지 말란 소리야. 우리… 나와 린은 네 편이고, 언제든 도와줄 용의가 있거든. 그렇지 린?”
“네! 저는 언제나 주인님과 오식 씨에게 힘이 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힘주어 말했다.
약간 오버스럽기는 했지만, 결의에 찬 마음가짐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봤지? 그러니까….”
조금 더 녀석을 설득하고, 마음을 흔들어 놓으려 했다.
하지만, 녀석이 내 말을 끊으며 먼저 다가왔다.
“고맙다.”
“….”
“형님 말대로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건 어쩔 수가 없다.”
“그래, 그렇겠지.”
정말로 다 이해한다는 듯이 맞장구를 쳐 줬다.
그러고는 다음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오식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있는 놈들은 군대다.”
“알아.”
내 대답에 녀석이 흠칫했다.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을 이었다.
“아, 처음엔 마을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까 아니더라고. 죄다 갑옷을 입은 것도 그렇고, 말이나 무기들이 즐비한 것도 그렇고 말이야.”
“그랬군.”
“그래서?”
“음… 놈들은 내일 움직인다.”
“어디로?”
“마부투다.”
오식이의 말에 린이 ‘헉!’하고 놀랐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근 하루를 걷고 움직였다.
생각보다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나름 사방이 길이었고, 어디로든 방향을 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너무나 단호하게 놈들의 목적지가 마부투라 하는 것이 이상했다.
“그걸 어떻게 알지?”
“그건….”
녀석이 허를 찔리기라도 한 듯 반응했다.
순간, 실로 말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이어, 나도 모르게 말을 뱉어 냈다.
“너 알고 있는 거구나?”
“….”
내 물음에 녀석이 침묵했다.
녀석의 침묵이 오히려 엉뚱하기 그지없다고 여겼던 내 생각을 옳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에 힘입어 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뒷받침할 만한 것이 없나 고민했다.
‘아!’
당장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기억의 돌!’
40여 일 전, 우리를 이곳 그리느브래크로 넘어오게 한 돌덩이의 이름이 기억의 돌이었다.
기억이란 것은 일종의 과거다.
해서, 그것으로 인해 사건이 벌어졌다면….
또한, 툭 하니 뱉어 낸 내 말에 녀석이 보인 반응이나 확신하듯 미래를 답하는 것을 빗대어 본다면, 내가 떠올린 생각과 가설이 맞아떨어질 수 있었다.
물론, 얼토당토않은 일이기는 했다.
어찌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올 수 있단 말인가.
나름 눈부시게 발전한 인간의 과학 기술로도 절대 만들지 못하는 것이 타임머신이었다.
회귀니 뭐니 하는 타임 슬립에 관한 이야기도 많고, 그것을 소재로 한 다양한 콘텐츠가 난무하기는 한다지만, 죄다 공상이고, 상상이며, 꿈같은 이야기일 뿐이었다.
‘아니지! 던전이잖아!’
그랬다.
모험과 신비가 가득하고,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많은 미스터리를 품고 있는 곳.
그러기에 어떤 일이든 가능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던전이었다.
확실한 확인이 필요했다.
해답은 당연히 오식이에게 있었다.
“너 미래를 알고 있지?”
“….”
“맞구나? 그렇다면, 여긴 과거… 네가 살던 세상의 지나간 어느 시점인 거지?”
내 물음에 오식이는 한참이나 침묵하고, 고민했다.
그러다가 끝내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말했다.
“그렇다.”
녀석의 짧은 대답에 속이 뻥 뚫리는 것만 같은 시원함을 느꼈다.
동시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짜릿함이 이어졌다.
“하, 말도 안 되는 일이 사실이었다니….”
낮게 혼잣말을 흘리며, 계속해서 차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러고는 다시 물음을 던졌다.
“근데, 왜 비밀이었지? 그냥 말해 줘도 되는 거 아니야?”
“과거다. 역사이고, 지나간 일이다.”
“그건 알지.”
“이미 지나간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응?”
“과거를 바꾸면 미래가 달라진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오식이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흠….”
이곳에 온 지 40여 일이 지났다.
대놓고도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나는 특별하게 뭔가를 하지 않았었다.
스윽….
옆에 있는 린을 쳐다봤다.
내 시선을 느낀 린이 눈을 깜빡거렸다.
‘없겠지?’
화려한 오지랖과 친화력을 선보이며 이곳저곳을 쏘다닌 린도 뭔가 미래를 바꿀만한 짓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녀석은? 매일 같이 바빴던 건 녀석뿐이잖아?’
오식이를 쳐다봤다.
그리 생각해서인지, 녀석의 얼굴에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쓰여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우리가 미래를 바꿀만한 짓을 한 적 있어?”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말이 끊기지 않게 하려 우리라는 말로 싸잡아 물었다.
그것이 통했는지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있다… 이미 많은 것이 바뀌었다.”
녀석의 입에서 있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속으로 ‘그럼, 그렇지!’라고 하다가는 이어진 말에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에? 많다고? 얼마나? 아니, 뭐가?”
내 물음에 오식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직접적인 대답이 아니라 제법 장황한 설명부터가 시작이었다.
“이곳은 샤그란의 역사 중에서도 가장 큰 사건이 있었던 곳이다.”
“가장 큰 사건이라고?”
“그렇다. 반란과 함께 그리느브래크를 장악해 나가던 다그블의 기세를 끊고, 다시금 샤그란의 부흥을 이끈 불씨가 시작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오식이가 말하는 정확한 역사의 현장은 마부투였다.
때는 283대 왕인 카마투스의 시대.
카마투스는 다그블에 의해 왕의 자리에 오른 샤그란으로 역사상 가장 무능하며, 가장 짧은 기간 동안 왕의 자리에 있던 자였다.
또한, 샤그란의 부흥을 이끈 불씨이자, 역사적인 사건의 주인공이 마부투 태생이라 했다.
그의 이름은….
“차크무트! 샤그란 역사상 가장 위대하신 왕의 이름이다.”
“차크무트?”
오식이의 말에 마부투에서 만난 이들의 얼굴과 이름을 떠올렸다.
매치 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몇 명 되지도 않기에 헷갈릴 일도 없었다.
“그런 이름은 없었는데? 린, 넌 들어 봤어?”
“아니요. 그런 이름은… 처음 듣습니다.”
린과 동시에 오식이를 쳐다봤다.
녀석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차크무트는 잿빛의 왕이란 뜻이다. 위대하신 그를 가리켜 부르던 것을 그대로 사용하게 됐다.”
“그럼, 진짜 이름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엥? 누군지 모른다는 거야?”
“그렇다.”
중요한 얘기를 너무나 뻔뻔스럽게 모른다고 하니 기가 막혀왔다.
하지만, 알아낼 방법은 있을 터.
바로 파고들었다.
“특징은? 사진은 없을 테고, 그림이나 뭐 그런 게 남아 있지 않아?”
“차크무트란 이름처럼 그는 빛나는 잿빛의 갑옷을 입고 천하를 호령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거 말고… 좀 더 구체적인 건?”
“10티온의 키, 이마에는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이 새겨져 있고….”
“야야, 10티온? 그게 어느 정돈데?”
“이 정도다.”
오식이가 제 명치 아래쯤을 손으로 가리켰다.
끽해야 2미터 50? 아니, 2미터 30쯤 될 듯했다.
생각보다 작은 높이에 고개를 갸웃했다.
“겨우 그 정도라고?”
“그렇다.”
다시금 마부투에서 만난 이들을 떠올렸다.
내가 아는 이들 중, 그 정도의 키를 가진 이는 딱 한 명밖에 없었다.
“비그….”
“비그 씨?”
린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비그의 이름을 흘려 내며 나를 쳐다봤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나 역시, 내 생각을 부정했다.
“에이, 아니야. 그럴 리가… 게다가 이마에 아무것도 없잖아? 그치?”
“네… 문장 같은 건 없었어요.”
오식이의 지랄 같은 특훈에 힘입어 단시간에 살이 쪽 빠지고, 제법 탄탄한 몸이 된 비그였지만, 절대로 왕이 될 것 같은 상은 아니었다.
“그럼, 다음 순위는….”
“리트 씨밖에 없지 않나요? 키가 작긴 하지만요.”
“그치, 키가 작지… 아! 아니다.”
“…??”
“걔들 아직 키가 다 자라지 않았다고 했어. 아직 성장하는 청소년기라고!”
그랬다.
정확히 28년을 산 녀석들이었다.
성장의 기회는 가득했다.
“음… 똑똑해 보이기는 하지만….”
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비그보다는 리트 쪽이 가능성이 있는 건 사실이야.”
나와 린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오식이가 초를 치듯 말했다.
“비그도, 리트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