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106)
지능이 낮은 것으로 유명한 오크였다.
평소의 오식이를 보고 있으면 그런 말이 왜 나왔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그저 그 수준에서, 그냥 그런 줄로 알고 지내면 될 일이었다.
어차피 어떤 결정을 내리거나 상황을 파악하는 건 내 일이었고, 녀석은 그런 나를 만족시킬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도와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곳 그리느브래크에 와서 보여 준 오식이의 모습은 그동안의 모습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말도 제대로 했고, 생각도 깊어졌다.
완전히 딴사람이 됐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분명히 변한 건 사실이었다.
다른 오크들도 그랬다.
이미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던 ‘멍청한 오크’는 어디에도 없었다.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던 파스트는 인자함과 약간의 근엄함, 오랜 세월을 살며 자연스레 몸에 밴 연륜의 지적임이 충만했다.
우리를 서포트하고 있는 론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비그 녀석이 고기에 유독 집착하는 모습이긴 했지만, 다들 하는 짓이 멍청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뭐, 세타니는 제 나이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카므스는 달랐다.
평소의 오식이보다는 빠르지만, 말을 하면서 살짝 버퍼가 걸리는 느낌… 말투에 어눌함이 묻어난다고나 할까?
또한, 어린 세타니에게 꾸지람을 들으며, 한껏 풀이 죽어 있는 모습도 카므스가 정상(?)이 아님을 알려 주고 있었다.
오크의 세계에도 발달 장애나 지적장애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무조건 없다고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상은 넓고, 상상을 초월하는 일은 널리고 널렸으니까.
….
마을로 돌아오는 길.
“치이! 카므스는 바보야!”
세타니는 화가 단단히 났다.
카므스가 끝까지 고집을 부린 탓이었다.
그랬다.
나는 결국 카므스와 친구가 되지 못했다.
“처음이라 어색해서 그랬을 거야.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수도 있어.”
확신할 수 없고, 크게 바라지도 않는 일이었지만, 일단은 세타니의 화를 풀어 주기 위해 말을 던졌다.
내 말에 땅이 꺼지도록 긴 한숨을 내쉬는 세타니를 보며 조용히 입꼬리를 말아 올려야 했다.
긴 한숨 후에 잠시 틈을 주던 세타니가 마치 고백이라도 하듯 말했다.
“그래도 난 카므스를 미워할 수 없어.”
“…??”
“카므스가 저리된 건 다 나 때문이거든.”
뭔가 사연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바로 관심을 보였다.
세타니가 지난 이야기를 들려줬다.
카므스는 이곳 마부투 태생이 아니었다.
3년 전쯤, 우연히… 우리처럼 그물 덫에 걸려 있는 걸 발견하여 이곳으로 데려왔단다.
“처음엔 다들 카므스가 얼마 살지 못할 거라고 했어.”
어디서 다쳤는지 모를 크고 작은 상처와 정신을 놔 버릴 정도의 심각한 탈수, 탈진, 피로 등에 며칠간이나 사경을 넘나들다가 극적으로 깨어났단다.
“한동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서 벙어린 줄 알았지만, 카므스는 힘도 세고, 엄청나게 똑똑했어.”
극적으로 깨어난 후, 한동안은 칩거 생활을 했고, 대인 기피증에 실어증 증세까지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점점 마음을 열고 마을의 일원이 되었다.
정신을 차린 카므스가 마을을 위해 제일 처음으로 한 일은 마을 회관을 지은 것이었다.
오래전부터 천막 생활만을 하던 이들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통나무 건축 기술을 카므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실행했고, 보기 좋게 완성했다.
그것도 모든 것을 혼자서 말이다.
이어, 마부투의 족장인 파스트의 집도 혼자서 지었고, 세 개나 되는 창고도 완성했다.
역시나 혼자서… 그것도 1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말이다.
“나는 카므스가 일하는 걸 매일 같이 지켜봤어. 너무나 신기하고, 재미있었거든.”
나에게 먼저 다가와 장난을 치고, 호기심을 드러냈던 것처럼 세타니는 카므스에게도 같은 짓을 했다.
처음엔 무뚝뚝함으로 일관하던 카므스도 결국엔 세타니에게 마음을 열었고, 얼마 가지 않아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사고가 있었어.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하고 말았지 뭐야.”
세 번째 창고가 거의 완성될 즈음.
여느 날과 같이 카므스가 일하는 걸 지켜보던 세타니가 도움을 준답시고 나서다가 실수를 저질렀다.
실수도 보통이 아닌 커다란 실수….
한쪽에 쌓아놓은 거대한 통나무 다발이 순식간에 무너진 대형 사고였고, 실로 끔찍한 참변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너무 놀라서 눈도 감지 못했어. 이건 비밀이지만, 아직도 그때의 무서운 꿈을 꾸기도 해.”
무너지는 통나무 다발에 여지없이 깔려 죽을 위기에 처한 세타니.
그런 세타니를 구한 것이 카므스였다.
“다들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했대. 카므스 다음으로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센 론조차도 혼자서 들지 못할 만큼 무거운 통나무 더미에 깔렸으니까.”
겨우겨우 통나무들을 걷어 내고 나서야 카므스와 세타니가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됐단다.
그 와중에 놀라웠던 건 세타니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
카므스가 온몸으로 세타니를 감싸 안고 있던 덕이었다.
“그 일로 카므스는 처음 마부투에 왔을 때보다 더 오래도록 깨어나지 못했어.”
세타니는 너무나 멀쩡했지만, 통나무 다발을 직격으로 맞고, 엄청난 무게까지 모두 견뎌야만 했던 카므스의 상태는 더없이 위중했다.
“나는 매일같이 카므스를 찾아갔어. 제발 카므스를 살려 달라고 와투루님께 기도도 했어.”
‘와투루’는 오크 족 역사에 기록된 첫 번째 왕으로 오크들 사이에서는 신처럼 추앙받는 존재였다.
“얼마 뒤에 카므스가 깨어났어. 위대하신 와투루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신 거야!”
오식이만 봐도 알 수 있는 오크의 놀라운 회복력.
그에, 카므스는 심각한 중상을 이겨 내고 깨어났다.
때마침, 카므스가 깨어난 날이 세타니가 태어난 날과 겹치는 바람에 세타니로서는 두 배…. 아니, 그 이상의 축복과 기쁨을 느꼈고, 자신의 기도발과 와투루의 능력(?)을 신봉하게 되었다.
“하지만, 깨어난 카므스는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어….”
무너진 통나무에 머리를 다쳤기 때문이었을까?
아니, 그것 말고는 딱히 이유가 없어 보이는 후유증이 카므스에게 일어났다.
오늘 내가 보고 느낀 그 모습으로의 변화가 그것이었다.
“그래도 다들 카므스를 걱정하고 아껴. 론도 겉으로는 놀리고 무시하지만, 속마음은 안 그래.”
마을 회관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세타니의 얘기도 끝이 났다.
얘기를 듣는 동안에도 그랬지만, 다 듣고 나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잠시 틈을 주던 세타니가 내 손을 잡고는 아래쪽으로 살짝 잡아당겼다.
“…??”
뭔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다가는 허리를 숙이고 자세를 낮췄다.
그러자 세타니가 내게 바짝 다가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건 진짜 비밀인데… 나는 커서 카므스랑 결혼할 거야.”
세타니의 맹랑한 고백에 말을 잃고는 눈만 깜빡거렸다.
그런 내게 히죽 웃어 보인 세타니가 목소리를 조금 키우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너랑 나랑은 그냥 친구로만 지내기로 해. 알았지?”
고백의 절차도 없이 퇴짜를 맞았다.
아니,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일에 대놓고 받은 까임이었다.
별것 아니라 여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실제로 당해보지 않았다면 말을 말자.
그에 대한 정신적 충격과 마음의 상처는 의외로 강력한 것이었으니까.
모든 사고가 정지하는 기분.
뭐라 반박조차 못 한 채, 멍을 때려야만 했다.
“오늘 즐거웠어. 다음에 또 봐!”
충격으로 정신이 나간 나를 두고서 세타니는 그렇게 떠나갔다.
떠나가는 세타니의 뒷모습은 더없이 천진난만하고, 생기발랄해 보였다.
마치, 나에게 친구로만 지내자는 퇴짜의 말이 진심이라는 듯… 내가 받은 상처나 충격은 전혀 아랑곳이 없다고 느껴질 만큼이었다.
….
“아, 주인님.”
마을 회관의 문을 열자마자, 차를 마시던 린이 반응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손을 들어 그대로 있으라 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어디를 다녀오신 건가요?”
내가 어디에 갔었는지도 궁금한 눈치였지만, 론과 함께한 마을 구경의 후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표정과 느낌이 더욱더 강렬했다.
자고로 여자는 남의 얘기를 들어 주는 것도 좋아하지만,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고, 그것에 공감하는 이를 훨씬 더 좋아한다… 고, 어딘 가에서 읽은 기억이 있었다.
“그냥… 넌 어땠어? 뭐, 재미난 거라도 있었어?”
내 이야기는 흘리고, 린의 얘기를 들어보자는 뜻을 자연스럽게 이어 갔다.
린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것저것 구경도 많이 하고 많은 분과 인사도 나눴습니다.”
기분 좋게 포문을 연 린의 이야기가 줄줄이 쏟아졌다.
적당한 리액션으로 대응하며, 담아도 그만, 흘려도 그만인 고만고만한 수다를 들어 줬다.
“재미는 일이 많았구나?”
“네,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린의 표정이 진심을 말해 주고 있었다.
….
린의 이야기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오식이가 돌아왔다.
녀석의 표정은 린과 반대로 심각해 보였다.
‘대체 뭘 하고 다니기에… 쩝!’
걱정과 궁금증에 대화를 좀 해 보려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하필 그 타이밍에 론이 저녁 식사를 챙겨 왔기 때문이었다.
“비그 씨는요?”
린이 물었다.
순간, 론이 미간을 꿈틀거렸다.
피식하니 웃음이 나왔다.
파스트의 명에 우리의 식사를 담당한 것은 비그였다.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기에 어쩌면 린의 물음은 당연한 일이라 볼 수 있었다.
사심이라고는 단 1도 없는… 그저, 갑자기 바뀐 상황에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 내지는 반응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린을 보는 시선이 남다른 론의 입장에서는 그마저도 불편하고, 불쾌한 일인 모양이었다.
당장에 표정의 변화를 드러내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담아 투덜거리듯 말하기도 했다.
“손님들께서 드셔야 할 고기를 비그 녀석이 다 먹어 치우는 게 어디 말이나 될 일입니까? 그래서 이번엔 제가 대신 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론의 심정을 헤아린다거나 분위기를 유하게 풀어 가기 위해서는 녀석의 편을 들어 주는 게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러한 상황조차도 생각지 않는 린은 평소와 다름없이 반응했다.
“아아… 저희는 괜찮은데… 그렇죠, 주인님?”
린의 물음에 한 번 더 피식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난 좋았는데? 먹는 것도 복스럽고, 유쾌해서 식욕도 돋고 말이야.”
말을 하며 론의 반응을 살폈다.
예상대로 녀석의 표정 변화는 가관이었다.
의도하거나 예상한 바는 아니었지만, 린이 나를 도와 녀석의 가슴에 비수를 꽂기도 했다.
“맞아요, 먹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저도 자꾸만 보게 되더라고요.”
내 말보다 몇 배나 강력한 린의 촌철살인에 결국 론이 폭발했다.
“나, 나도 잘 먹거든요? 녀석보다 훨씬 더 잘 먹는다고요!”
그러고는 다짜고짜 고기를 집어 들고서 미친 듯이 우적거리며 먹기 시작했다.
뭐, 제 딴에는 뭔가를 보여 주고 싶고, 린의 환심을 사려는 행동이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실수.
먹는 것에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비그와는 전혀 다른 의도나 마음가짐은 물론, 악에 받친 현재의 흥분 상태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전혀 귀엽지도, 복스럽지도 않은… 정말이지 게걸스럽고, 더러우며, 처절하기까지 하여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모습을 보여 줄 뿐이었다.
그러한 론의 멍청한 짓거리는 나와 린을 넘어서 오식이의 심기까지 건드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놈이… 신성한 고기를 두고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콰아앙!
오식이의 무시무시한 불꽃 꿀밤을 맞은 론은 고깃덩이를 입에 문 채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