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74)
스윽….
약간의 거리를 둔 채, 그녀의 주변을 돌며 찬찬히 살폈다.
‘흐미, 목덜미도 예쁘네.’
풍성한 보랏빛에 제법 길 것 같은 머리카락을 바짝 틀어 올려 둥글게 말아 낸 헤어스타일.
그에, 고스란히 드러난 가늘고 새하얀 목덜미가 감탄을 자아냈다.
할 수만 있다면, 가까이 다가가 코를 박고서 향기를 음미하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바로 남성적 반응이 일었다.
그러자 대담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뭐, 어때? 못 할 것도 없잖아?’
과감하고, 므흣한 그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상상만 해댈 뿐 가까이 다가가거나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알다시피 내가 쫄보라서 겁이 났거든….
“후우….”
긴 한숨과 함께 흥건해진 손바닥의 땀을 바지에 문지르고는 다시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그녀는 메이드라는 말을 떠올렸을 때, 대부분이 상상하는 그런 복장을 착용하고 있었다.
판타지 풍의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등에서 나오는 바로 그 모습.
제법 타이트한 상의와 이어지는 풍성하면서도 지극히 짧은 주름치마에 새하얀 앞치마를 걸친… 뭐, 레이스와 리본 같은 것들은 기본이고 말이다.
‘대체, 얼마나 조인 거야?’
앞에서는 평범하다고 느꼈지만, 뒤태에서는 확연하게 보이는 허리의 잘록함.
그것을 더욱더 돋보이도록 조여댄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사실, 그보다는 그 아래쪽의 풍성한 주름치마와 그 안에 숨겨진 것에 더 신경이 쓰이긴 했다.
‘보일지도 모르겠는걸?’
그녀가 살짝 허리를 굽힌다던가 아니면, 내 쪽에서 자세를 낮춘다면 충분히 보이지 싶었다.
“…?!”
상상과 함께 잠시 넋이 나갔었던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내 허리가 반쯤 꺾이고, 고개 또한 기울어 있었다.
남자의 본능에 충실한 내 행동에 칭찬을 해 주고 싶었다.
‘조, 조금만 더….’
정신을 차리고 나니,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삐걱거리는 허리를 좀 더 꺾으려 애를 썼다.
그러다가 따갑게 날아드는 시선을 느꼈고, 슬그머니 시선을 옮겼다.
‘뜨억!’
언제 그랬는지, 고개를 뒤로 돌리고서 나를 쳐다보는 그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아니, 앞머리로 눈을 완전히 가린 터라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지만, 느낌상으로 그녀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바딱!
진심으로 놀라서는 나도 모르게 몸을 원상 복구… 각이 제대로 잡힌 차려 자세를 취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발뺌을 했다.
뭐, 그래 봤자 이미 늦었다는 걸 충분히 인지한 터라,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크나큰 아쉬움도 밀려왔다.
‘크으, 까비….’
계속해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다 알고 있음에도 모른 척, 그녀가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잠시 그대로 있다가는 헛기침 몇 번과 함께 슬그머니 걸음을 옮겼다.
다시 그녀의 앞에 섰다.
묵직한 침묵 속에 한참이나 마주 보고만 있었다.
더 묵직해 보이는 것이 눈앞에 떡 하니 있기에 전혀 지루하거나 할 틈이 없었다.
그때였다.
[경고!]
[스킬 ‘교감’의 제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대상(클린)과의 ‘서약’을 서두르세요.]
제발 들리지 않았으면 했던 신비한 목소리와 진정 오지 않았으면 했던 제한 시간의 압박이 날아들었다.
‘아, 안 돼! 정신 차리자. 서둘러야 해!’
완전히 정신을 차리고는 서둘러 가방을 뒤졌다.
그런 뒤 이 순간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물건들을 꺼냈다.
지금껏 교감을 통해 서약을 맺은 경우를 종합해 봤을 때, 대상이 좋아하는 것이나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 호감도가 올라가면서 일이 성사됐다.
더불어 이미 처음부터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워낙에 제멋대로라 가능성이 희박하긴 했지만, 이런 날이 오기를, 이 순간이 오기를 바라고 소원했다.
그래서 진작부터 준비했다.
그녀가 무엇을 좋아할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나름 신경을 쓰고, 적절할 것 같은 것들로 말이다.
아,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기지만, 수시로 찾아본 그 어떤 정보들 속에서도 그녀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는 찾을 수가 없었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라, 다른 괴물도 마찬가지였다.
이름과 레벨, 타입과 속성은 물론, 사용하는 스킬과 대략적인 특성, 심지어 키나 몸무게 같은 것들도 다 있었지만,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팬클럽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그녀였지만, 실상은 저택 1층으로 들어온 이들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20레벨의 괴물이었다.
전투와 사냥에 필요한 정보 외의 것들은 딱히 의미조차 없었던 것.
아무튼.
해서, 고민하고 신경을 써 준비했지만,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운에 맡길 수밖에… 그래도 제발 좋아했으면 좋겠다. 아니, 싫어도 그냥 좀 좋아해 줘라!’
간절한 마음으로 준비한 물건 하나를 손바닥에 올린 채, 그녀의 앞으로 조심스레 내밀었다.
네모반듯하게 접힌 하얀색의 천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조바심에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작고, 소심한 투가 역력했다.
“이거….”
“…??”
그제야 그녀가 반응했다.
순간, 기쁨과 놀람에 소리를 낼 뻔했다.
살짝 겁도 났고, 긴장감도 치솟았다.
스윽….
용기를 바짝 끌어내며, 조금 더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한 번 반응을 보였기 때문일까?
그녀가 조금 더 적극적인 태세를 보였다.
그에, 치솟던 긴장감이 확 사라졌다.
기회다 싶은 마음에 나 역시 적극적인 어필을 펼쳤다.
“이거 너 줄게.”
“…??”
“아, 이게 뭐냐면….”
손에 들린 것을 주섬주섬 잡고서는 툭 하고 내리쳤다.
곱게 접힌 천이 확 펼쳐지며 본 모양새를 드러냈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것과 비슷하게 생긴 새하얀 앞치마였다.
“어때? 예쁘지?”
“….”
“선물이야. 그러니 잘 썼으면 해.”
친절함을 가득히 담아 말하고는 앞치마를 조금 더 앞으로 내밀었다.
속으로는 간절한 바람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제발… 제발….’
그런 내 간절함이 통했다.
스윽….
그녀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서는 앞치마를 받아들었다.
살짝 무릎을 굽혔다가 펴며 감사의 뜻도 표했다.
‘오예!’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라? 뭐야? 왜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지?’
그녀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줬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였고, 감사의 뜻도 표했다.
분명, 좋아하는 것이니 그랬을 것이다.
그럼 끝난 것이다.
당연히 신비한 목소리가 서약이 맺어졌음을 알려 와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게 전혀 없었다.
‘뭐지? 혹시, 내가 잘못 알고 있던 건가?’
좋아하는 것을 주거나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 서약이 맺어진다고 여겼던 내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닐까 의심도 했다.
‘아, 모르겠다. 인제 어쩌지? 어째야 하지?’
진심으로 멘붕이 왔다.
신비한 목소리의 시간제한 경고가 곧 날아들 것만 같아 더욱더 초조하고 다급해졌다.
‘아아, 씨발… 미쳐 버리겠네!’
발까지 동동 굴렀다.
그러다가 옆에 내려놨던 가방과 그녀를 위해 준비했던 다른 물건을 건드렸다.
‘아, 이것도 있었지?’
당장에 다른 물건을 집어 들었다.
곧장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 이것도 가질래?”
“…??”
“아, 이건 말이지….”
앞치마와 함께 준비했던 물건은 파란색 액체가 담겨 있는 분무기식 통… 창문 등을 닦을 때 쓰는 유리용 액체 클리너였다.
다시 말하지만,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정보에 혼자서 많은 고민과 신경을 썼다.
그렇게 해서 준비한 것이 앞치마와 클리너다.
사람들이 말하는 그녀의 특성상 그런 것들을 좋아할 것 같았다.
사실, 빗자루와 쓰레받기, 먼지를 털어내는 채를 가장 먼저 생각했지만, 길이나 부피 때문에 가방에 늘 챙겨 다니기가 뭐해서 포기했다.
심지어 진공청소기도 떠올리긴 했었다.
“이렇게 해서… 이렇게… 또 이렇게….”
손짓에 발짓까지 동원하여 클리너의 사용법과 효과를 설명했다.
그녀의 반응이 전보다 좋았기에… 아니, 내가 다급했기에 더욱더 열을 올렸다.
“어때? 좋아 보이지? 이것도 너 줄게!”
한껏 기대감을 증폭시키며 그녀에게 클리너를 건넸다.
이번에도 그녀가 조심스레 클리너를 받아들고는 전과 같이 무릎을 굽혔다가 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제발, 이번엔 돼라!’
전보다 더욱더 간절한 마음으로 신비한 목소리를 기다렸다.
1초… 2초… 3초….
10분 같은 10초가 흘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신비한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아아악! 이, 이게 뭐야? 이러면 안 돼!”
양손으로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짜증이 확 일었고, 이제는 끝이란 생각에 차오른 분노를 그녀에게 표출했다.
“야! 받을 거 다 받아 놓고 왜 이래? 먹튀야? 쌩까는 거야? 어? 그런 거야?”
“….”
“말을 해! 뭐라도 좀 해 보라고!”
나의 지랄 같은 분노의 외침에도 그녀는 무반응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답답한 마음에 다시금 목소리를 높였다.
“야! 내가 너 좀 가지면 안 되냐? 어? 그럼 안 되는 거야?”
말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솔직한 심정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이상한 말에 반응한 것인지,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린린….”
전혀 반응이라곤 없던 그녀가 드디어 뭔가 말을 한 것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에, 재촉하고 다그쳤다.
“으응? 뭐라고? 다시 말해 봐!”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며, 어째 좀 수줍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내 머릿속으로 그녀의 말이 전달됐다.
―저를 원하시나요린?―
진심으로 놀랐다.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도 했다.
하지만,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로 애절함과 다급함을 동시에 표하며 빠르게 말했다.
“어! 원해! 널 원한다고!”
내 외침에 잠시 틈을 준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저의 새로운 주인님이 되어 주시겠어요린?―
당연했다.
원하고, 바라던 바였다.
그랬기에 이렇게 미친 듯이 발광하고, 핏대까지 세운 게 아니겠는가.
다시금 고개를 사정없이 끄덕거렸다.
“어! 내가 너의 새로운 주인이 될게! 그러고 싶어!”
이번에도 그녀가 잠시 틈을 줬다.
그러더니 무척이나 미안하고,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그러려면, 저를 사 주셔야합니다린.―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어째 좀 웃긴 얘긴 듯했지만, 그녀는 메이드다.
이 저주받은 저택에서 일하는 직원? 노예?
아무튼, 그런 것이다.
그런 의미대로라면, 그녀의 새로운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몸값을 지불해야 한다.
생각할수록 정말로 웃기고, 엉뚱한 얘기 같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런 스토리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해서, 확인도 할 겸 바로 물었다.
“너를 사야 한다고? 돈 주고 사는 것 말이지?”
―그렇습니다린.―
“얼마나 필요하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저의 몸값은 3만 나바입니다린.―
“3만 나바? 그게 얼만큼인데?”
내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급함에 가방부터 뒤졌다.
그러다 아예 뒤집어서 안에 있는 것들을 죄다 쏟아 냈다.
와르르르….
가방 안에 들어 있던 것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들을 빠르게 눈으로 훑다가는 실망과 안타까움의 소리를 흘려 냈다.
“젠장….”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애초에 사냥을 하러 던전에 들어오면서 돈을 가지고 들어 올 턱이 없었으니까.
‘아, 이렇게 끝나는 건가?’
진정으로 아쉽고, 허탈했다.
그때였다.
그녀가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보다가는 손가락으로 뭔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 저런 게 30개면 3만 나바입니다린.―
당장에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마정석… 정원사를 잡아 얻은 15레벨 마정석이 떨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