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32)
깜빡 졸았는지, 아니면 멍을 때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식이가 붙잡고 있던 뿔토끼를 놓쳤다.
나 역시, 반복된 패턴에 방심했다.
오식이를 너무 믿은 것도 있었다.
어쨌든.
오식이의 손아귀를 빠져나온 뿔토끼가 허공에서 한 바퀴 돌며 바닥에 착지했다.
그러고는 냅다 점프하며 몸을 비틀었다.
뾰족한 뿔을 앞세운 드릴 같은 공격이 나를 향했다.
“….”
완벽하게 피할 수 있는 타이밍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고, 당황도 했으며, 거리도 제법 가까웠던 탓이었다.
겨우겨우 머리를 옆으로 젖히고, 허리를 살짝 비트는 정도였다.
정통으로 당하거나 치명상까지는 아니어도 분명히 놈에게 당할 위기였다.
그때였다.
[특별한 상황에 의해 스킬 ‘교감’이 자동으로 발동합니다.]
신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주위의 풍경이 쭉쭉 늘어나듯 변화했다.
‘어라? 이, 이게 뭐야?’
더욱더 당황했다.
내 사정은 아랑곳없이 늘어나고, 흐려지던 풍경이 어느새 하얀색으로 물들었다.
“…?!”
언젠가 봤던… 오식이를 처음 만나 대면(?)했던 때와 같은 상황이 그대로 연출되고 있었다.
“까득….”
나를 향해 뾰족한 뿔을 들이대며 날아들던 뿔토끼가 허공에 뜬 상태로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이를 살짝 갈기는 했지만, 눈빛이나 표정이 온화해 보였다.
놈을 살피는 와중에 신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간 내에 대상(뿔토끼)과의 ‘서약’을 체결하세요.]
모든 게 그때와 똑같았다.
그나저나, 서약이라고?
아니, 지금은 교감부터 따지고 봐야 할 듯싶다.
다들 알겠지만, 내가 가진 스킬은 ‘교감’, ‘봉인’, ‘소환’, 이렇게 세 가지다.
덜렁 세 개뿐인 스킬이고, 이미 봉인과 소환은 여러 번 사용하는 모습도 보여 줬다.
교감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말을 안 했을 뿐, 특성 개화를 한 초기에 신물이 나도록 썼다.
나름 별의별 짓을 다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전혀 발동되지 않았고, 이렇다 할 기미나 현상 같은 것도 없었다.
해서, 고민을 좀 하다가 잠시 내려놓은 상태였다.
‘뭐, 언젠가는 해결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러던 게 지금 제멋대로 발동이 됐다.
‘특별한 상황이라고?’
오식이 때도 그랬었던 것 같다.
그때도, 지금도 특별한 상황이긴 했다.
피할 수 없는 공격을 받기 직전의 타이밍.
‘설마, 이런 지랄 같은 상황에서만 발동이 되는 건가?’
확실치는 않지만, 염두에 두어야만 할 부분이었다.
….
“흠….”
숙제가 남은 의문 뒤로 고민의 시간이 다가왔다.
첫째, 뿔토끼와의 서약을 어떻게 체결할 것인가?
오식이의 경우는 샌드위치로 서약이 이루어졌다.
늘 배가 고픈 녀석이었기에 먹을 것이 주가 된 것이었다.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것이나 원하는 것을 주면 서약이 체결되지 않을까 예상했다.
‘이놈들은 뭐를 좋아하지?’
뿔토끼가 좋아할 만한 것을 떠올려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풀’ 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놈들은 늘 풀을 뜯어 먹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당장에 풀을 구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미리 준비를 한 것도 아니고, 지금 나와 뿔토끼가 있는 곳은 그저 하얀색으로 도배된 채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으니 말이다.
“킁!”
코를 킁킁거리고는 다음의 고민을 떠올렸다.
과연 뿔토끼와의 서약이 필요한가였다.
3레벨의 뿔토끼는 확실히 나보다 강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보다 훨씬 강한 오식이가 있었다.
굳이 레벨도 낮고, 왠지 의사소통 자체도 불가능할 것 같은 토끼 놈을 부리거나 할 이유가 없었다.
‘오식이가 동족들을 잡아서 구워 먹었다는 걸 알게 되면, 한바탕 난리가 나려나?’
쓸데없는 걱정 같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부분도 마음에 걸렸다.
‘그래, 필요도 없는 데, 뭐하러….’
결국, 서약을 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곧장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놈과 서약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어떻게 전달하느냐였다.
‘뿔토끼와 서약하지 않겠어!’, ‘너와 서약하고 싶지 않아!’, ‘상황 종료!’, ‘교감 해지!’ 등등…. 소리도 질러보고, 놈을 향해 말도 걸어 봤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체, 어쩌라고… 쩝!”
입맛을 다시며, 다른 방법을 찾았다.
그러던 와중에 신비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경고!]
[스킬 ‘교감’의 제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대상(뿔토끼)과의 ‘서약’을 서두르세요.]
“췟! 서두르긴 뭘 서둘러? 서약 안 할 거라니까!”
신비한 목소리의 말에 대꾸하듯 투덜거렸다.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금 신비한 목소리가 경고를 알려왔다.
[경고! 경고!]
[스킬 ‘교감’의 제한 시간이 끝났습니다.]
[대상(뿔토끼)과의 교감이 해제됩니다.]
신비한 목소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얀 공간이 팽창했다.
“앗!”
같은 상황을 한 번 경험했던 적이 있기에 바로 기억이 떠올랐다.
당장에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온몸에 힘을 줬다.
꾸우우욱….
몸을 짓누르는 묵직한 압박감이 이어졌다.
“끄으응….”
….
잠시 후.
묵직한 압박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동시에 오식이의 으르렁거림이 들려왔다.
“크르륵!”
그러고는 오른쪽 어깨를 강하게 밀치며 날아든 찡한 통증이 이어졌다.
“읏!”
본능적으로 오른쪽 어깨를 감싸 쥐며 인상을 구겼다.
어깨를 감싸 쥔 왼쪽 손바닥으로 찢어진 옷의 감촉이 느껴졌다.
‘뭐지?’
바로 상황 파악에 나섰다.
비틀어진 몸과 고개, 시야 덕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뿔토끼의 뒷모습이었다.
“…?!”
처음엔 의아했다.
그러나 이내 상황 파악이 됐다.
‘맞다. 실제로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지?’
상당히 긴 하얀 공간에서의 교감 시간.
하지만, 실제의 시간은 거의 찰나일 정도로 짧다.
오식이 때도 그랬으니, 분명 지금도 그랬을 것이다.
교감으로 하얀 공간에 들어서기 직전, 뿔토끼 놈이 나를 향해 달려들던 상황이었다.
만약, 뿔토끼와 서약이 이루어졌더라면, 놈은 카드에 봉인되고, 상황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해제됐을 터였다.
하지만, 서약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상황은 그대로 연결.
나를 향해 날아들던 놈이 내 어깨를 치고서 뒤로 넘어간 것이 확실했다.
“까드득….”
놈이 이를 갈며 몸을 돌려세웠다.
‘먼저 공격해야 해!’
빠른 판단이 섰다.
하지만, 판단만큼 빠르게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놈의 공격을 받으면서 손에 들고 있던 아수라 스워드를 놓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늦다.’
땅에 떨어진 아수라 스워드를 줍고, 놈을 공격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모자랐다.
이미 상황을 살피고, 생각을 하느라 시간은 더 지체되어 있었다.
지금은 그냥 몸을 피하는 게 먼저였고, 그것밖에 할 게 없었다.
“이잇!”
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놈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 사이 뿔토끼는 몸을 완전히 돌려세웠다.
그러면서 다시금 내게 달려들 작정으로 뒷다리의 근육을 강하게 조이고 있었다.
‘모자라….’
아직 놈의 공격이 닿을 거리였다.
놈이 점프를 하는 순간까지 조금 더 거리를 벌릴 수는 있었다.
그래도 전혀 안심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날아옴과 동시에 피해야 하나?’
그러는 게 최선이었지만,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젠장!”
나도 모르게 쓴소리를 뱉어 냈다.
그러나 이렇게 낙담하거나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잠시 잊고 있던… 내게는 너무나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으니까.
“크르륵!”
등 뒤에서 오식이의 으르렁거림이 들려왔다.
거의 동시에 엄청난 세기의 바람이 일었다.
거대하고도 묵직한 것이 쌩하니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만 가까웠어도 저 멀리 튕겨 나갔을 것만 같은 강렬한 여운이 전해졌다.
강렬한 여운을 남기며 내 옆을 스쳐 지나간 것은 당연히 오식이였다.
녀석 때문에 잠시 잠깐 나갔던 넋이 돌아왔다.
그 사이 녀석의 손에 붙잡힌 뿔토끼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바둥바둥….
뿔토끼가 강렬히 저항했다.
오식이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녀석의 듬직한 모습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역시, 뿔토끼 따위는 얻을 필요가 없어!’
….
저녁 무렵까지 사냥을 계속 이어 나갔다.
뭐, 레벨은 오르지 않았다.
“오늘은 이쯤하고 돌아갈까?”
방금 잡은 뿔토끼가 남긴 마정석을 챙기고는 사냥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제법 묵직하군, 흐흐!”
토끼 놈들의 이빨과 뿔토끼의 뿔, 자잘한 크기의 마정석으로 가방이 묵직했다.
“아, 맞다! 저것들도 잘 챙겨!”
한 쪽에 쌓아 놓은 뿔토끼의 사체를 가리켰다.
뿔이나 마정석을 남기지 않은 채, 두 동강이가 난 놈들이었다.
오식이가 침을 질질 흘리며 뿔토끼의 사체를 한데 모아들었다.
“크륵….”
녀석이 욕심을 부리며 어떻게든 전부 가져가려고 기를 썼다.
자꾸만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통에 시간이 지체됐다.
“야야! 먹을 만큼만 가져가!”
내 호통에 움찔한 녀석이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반 이상을 내려놓았다.
그것만으로도 오늘 먹을 양은 차고 넘칠 듯했다.
“아쉬워하지 마! 대신에 내일은 큼직한 자루라도 하나 챙겨 줄게!”
당장에 오식이를 달래기 위해 한 말은 아니었다.
녀석과 먹기 위해 이틀 내지는 사흘에 한 번씩은 고기를 사와야 했다.
그러나 오식이가 뿔토끼를 먹게 된다면, 그 수를 한참이나 줄일 수 있었다.
돈도 굳고, 노출과 외출을 피할 수 있으니 모든 면에서 이득이었다.
“얼른 가자!”
올 때 와는 다르게 내가 앞장서서 던전 입구로 향했다.
….
던전을 빠져나와 짐을 정리한 뒤, 내가 먹을 고기를 들고는 다시 던전으로 들어왔다.
근처에서 불을 피웠고, 이내 고기를 구웠다.
오식이는 옆에서 뿔토끼의 털과 가죽을 벗겨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문득 기가 막힌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야, 그거 좀 줘 봐!”
“크륵?”
무자비하게 벗겨낸 뒤,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치고 있는 뿔토끼의 털가죽 하나를 받아들었다.
피가 덕지덕지 묻은 걸레짝 같아 더럽기는 했지만, 내 생각처럼 쓰기에는 괜찮을 듯싶었다.
“야, 아무렇게나 버리지 말고, 죄다 모아 놔!”
“크르르….”
오식이가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
그러더니 내 말대로 털가죽을 한곳에 모았다.
그 사이, 불에 올려놓은 고기가 알맞게 익어 좋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으음… 내 것은 다 익었다. 이제 너도 구워!”
내가 먹을 고기를 꺼내고, 오식이가 뿔토끼를 굽기 시작했다.
지글지글….
“…?!”
점심때는 배도 부르고, 잠결에 정신도 없어 몰랐는데, 시작부터 엄청나게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적당한 기름기를 두르고 있는 육질도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이거 진짜 맛있는 거 아냐?”
의문과 함께 혼잣말을 흘렸다.
머릿속으로 오식이의 말이 곧장 전달됐다.
―맛… 있… 다….―
오식이는 익어가는 뿔토끼 고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야, 다 구워지면 조그만 떼 줘. 나도 좀 먹어 보게.”
내 말에 오식이가 팔을 뻗어서는 고기를 가렸다.
안 주겠다거나 뺏길 수 없다는 뉘앙스의 표현이었다.
“인마! 누가 다 먹겠대? 조금만… 요만큼만 달라고!”
“크륵….”
“아 놔, 내가 지금껏 고기를 얼마나 먹여줬는데… 너 그러면 안 돼!”
“크르르….”
“허… 너 자꾸 이러면 내일은 뿔토끼 밭으로 안 갈 거야!”
“크륵!”
그제야 녀석이 마지못한 듯 팔을 치웠다.
그러고는 알맞게 익은 뿔토끼를 불에서 꺼내 내게 건넸다.
아까움과 머뭇거림, 아쉬움과 애절함 등, 온갖 그렇고 그런 느낌을 여과 없이 표출하고 있었다.
“야야, 다 안 먹어! 요정도면 된다고!”
오식이가 건넨 뿔토끼 고기의 살점을 조금 떼어냈다.
어차피 녀석은 내장까지 다 먹는 터라 통째… 아니, 반 토막이 난 뿔토끼를 그대로 구웠기에 그냥 먹기에는 솔직히 좀 그랬었다.
“크륵!”
녀석이 반색하며 좋아했다.
진짜, 웃기지도 않는 짬뽕 같은 놈이었다.
아무튼.
떼어낸 뿔토끼 고기를 조심스레 입으로 가져갔다.
“오물오물… 와우!”
진심, 놀라운 맛이었다.
‘이거 자루 하나 가지고는 모자라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