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24)
각성자가 레벨을 속이는 건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다.
자기 입으로 사실을 말한다거나 그 레벨에 맞는 특징을 내비치지 않는 한, 특별히 알아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레벨 업이 된다고 해서 특이한 이펙트나 상황 등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저, 당사자만 그런 줄 알뿐이었다.
또, 각성자의 레벨이나 클래스, 직업 등을 판별하는 기술 및 장치 같은 것도 없었다.
뭐, 정부 쪽에서 일하는 각성자들은 자신의 기본 프로필 같은 것들을 기록하거나 변화 등을 보고 한다지만, 그것마저도 스스로 해야 할 일이었다.
그 외의 각성자들은 단순히 ‘나 각성했습니다’하고 헌터 협회에 가서 말하면, 몇 가지 확인 후에 등록이 이루어지고, 이후로는 따로 찾을 일조차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애초에 자신의 레벨을 속이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
특히나 정인영처럼 자신의 레벨을 낮춰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왜냐고?
인간은 워낙에 뽐내고, 자랑하기를 좋아하니까.
반대로 무시당하고, 괄시당하는 걸 좋아하는 이는 없을 테니까.
예로, 내가 1레벨이었음을 밝혔을 때, 최 씨가 비웃었던 것과 같은 상황, A 클래스임을 밝혔을 때, 모두의 관심과 부러움, 질투의 대상이 된 상황 중, 어느 쪽이 나은지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로 자신의 레벨이나 클래스 등을 높게 부풀려 말하는 이들이 있을 수는 있겠다.
뭐, 그에 걸맞은 스킬이나 기타의 것들에 들통이 나기도 할 것이고, 괜히 감당도 안 되는 상황에 놓여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기에 될 수 있으면 그러지 않는 게 좋을 듯하지만 말이다.
….
“훗!”
김 씨의 어리바리하고, 느릿한 동작 때문이었을까?
정인영이 피식하고 웃었다.
이번에도 내 예상이 맞았다는 생각이 확 전해졌다.
아니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이어진 상황이 전혀 예상 밖으로 흘렀기 때문이었다.
“아, 귀찮아.”
여전히 제 팔을 부여잡은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최 씨.
최 씨를 향해 느릿하게 엉거주춤 다가서는 김 씨.
그런 그들을 무시하듯 돌아서며, 외면하는 정인영이었다.
아직 상황이 마무리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싸우던 적을 그대로 두고서… 게다가 새로이 적 한 명이 더 추가되려는 상황에서 귀찮다며 등을 돌린다니.
이것이 레벨 10의 위엄이고, 스웨그일까?
아니면, 넘쳐나는 여유로움과 허세에 취해, 실수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것일까?
정답은 3번이었다.
그랬다.
뭐로 봐도 우세인 정인영에게는 믿고 있는 히든카드마저 있었다.
처적!
언제 내려놓은 활과 화살을 집어 든 지는 모르겠지만, 김지유와 오민주가 김 씨를 향해 활을 겨누고 있었다.
“헐….”
진심, 생각이나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반전의 상황에 입이 떡 벌어졌다.
레벨을 감쪽같이 속인 것은 뭐,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같은 무리인 것까지 감춘 것은 왜일까?
도저히 영문도 모르겠고, 이유도, 이해도 가늠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황당하고, 당황했을 최 씨가 먼저 반응을 보였다.
“뭐, 뭐야? 니, 니들 다 한 패였어? 이런, 젠장….”
최 씨의 반응에 그제야 상황이 파악된 걸까?
김 씨가 뒤를 돌아보며, 여전히 어리바리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어…?”
그것이 그의 마지막 반응이었다.
퓩! 퓩!
정확히 두 발의 화살이 김 씨의 심장과 미간에 박혔다.
스으윽….
마치, 쓰러짐마저 느릿한 김 씨였다.
마지막은 육중한 몸만큼이나 묵직했다.
쿠우우웅!
“벼, 병환아아!”
최 씨의 절규로 가득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 느낌 그대로 정인영을 향한 분노의 일갈이 이어졌다.
“이런, 미친 X!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정신 나갔어?”
최 씨의 분노로 가득한 외침에도 정인영은 꿈쩍하지 않았다.
아니, 이전보다 안정된 듯한 표정과 여유로움으로 최 씨의 물음에 답했다.
다분한 놀림의 뉘앙스가 짙기는 했다.
“뭐 하는 짓이긴, 쓰레기들 정리 중이잖아? 보고도 몰라?”
정인영의 대답에 이를 갈던 최 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이건 범죄라고! 그것도 중범죄!”
맞는 말이었다.
살인은 중범죄 중의 중범죄다.
각성자가 일반인을 살해하는 것을 0순위로 치지만, 각성자와 각성자, 일반인과 일반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살인도 1순위다.
“풉!”
정인영이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비웃음에서 뭔가 또 다른 카드가 있음을 직감했다.
“중범죄? 그걸 누가 판단할 건데?”
“…??”
“아니, 지금 이 상황을 누가 알 건데?”
그랬다.
우리… 일곱 명밖에 없었다.
일곱 중, 네 명의 여자들은 한 편이었다.
한 명은 죽었고, 한 명은 적대다.
나머지 한 명은 이번 일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나뿐이었다.
움찔!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는 빼 줬으면 한다는 의미.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의미.
최 씨와 엮이고 싶지 않고, 그녀들과 적대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
일절 대들지 않고, 쥐죽은 듯 얌전히 있겠다는 의미를 모두 담은 행동이었다.
스윽….
최씨를 제외한 네 명의 시선이 내게서 멀어졌다.
“하아….”
그녀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만큼 아주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찌릿!
최 씨가 날려대는 원망의 눈빛과 시선은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여기 네 편은 없는 것 같은데?”
정인영이 다시 놀리듯 말했다.
내게 날리던 원망의 시선을 거둔 최 씨가 정인영을 노려봤다.
그러고는 대체, 무슨 깡으로 하는 짓인지 모를 멍청한 소리를 지껄여댔다.
“내가 있잖아! 나는 내 편이라고!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나가자마자 신고할 거야!”
‘이런 병…’이란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이 머저리 같은 놈은 지금 자신의 상황이 어떤지 파악조차 못 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하도 어이없는 일을 당해서 정신이 나간 것일까?
뭐가 됐든, 최 씨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지껄였고, 그것을 정인영은 너무나 가볍게… 그래서 더 소름 돋게 하며, 일단락 지었다.
“응, 그래서 너도 죽일 거야!”
크으….
내 그럴 줄 알았다.
가만히 있어도 모자랄 판에 뭐 먹을 게 있다고 쓸데없는 도발을 해서 아까운 목숨줄을 재촉하느냔 말이다.
아, 아닌가?
도발이니 뭐니 상관없이 애초부터 죽을 운명이었고, 죽일 생각이었으려나?
‘흐음….’
아무래도 그랬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무튼.
정인영이 너무나 가볍게 날린… 하지만, 살벌하기 그지없는 말에 최 씨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했다.
그에, 시뻘게진 얼굴로 눈알을 부라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 죽여라, 죽여! 그래도 언젠가는 네년들의 악행이 모두 밝혀질 거야!”
나름 비책이 될지도 모를 말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내가 앞서 직감했던 또 다른 카드를 정인영이 내밀었다.
“쉽지 않을걸?”
“…??”
“여긴 프록 밭이라고! 그것도 완전히 소탕된 프록 밭. 게다가 저기 보이는 건 뭘까? 후훗!”
정인영이 턱짓과 눈짓으로 가리킨 곳을 쳐다봤다.
단번에 그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이 됐다.
워낙에 사람들이 발길을 들이지 않는 곳 중 하나가 프록 밭이었다.
이유는 앞서 설명했으니 패스.
거기에 단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싹쓸이가 됐다면, 어느 쪽으로 들어오든 간에 다들 초입에서부터 발길을 돌릴 게 뻔했다.
그냥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고 해도 발견되기가 쉽지 않다는 소리다.
그런데, 정인영은 한 가지 장치를 더 걸어 버릴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바로 호수였다.
프록 밭 중앙의 늪지대와 연결된 호수 말이다.
그곳에 시체를 던져 버린다면, 이 일을 알고 있는 이를 제외한 그 누구도 찾을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다가 던전이 완전히 정화되어 사라져 버리면, 이것은 실로 완전 범죄.
뭐, 그전에 시체가 썩고 부패하여 사라지는 게 먼저일지도 모르지만, 이러나저러나 증거는 사라지게 되는 일이었다.
너무나 완벽해 보이는 그녀의 계획에 최 씨는 할 말조차 잃은 듯했다.
하지만, 짜증과 분노, 억울함은 엄청났던 모양이다.
그것을 풀기 위해서인지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는 미친 듯이 악을 써댔으니까.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뭐, 최 씨의 기막히고, 코 막히는 심정이 너무나 이해되기는 했다.
그러나 그건 내 감정이나 생각일 뿐.
정인영은 달랐다.
“아, 되게 시끄럽네!”
짜증 섞인 말과 함께 미간을 살짝 꿈틀한 정인영이 검을 휘둘렀다.
별다른 준비 동작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옆으로 반듯하게 검을 그었을 뿐이었다.
휘이익….
정인영의 검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맥없이 갈랐다.
그녀가 서 있는 자리와 최 씨가 꿇어앉은 자리의 거리가 여전히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누가 봐도 무의미해 보이는 짓이었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정인영이 선보인 것은 ‘평행 긋기’.
검사가 7레벨에 배울 수 있는 스킬이었다.
정인영은 평행 긋기마저 숙련도를 4단계까지 올린 상태였다.
스르릉….
허공을 가른 검의 궤도를 따라 길쭉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아지랑이는 느릿했지만, 정확히 최 씨를 향해 날아갔다.
서걱!
고개를 하늘로 젖히고 있었기에 완전히 드러난 최씨의 목을 깨끗하게 잘라 냈다.
“크으!”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너무 늦게 반응한 나머지, 끔찍한 장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고, 뇌리에 똑똑히 박혀 버렸다.
‘젠장….’
속으로 젠장을 외쳤다.
더욱더 젠장 같은 일이 곧바로 이어졌다.
“이쪽은 어찌할까?”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었지만, 그것이 박정아의 목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쪽’이란 표현이 나를 두고 하는 말이란 것도 직감할 수 있었다.
곧장 정인영의 대답이 이어졌다.
“뭘 어째? 화근이 될 건 절대 남겨 두면 안 되지!”
우려하던… 하지만, 부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던 상황과 결국엔 마주하게 됐다.
‘안 돼! 이제 좀 살만해졌는데… 아니, 아직 살만한 건 아니고… 어쨌든, 이렇게 죽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 나는 진짜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그랬다.
딱 고래 싸움에 낀 새우와도 같은 처지였다.
‘씨바… 고래 같지도 않은 새끼 때문에 내 등이 왜 터져야 하냐고.’
진심으로 억울했다.
억울함과 어떻게든 살고자 하는 애절함을 얼굴 전체에 가득히 담고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박정아를 향해 과감히 쏟아 냈다.
“흐음….”
마음이 좀 흔들렸는지, 박정아가 한숨과도 같은 작은 반응을 내쉬었다.
‘제발… 제발… 제바아알….’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눈빛으로 간절함을 미친 듯이 발산했다.
그런 나를 계속해서 내려다보던 박정아가 슬쩍 정인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얘는 그냥 살려 주면 안 될까?”
“왜?”
“그냥… 뭐랄까? 분명히 잘생겼는데, 완전 찌질해 보여서.”
에?
그게 무슨….
잘생겼으면 잘생긴 거고, 찌질하면 찌질한 거지, 잘생기고 찌질한 건 대체 뭘까?
뭐, 어쨌든 간에 살려 주자는 의견을 내줬으니, 이래 말하든 저래 말하든 네 마음대로 해라!
“그게 뭐야?”
“아니, 그냥 불쌍하다고. 따지고 보면 아무 잘못도 없잖아.”
박정아가 계속해서 내 편을 들어줬다.
완전 나이스였다.
“야야, 박정아! 너 솔직히 말해! 진짜로 불쌍해 보이는 거야? 아니면, 네 타입인 거야?”
“음… 둘 다? 헤헤!”
뜻밖의 말… 이 와중에 살짝 설렜다.
‘미, 미친… 아니지, 이렇게라도 살 수 있다면 그게 어디야? 그래, 좀 더 해라! 그렇게 해서 살아난다면, 내가 매일 같이 너를 업고 다니마!’
솔직히 어느 쪽이 좋은 건지 모를 공약까지 떠올리며, 박정아를 응원했다.
하지만, 정인영은 단호했다.
“에휴, 못말려 정말… 하지만, 이번엔 안 돼!”
“아, 왜애? 히잉….”
“어쩔 수 없잖아! 대신에 내가 빈이 오빠 넘길게! 그럼 됐지?”
빈이 오빠?
그건 누구지?
누군지는 몰라도 박정아는 내 편이야! 절대로 마음이 흔들릴 애가 아니라고!
그녀를 굳게 믿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고 했던가?
또,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고도 했던가?
“진짜? 약속한 거다.”
신을 낸 박정아가 곧장 내 얼굴 앞에 화살을 조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