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23)
벙찌고 말았다.
온갖 애교로 중무장한 채, 나를 대함에 있어 더없는 귀여움을 발하던 이전의 박정아는 없었다.
스륵….
일어서려던 몸을 슬그머니 주저앉혔다.
절대! 쫄아서는 아니었다.
살짝 무릎이 풀려서이기도 했고, 내가 나서 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인지했기에… 흠흠!
그런 나를 향해 코웃음을 친 박정아가 정인영과 최 씨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당연하겠지만, 그쪽 상황은 장난이 아니게 심각했다.
“뭐, 뭐라고? 네년이 죽고 싶어 아주 환장을 했구나?”
흥분과 화가 극에 달한 최 씨가 검 끝을 놀리며 정인영을 위협했다.
하지만, 정인영은 전혀 아랑곳도 없었다.
여전히 평온하고, 느긋한 자세를 유지하며, 최 씨를 향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하긴, 그런 썩은 눈으로는 파악도 못 하는 게 당연하지. 뭐, 내 연기력이 뛰어난 것도 있겠지만.”
“씨발… 뭐, 뭐라는 거야?”
“아, 됐고! 검은 네놈이 먼저 뽑은 거다? 맞지?”“그, 그게 뭐? 네 눈앞에 있는 이 검이 보이지도 않아? 상황 파악이 안 돼?”
정인영의 말에 최 씨가 버럭댔다.
그 순간!
채앵!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와 함께 정인영을 겨누고 있던 최 씨의 검과 팔이 튕겨 올라갔다.
가히 전광석화라고 불릴 만큼 빠른 정인영의 발도에 의해서였다.
최 씨의 검을 튕겨 낸 정인영의 검이 두 사람 사이에 번듯하게 놓여 있었다.
정확히는 최 씨의 얼굴 앞에 그녀의 검 끝이 날카로움과 여유를 뽐내며 겨누어져 있었다.
“후훗!”
“이잇!”
거의 동시에 흘려 낸 정인영의 웃음과 최 씨의 신음처럼 한순간에 전세가 완전히 역전된 것이었다.
“이제 어쩔 거지? 상황이 뒤바뀌었는데?”
정인영이 놀리듯 말했다.
최 씨의 얼굴이 더욱더 일그러졌다.
그러나 정인영의 자세는 틈이 많았다.
아니, 살기 내지는 위협감 같은 게 없었다고나 할까?
최 씨가 바로 그 틈을 파고들었다.
타앗!
휘익!
최 씨가 재빨리 몸을 뒤로 날리며 점프했다.
두 사람의 거리가 멀어졌고, 정인영의 검을 벗어난 최 씨는 곧장 자세를 고쳐 잡았다.
“크큭! 이러면 어때? 당황했지?”
“훗! 꼴값 떨기는….”
“이런, 썅! 어디 얼마나 더 기고만장한지 보자!”
최 씨가 이를 갈며 말했다.
그러고는 검을 한 번 꼬나쥐었다.
공격을 하겠다는 뉘앙스가 철철 넘쳐 흘렀다.
“씨발… B 클래스면 다야? 레벨은 내가 더 높다고!”
외침과 함께 최 씨가 정인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놈이 휘두른 검에는 살기가 듬뿍 담겨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잠시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아, 레벨… 흐음, 안 될 건데….’
내 예상이 맞는다면, 최 씨가 믿고 있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 될 터였다.
채앵! 챙! 챙! 채쟁!
검과 검이 불꽃을 튀며 격렬하게 부딪쳤다.
인상을 쓰고, 이를 악문 최 씨의 공격은 그만큼 매서웠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 내는 정인영의 표정은 너무나 여유로웠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음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십여 차례가 넘는 공방이 빠르게 이어지다가 일순간에 멈췄다.
공격을 퍼붓다가 제가 먼저 지친 최 씨가 뒤로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헉! 헉….”
가쁜 숨을 몰아쉬는 최 씨의 얼굴에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란 의문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었다.
최 씨의 의문은 당연했다.
클래스가 다르긴 하지만, 최 씨는 5레벨이었고, 정인영은 3레벨이었다.
게다가 방금 펼친 공방은 스킬을 배제한 순수한 검술의 격돌이었다.
누가 봐도 5레벨인 최 씨의 일방적인 승리가 점쳐지고, 그러한 상황이 연출 되어야만 한다는 소리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뭐, 그러한 상황이 연출되지 말란 법은 없었다.
착용한 장비들과 기본적인 피지컬의 차이, 검술 내지는 기타 무술 등을 익혔느냐 등으로 격차를 줄인다거나 아예, 뛰어넘을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정인영과 최 씨를 살폈을 때, 당연히 기본적인 피지컬은 남자인 최 씨가 좋았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둘 다 검술을 어느 정도 익힌 것 같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최씨가 조금 더 나아 보인다는 얘기.
하지만, 장비에서 차이가 좀 났다.
먼저, 무기 쪽은 내가 무지렁이 수준이라 잘 몰라서 정확지는 않지만, 정인영의 검이 좀 더 좋아 보였다.
얇은 검 날이 끝으로 갈수록 더욱더 가늘어지는 모양새가 딱 봐도 여자들이 쓰기에 적합하고, 어울렸으며, 손잡이 부분의 세련된 장식과 박혀 있는 보석 등이 그녀만큼이나 화려함을 자랑했다.
일전에 천만 원이라고 했던 검보다 확실히 비싼 느낌.
반면, 최 씨의 검은 검 날이 넓적하고, 약간은 투박해 보였다.
화려한 장식도 없었으며, 20만 원짜리 내 검과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래도 내 것보다는 좋겠지?’
생각과 함께 슬쩍 내 검을 쳐다봤는데, 아무래도 그래 보이긴 했다.
두 사람이 착용한 갑옷은 그렇게 차이가 없어 보였다.
재질은 가죽으로 똑같았고, 색깔만 빨강과 검정으로 차이가 있었다.
또, 특별한 포인트 없이 심플한 정인영의 갑옷과 달리, 최 씨의 갑옷에는 군데군데 징 같은 게 박혀 있었는데, 착용자의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 때문인지 정인영의 것이 더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은 나의 착각일 듯했다.
끝으로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신발.
최 씨의 신발은 국민 슈즈로 불리는 ‘전투화’였다.
발목을 훌쩍 넘는 길이의 부츠 타입이었는데, 단단하고, 방어력이 좋아서 많이들 착용했다.
물론, 남자들만 말이다.
다소 투박한 모양새에 몇 시간만 신어도 진하게 배어 버리는 꼬리꼬리한 냄새 때문에 여자들은 대부분 기피했다.
가격은 신형이 50만 원대, 구형은 30만 원 수준이었다.
정인영이 신고 있는 신발은 갑옷과 깔 맞춤을 한 빨간색의 운동화였다.
딱 봐도 가벼워 보이고, 세련됐으며, 간지마저 철철 넘쳤다.
‘간지? 네 눈에만 그리 보이는 거 아냐?’ 내지는 ‘고작 운동화가 뭐?’라고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아니다.
내 눈에만 그리 보이는 게 절대로 아니다.
또, 고작이란 수식어를 붙일 만한 운동화도 아니었다.
정인영이 신고 있는 운동화의 정식 명칭은 ‘AIR WIND–31’.
그것도 리미티드 에디션.
대혼란 시기 이전부터 스포츠 용품 하나만큼은 끝내 주게 만들고, 팔던 브랜드인 ‘N’사에서 최고의 기술력과 노하우를 접목하여 내놓은 걸작품이 바로 그녀가 신고 있는 운동화였다.
출시 가격만 무려 700만 원.
지금은 프리미엄이 붙어서 새 제품은 몇천만 원을 줘도 살 수가 없고, 다 떨어져 가는 중고 제품도 1천만 원 이상을 줘야만 했다.
유명한 브랜드 제품이나 한정판이라서 비싸고 좋다 한 것은 아니었다.
그만한 가치가 있기에 이렇게 열을 내며, 칭송을 아끼지 않을 뿐.
재질이나 모양새로 봤을 때는 최 씨가 신은 전투화보다 약해 보인다.
그러나 방어력이 더 높았다.
더불어 추가 옵션은 비교 자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월등했다.
특히나 AIR WIND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민첩성은 물론, 엄청난 점프력과 착지의 안전성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해서, 레벨 3인 정인영이 5레벨인 최 씨와 겨뤄도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 것.
뭐,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지만….
“주, 죽여 버리겠어!”
최 씨가 이를 갈았다.
검을 양손으로 꼬나쥔 채, 머리 위로 치켜세웠다.
이내 작은 풀들을 휘날릴 정도의 바람이 최 씨의 발아래에서 일었다.
휘이익….
“이런 건 처음 당해 볼 거다!”
최 씨가 장담하듯 말하고는 씨익 웃었다.
최 씨의 말이 옳을 듯했다.
본 적은 있어도 당해 볼 일은 없었을 테니까.
최 씨가 하려는 짓을 알고 있었다.
‘사선 베기’라는 이름의 스킬로 검사 계열이 5레벨에 익힐 수 있었으며, 짐꾼으로 일한 5년 간 수도 없이 봐 왔었다.
해서, 그 위력과 빠르기 등도 잘 알았다.
아마도 내가 당하는 처지였다면, 피할 생각도 못 한 채, 한방에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정인영이었다.
“어이쿠, 무서워라!”
최 씨를 놀리듯이 말한 정인영이 검을 든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최 씨의 자세와 비슷한 듯하면서 다른 자세.
정인영은 양손이 아니라 한 손이었다.
“이런, 건방진…!”
최 씨가 씩씩거리고는 두어 걸음쯤 앞으로 움직였다.
이내 치켜세웠던 검을 사선으로 내리쳤다.
휘이익!
정인영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최 씨가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났다.
걸었다는 느낌보다는 미끄러진다는 느낌이 강했다.
스스슷….
아슬아슬하지도 않게 최 씨의 사선 베기가 무로 돌아갔다.
이어 싸늘하게 히죽인 정인영이 들고 있던 검을 대각선으로 휘둘렀다.
휘이익!
검도 그렇고, 키나 팔의 길이도 최 씨가 정인영보다 길었다.
최 씨의 공격이 닿지 않는다면 정인영의 공격도 뻔한 것이었다.
그것은 나도 알고, 최 씨도 아는 상황.
해서, 최 씨는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사선 베기를 시전한 직후라 움직이지 못했던 것이었으려나?
아무튼, 최 씨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스스슷….
역시나 정인영의 검은 최 씨에게 닿지 않았다.
예상대로 많은 거리 차를 두고 빗나갔다.
그에, 최 씨가 징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누가 봐도 최 씨의 공격 타이밍이었다.
“크크크! 넌 이제 뒈졌….”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걸?”
최 씨의 말을 끊고서 정인영이 말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최 씨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아아아악!”
그러고는 자신의 왼쪽 팔을 붙잡은 채,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툭….
최씨의 왼쪽 팔… 정확히는 손목 부분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너무나도 깨끗이 잘린 단면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내 터져 나오는 붉은 피의 분수도 볼 수 있었다.
‘거, 검풍?!’
최씨의 왼쪽 팔을 잘라 버린 것의 정체는 ‘검풍’이었다.
검풍은 검사 계열 각성자의 스킬 숙련도가 4단계에 오르면 발생하는 추가적인 공격 효과로 마지막 검의 궤적과 방향을 따라 생성이 되는 가늘고 긴 하얀색의 띠를 말했다.
뭐, 말이 가늘고 긴 하얀색 띠지 실제로는 눈에 잘 보이지 않았고, 아지랑이처럼 주변의 공기를 흔들어대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게다가 공격 범위도 1미터 남짓.
하지만, 최 씨의 팔이 잘려 나간 것처럼 위력만큼은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훗! 끝났군.”
내 곁에 서 있던 박정아가 낮게 말했다.
별것 아니라는 뉘앙스가 강했다.
다시금 그녀가 나와 함께 사냥을 하면서 그토록 애교를 부려대던 그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워질 정도였다.
“으아아악! 내, 내 파알….”
최 씨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고는 고개를 틀며, 뒤쪽을 향해 소리쳤다.
“야, 김병환! 이 병신 새끼야, 뭐 하고 있어?”
최 씨의 외침에 넋을 놓고 있던 김 씨가 어리바리한 반응과 함께 어기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냥 가만히 있어라. 너도 같은 꼴 나고 싶지 않으면….’
김 씨를 위해 말을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곧 1:2의 상황이 만들어질 태세였다.
뭐, 최 씨가 한 쪽 팔을 잃었으니, 1:1.5라고 치는 게 옳을 듯.
수적인 열세… 아니면, 한 명을 압도했으니, 비등하거나 대등한 상황 중 하나일 가라 예상될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이 싸움은 무조건 최 씨와 김 씨의 필패였다.
B 클래스로 사선 베기의 숙련도 4단계를 이룬 정인영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녀의 레벨이 3이 아니라, 5라는 소리와 같다.
사선 베기는 5레벨이 되어야 생성되는 스킬이니까.
같은 레벨에 장비도 월등하고, 클래스도 높다.
그렇기에 최 씨와 김 씨가 힘을 합친다 해도 정인영을 이길 수 있는 확률은 낮아진다.
그게 끝이 아니다.
내가 본 것이 정확하다면… 나를 구해 주기 위해서 하늘을 날아올라 프록의 몸뚱이를 산산조각 낸 스킬.
그것이 만약 진짜 ‘회전 베기’라면, 정인영의 레벨은 훨씬 더 높다.
그랬다.
10레벨.
정인영의 레벨은 못 해도 10레벨 이상이었다.
최 씨와 김 씨 같은 놈들 십여 명이 달려들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수준이란 말이다.
‘불쌍한 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