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20)
검 날의 어딘가에서 미세한 느낌이 일었다.
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감았던 눈을 떴다.
나풀나풀….
허공에 뭔가가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리고 있는 게 보였다.
‘꺼, 껍질?’
흡사, 얇디얇게 깎아 놓은 것 같은 사과 껍질을 연상케 하는 그것은 아무래도 프록의 피부이지 싶었다.
어설프긴 했지만, 공격이 들어가긴 한 모양이었다.
“구륵!”
내 얄팍한 공격을 받은 놈이 기분 나쁘다는 듯이 소리를 내며, 묵직한 몸뚱이를 돌리고 있었다.
“피해요!”
정인영이 소리쳤다.
곧장 뒤로 점프했다.
파앗!
질척한 지면 탓에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다.
몸은 무거웠고, 느렸다.
예상보다 멀리 가지도 못 할 것 같은 느낌.
‘이, 이런….’
불길함이 엄습했다.
아니나 다를까….
느릿하다고 여겼던 놈의 움직임이 나보다 빨랐다.
어느새 완전히 몸을 돌려세운 놈이 쫙 찢어진 입을 벌렸다.
쩍 벌어진 입속에서 시뻘건 혀가 빠르게 튀어나왔다.
촤아악!
“앗!”
찰나의 순간.
많은 것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닿겠지? 몸을 비틀거나 피할 수는 있나? 아, 허공이라 안 되겠구나. 아플까? 아프겠지? 서, 설마 죽지는 않겠지?’
츠슷!
놈의 혀끝이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거의 동시에 발바닥이 지면에 닿았다.
역시, 예상했던 것보다 한참이나 멀리 가지 못했다.
“이잇!”
있는 힘껏 다시금 뒤로 점프했다.
놈의 두 번째 공격도 날아오고 있었다.
휘리릭!
놈의 두 번째 공격은 휘두름이었다.
첫 번째 공격에서 뺀 혀를 다시 입속으로 집어넣지 않고서 그대로 휘둘렀다.
해서, 속도도 빠르고 범위도 넓었다.
하지만, 뒤로 더욱더 물러났기에 놈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다, 다행이다.’
놈의 공격을 피했음에 안도했다.
제법이라며, 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을 생각도 했다.
너무나 섣부른 생각이었다.
아니,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만 상태였다.
나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익숙한 정인영은 곧장 문제를 알아챘다.
“앗!”
그녀의 놀란 반응에 시선을 돌렸다.
심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정인영의 시선과 고개가 이내 위쪽을 향해 움직였다.
머리 위로 비치던 햇살이 사라지고, 그늘이 졌다.
뭔지 모를 엄청난 위압감도 느껴졌다.
‘피, 피해야 한다.’
뭐가 됐든 바로 몸을 피해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뇌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데구르르….
그대로 몸을 기울이며, 옆으로 굴렀다.
츠적츠적….
질척한 지면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는 물로 인해 온몸이 젖어 버렸다.
몸무게가 두 배는 될 것처럼 무거워졌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쿠우우웅!
묵직하고, 파괴적인 굉음이 일었다.
방금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에서였다.
2, 3미터는 족히 될 거리로 떨어진 내게 확실하게 전해지는 진동.
이어, 폭탄이라도 터진 듯 진흙과 물줄기가 사방팔방 튀었다.
파파팟!
“으윽!”
거칠게 날아드는 진흙의 파편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몸을 보호해야 한다는 본능에 최대한 몸을 웅크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옆으로 누운 자세도 그렇고, 마땅한 방어구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라 얼굴을 가린 팔은 물론, 미처 가리지 못한 옆구리 등을 파편의 직격탄에 그대로 노출한 채, 찢김과 대미지 등을 견뎌야 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후두둑….
정신없이, 또 거칠게 날아들던 파편들이 멈췄다.
“….”
이번에도 살았다.
안심… 해도 될까?
그럴 리가 없었다.
“아, 안 돼!”
정인영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놈이 또 무슨 짓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볼 수가 없었다.
물과 진흙 등에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째야 하지? 어쩌긴 뭘 어째, 그냥 굴러야지!’
억지로 몸을 비틀었다.
소나기 같던 파편들이 날아왔던 방향이 오른쪽이었기에 무조건 왼쪽으로 굴렀다.
이미 두 배 이상 무거워진 몸이라 그저 옆으로 구르는 것뿐인데도 버겁고, 힘겨웠다.
그래도 살아야 했기에 이를 악물고 굴렀다.
“끄으응!”
굴렁… 굴렁….
팟! 팟! 팟!
보이지는 않지만, 느낌은 있었다.
직격은 피한 듯했지만, 이어지는 살벌함과 섬뜩함이 온몸을 압박하고, 죄어 왔다.
‘혀 채찍….’
놈이 나를 향해 계속해서 혀를 휘두르거나 찔러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것을 지금 나는 너무나 운 좋게 피하고 있고 말이다.
‘내 인생에 이런 행운이 따르다니… 이 정도면 거의 로또급 아닌가? 살아서 돌아가면 로또나 한 장 사야겠다.’
그럴 여유가 어떻게 생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무작정 몸을 옆으로 굴렸다.
굴렁… 툭….
‘젠장!’
말이 씨가 됐다.
힘겹게 애를 쓰긴 했지만, 내동 잘 굴러가던 몸이 뭔가에 걸려 멈췄다.
“이익!”
힘을 주어 뭔지 모를 장애물을 넘으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끄, 끝?’
곧장 놈의 혀가 나를 향해 날아들 것을 알았고, 이대로 나도 끝장이 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뒤통수를 짜릿하게 자극하는 살기도 여실히 느껴졌다.
또한….
“아, 안 돼애!”
내 생각이 맞음을 증명하듯, 정인영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으윽!”
이를 악물었다.
곧 날아들 아픔과 통증 등을 미리 대비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행위였다.
‘아플까? 아프겠지? 아플 거야… 아아, 시, 싫다아… 아픈 거 싫어어어어!’
속으로 절규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기묘한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몇 개나 될 법한 것들이 말이다.
쇄애애액! 휘리릭! 퍼어억! 채챙! 쐐애액! 까아앙! 퍼어억! 파앗!
실로,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드는 소리였다.
또한, 소리만큼이나 분주함이 전해지고 있었다.
‘뭐, 뭐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그 와중에 호기심과 궁금증이 폭발했다.
곧 엄청난 고통에 괴로워하다가 끝내 죽겠구나 싶던 일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뒤였다.
아니, 진작에 그랬어야 했는데, 한참이 지나도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기에 저절로 잊힌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손으로 눈을 비볐다.
어떻게든 눈을 떠, 돌아가는 상황을 직접 보고, 제대로 파악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으, 쓰라려….’
눈알이 따끔따끔했다.
흙 알갱이가 들어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리 깨끗하지 않은 물 때문일 수도 있으리라.
그래도 떴다.
흐릿함을 넘은… 뿌옇게만 보이는 시야에 따끔함을 참아 내며 억지로 눈을 깜빡거렸다.
조금씩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 더… 몇 초쯤 더 시간이 지나자, 얼추 사물이 분간될 만큼 시야가 회복됐다.
‘얼라리? 이게 뭐야?’
거대한 벽(?)이었다.
처음엔 눈가에 뭐가 껴서 그렇게 보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내 왼쪽 시야의 일부를 차지하며 방해를 하고, 어깨와 팔뚝 등에 닿은 채, 움직임을 막고 있는 것은 분명한 벽이었다.
‘…??’
이상한 일이었다.
이곳엔 벽 같은 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프록 밭에 들어서면서, 또 사냥하면서도 그렇게 주위를 살폈었지만, 벽이 될만한 것은 전혀 보지 못했었다.
갑자기 땅에서 솟았다거나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 이상은 벽 같은 게 있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벼, 벽이 아닌가?’
벽이 아니라 다른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순간, 벽이 움직였다.
아니 무너… 졌다?
“윽!”
시야를 가리고 있던 벽이 더욱더 시야를 가리는가 싶더니만, 내 몸을 묵직하게 짓눌러 왔다.
꿀렁!
물컹하고 미끈한 것이 온몸… 특히나 얼굴에 닿으며, 더없는 기분 나쁨을 유발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묵직하지만, 견딜만했던 짓누름이 순식간에 배 이상으로 늘었다.
숨이 콱 막혔고, 압박에 얼굴과 몸이 일그러지며, 이대로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느낌이 극에 달한 순간, 숨 막히는 압박감이 해제됐다.
대신에 강렬한 충격이 날아들었다.
파아아아앗!
“…?!”
전해진 충격에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경악과 이해의 순간을 맞이해야만 했다.
벽이라고 생각했던… 이어, 묵직한 압박과 강렬한 충격을 선사했던 그것의 정체가 프록이었음을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놈의 거대한 몸뚱이가 허공에 떠 있었다.
그것도 바로 내 머리 위.
문제는 하늘로 솟구쳐 오른 놈이 곧 정점을 찍을 듯 보였다는 것이었다.
이후에는 그대로 떨어져 내리겠지.
그러고는 나를….
그랬다.
놈은 나를 깔아뭉개 죽일 셈이었다.
‘근데 왜?’
절체절명의 순간임에도 의문이 하나 생겼다.
‘어째서 놈과 내가 이토록 바짝 붙어 있는 것인가?’였다.
분명히 나는 놈과 멀어지기 위해 반대로 몸을 굴렸다.
그렇다면 거리가 멀어져야 정상이거늘, 오히려 그 반대 상황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설마, 점프했나?’
그런 것이라면 말도 되고, 이해도 됐다.
사정없이 날려대던 혀 채찍이 빗나가고 다시금 거리 멀어지자, 놈이 점프하여 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때도 놈은 나를 깔아뭉갤 생각이었지만, 또다시 운 좋게 그것을 내가 피했다.
그 뒤 놈이 한 번 더 나를 깔아뭉개려 점프를 했다.
때마침 나는 그것을 목격한 상황이 바로 지금이고 말이다.
‘흠….’
아무래도 그것이 맞는 것 같았다.
추측과 가설이긴 했지만, 일단 상황이 이해가 되니 마음이 흡족했다.
‘아차,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랬다.
상황의 설명이 다소 길고, 꽤 많은 것들을 생각했지만, 실제로 걸린 시간은 불과 몇 초.
현재의 나는 곧 프록의 육중한 몸무게에 떨어지는 가속도까지 붙은 어마어마한 낙하 에너지를 고스란히 받아 내야 할 긴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일단 피해야 한다.’
조금 늦은 듯도 했지만,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이번에도 잽싸게 옆으로 구르면 될 듯했다.
방향은 따로 정할 필요가 없었다.
놈에게 기대고 있던 터라 살짝 들려 있던 왼쪽 어깨가 저절로 뒤로 젖혀졌다.
그 반동을 이용해 오른쪽으로 몸을 힘껏 굴렸다.
데굴데굴….
나름 쉽게 두 바퀴를 구를 수 있었다.
‘아직 모자라!’
최소한 한두 번은 더 굴러야 피해의 범위를 벗어날 수 있을 듯했다.
해서, 다시 몸을 굴리려는데, 뭔가가 내 시야에 들어오며 관심을 끌었다.
‘으응? 저, 정인영?’
그녀가 내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고는 이내 힘껏 뛰어올랐다.
파앗!
휘이익!
잠시 넋을 놓은 시선이 정인영의 움직임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동했다.
“헐….”
정인영은 가히 놀라운 점프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얼핏 하늘을 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고, 내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여, 역시… 천사인가?’
실로, 허무맹랑하고, 엉뚱하기 그지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아니라며, 가능성마저 배제할 이유는 없었다.
솔직히 정인영의 미모는 하나쿠 짱을 위협할 만큼으로… 인간보다는 천사 쪽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더 어울렸으니 말이다.
게다가 한 번의 점프… 물론, 그 전에 세찬 도움닫기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 번 땅을 굴러 뛰어오른 인간이 못 해도 4, 5미터를 훌쩍 넘고, 아직도 한참이나 높은 곳에 떠 있는 상태라면, 충분히 종족 자체를 의심해 봐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랬다.
정인영은 아직도 하늘을 날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몸을 튼 상태에서 그녀가 달려오는 것을 본 뒤로 계속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이제는 시선과 고개가 하늘을 정면으로 바라볼 정도가 되었고, 계속해서 그녀의 모습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아예 몸까지 왼쪽으로 틀어야만 할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엄청난 점프력으로 나를 놀라게 한 정인영이 더욱더 놀라운 모습을 선보이며, 다시금 그녀의 종족 논란에 혼돈을 가져다 주었다.
‘세, 세상에 이, 이럴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