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14)
휘두른 검을 회수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동작이 컸던 만큼 지체되는 시간이 있었다.
이미 토끼 놈은 지척까지 날아온 상태였다.
‘큰일이다, 이대로라면….’
토끼 놈의 기다란 앞니가 시야에 꽂혔다.
그것이 내 연약한 피부를 뚫고 들어 올 것이라 상상을 하니, 절로 소름이 돋았다.
“으으!”
가까스로 검을 회수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때는 늦은듯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눈을 질끈 감고서 이어질 아픔과 고통을 한 번쯤 참아 내는 것뿐이었다.
그나마 덜 아픈… 어디라고 물려서 아프지 않은 곳이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괜찮을 만한 왼팔을 놈에게 내주는 일이었다.
“젠장….”
눈을 감았다.
눈가에 주름이 쫙 지도록 힘껏 감았다.
놈이 물 수 있도록 앞으로 내준 왼팔에도 힘을 잔뜩 줬다.
그래야 덜 아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털썩….
눈을 감은 채라 곤두서 있던 귀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곧 이어질 것만 같았던 놈의 공격이나 그로 인한 왼팔의 통증도 없었다.
‘…??’
의아함이 들었다.
살며시 한쪽 눈을 떴다.
눈앞… 허공이 비어 있었다.
나를 향해 몸을 날렸던 토끼 놈이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얼래?’
양쪽 눈을 다 떴다.
저절로 시야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보았다.
등 쪽과 다리 쪽으로 나뉜 토끼 놈의 사체를 말이다.
‘뭐, 뭐야?’
깜짝 놀랐다.
나도 모르게 손에 들린 검을 쳐다봤다.
너무나 깨끗했다.
더불어 검을 휘둘렀을 때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었다.
그런데, 토끼 놈이 반으로 잘려 있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한 짓이 맞긴 한 것 같은데….’
그런 것 같긴 했다.
그래야 말이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나 여전히 영문을 알 수는 없었다.
껌뻑… 껌뻑….
계속해서 눈만 껌뻑거렸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자연체….’
동양 중심의 무도에서 말하기를 가장 기본이 되면서도 그에 이르기가 쉽지 않다는 정통의 자세를 자연체라 했다.
그런 자연체에서 물이 흐르듯, 바람이 지나가듯 극히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공격이나 방어 또한 자연체 내지는 자연체의 연장이라 했다.
자연 만물의 기운과 완전히 동화되어, 가볍지만 무겁고, 느리지만 빠르며, 유하지만 강인한 것이 진정한 자연체라고 어느 ‘만화책’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에이, 설마….’
곧바로 의심했다.
만화책에서나 언급되는 허무맹랑한 말이라는 생각이 먼저였다.
만약에 그런 것이 진짜 있다고 한들, 나 같은 초짜에 허당 같은 놈이 해낸다거나 도달할 리가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이어졌다.
‘아니지?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되잖아?’
다시 생각하니, 그럴 수도 있는 일 같았다.
지금껏 마음먹고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렇지, 내가 이쪽 방면에 특출난 재능이 있었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맞아! 뭔가 자세가 완벽한 느낌이었어. 이, 이렇게… 아닌가? 이런 식이었나?”
기억을 더듬으며, 검을 휘둘러 봤다.
겁나게 어색했고, 불편했으며, 꼴만 사나워 보였다.
“쩝….”
입맛을 다시며 하던 짓을 멈췄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이쪽 재능은 딱히 없는 듯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틀린 게 아니었다.
재능까진 솔직히 모르겠지만, 분명히 직전에 있었던 검의 휘두름은 자연체였다.
아니, 그것에 가까운 것이었다.
뭐,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랬다.
이 우연한 자연체의 휘두름과 동작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에 새겨졌다.
또, ‘시작은 미미했지만 그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말처럼 아주아주 미약한 생채기 같은 이 새겨짐이 먼 훗날, 내게 특별한 검술 선생이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게 된다.
말했듯이 아주아주 먼 훗날의 일이긴 했지만….
….
뭐가 됐든.
그렇게 첫 번째 사냥에 성공했다.
비록 반으로 갈린 토끼 놈이 남긴 것은 피로 물든 사체뿐이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자신감을 안겨 주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 나도 할 수 있는 일이었어!”
충만해진 자신감으로 다음 사냥감을 찾아 나섰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토끼 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엔 실수 없이 한 방에 보내 주마!’
앞선 실수를 상기하며, 검의 손잡이를 힘껏 꼬나쥐었다.
그리고 궁둥이에 달린 둥근 꼬리를 실룩이는 토끼 놈을 향해 천천히 다가섰다.
….
“후아… 힘들다.”
몇 시간을 토끼 밭에서만 굴렀다.
사냥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계속해서 반복하다 보니, 나만의 노하우까지 생겼다.
또 개당 몇천 원 수준이긴 하지만, 마정석도 꽤 모을 수 있었다.
장식품을 만들 때 쓴다는 놈들의 앞니도 주머니가 두둑하게 모았다.
“겨우 일당은 한 건가?”
뭐, 짐꾼으로 빡세게 일한 것보다는 조금 모자란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그나저나 레벨 업은 아직인가?”
레벨이 오르지 않은 것은 살짝 불만이었다.
정확한 수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꽤 잡은 것 같은데, 어째 소식이 감감했다.
“뭐, 내일은 오르겠지!”
분명, 그렇게 될 것이라 여기고는 하루를 마무리했다.
….
던전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조잡한 피켓을 들고 있거나 간이 좌판을 깔고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빠르게 피켓에 적힌 내용을 훑었다.
서로 짜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내용의 글귀와 숫자뿐이었다.
‘하긴, 괜히 혼자서 튀었다간 등에 칼 꽂히기가 쉽지!’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피켓을 든 채,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저기요.”
“아, 안녕하세요.”
남자를 부르자, 그가 곧장 환하게 웃으면 인사를 건네 왔다.
그에, 덩달아 고개를 꾸벅했다.
“마정석 사시죠?”
“네, 삽니다.”
“이거….”
토끼 놈을 잡고 얻은 새끼손가락 손톱보다 작은 크기의 마정석을 꺼내 보였다.
남자가 내 손바닥에 있는 마정석을 힐끔대고 곧장 물어왔다.
“몇 개나 되죠?”
“에… 스물한 개요.”
“개당 4천 원씩 해서… 8만 4천 원입니다.”
1레벨 마정석의 가격은 개당 5천 원이었다.
시세가 또 달라졌을 수도 있긴 하지만, 어제까지의 거래 가격은 그랬다.
일전의 사건을 계기로 마정석 시세를 알아 두는 게 나름의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런 1레벨 마정석을 개당 4천 원에 사겠다는 남자.
그처럼 피켓을 들고 있거나 좌판을 깔고 있는 이들은 죄다 소규모 상인이었다.
그들은 소량의 저 레벨 마정석을 팔거나 급전이 필요한 이들에게 마정석을 사서 차액을 남기는데, 주로 A 구역과 거리가 먼 던전들 근처에서 볼 수 있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마정석 가게는 A 구역에만 있다.
오늘 사냥을 한 던전에서 가장 가까운 A 구역은 버스로 2시간이 넘게 걸린다.
지금 바로 출발한다면, 마정석 가게가 문을 닫기 전까지 가까스로 도착할 듯.
뭐, 택시를 이용하면 시간은 훨씬 단축될 것이다.
그러나 택시비가 어마어마하게 나오겠지.
솔직히 그 값이면 그냥 여기서 마정석을 4천 원에 파는 게 이득일 터였다.
게다가 마정석을 팔고 나서는 다시 B 구역으로 나와야만 한다.
A 구역에도 식당이 있고, 모텔이 있지만, 당연히 B 구역보다 비싸니까.
“팔게요.”
“예, 감사합니다.”
남자에게 마정석을 건네고, 돈을 받았다.
이내 자리를 뜨려는 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토끼 이빨도 사시나요?”
“몇 개나 있으세요?”
“비슷하게 있을 듯한데요.”
“개당 천 원인데, 괜찮으시겠어요?”
토끼 이빨의 가격은 알지 못했다.
반값까지 후려칠 리는 없을 것 같고, 고작해야 2, 3백 원 정도 내지는 5백 원쯤 차이가 나지 않을까 싶었다.
어차피 가지고 있는 게 더 불편한 터라 그냥 쿨하게 팔아 버렸다.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이용해 주세요.”
그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나도 미련 없이 돌아서서는 걸음을 옮겼다.
….
던전을 벗어나 곧장 향한 곳은 시장이었다.
‘오식’이에게 먹일 고기를 사기 위함이었다.
아, 카드에 봉인한 녀석을 오식이라 부르기로 했다.
오크와 식충이를 합쳐 탄생한 이름이었다.
몇 번을 따지고 봐도 시장만큼 고기를 싸게 살 곳이 없었다.
대량으로 사면 가격도 싸지고, 덤으로 더 주기까지 하니, 가성비 면에서 최고였다.
그래 봤자, 돈이 왕창 깨지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맛과 질은 따지지 않고, 그저 양으로 승부하는 부위로만 고기를 샀다.
며칠을 먹여 보며 절실히 느낀 것이지만, 비싸거나 맛이 좋은 것보다는 무조건 배를 채워 주는 쪽이 더 나았기 때문이었다.
“에고, 힘들어라….”
고기가 든 비닐봉지를 바리바리 들고서 모텔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 맞다!
모텔도 가격이 싸고, 비싼 곳이 따로 있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됐다.
건물의 외관이나 시설이 노후 된 곳이 당연히 싼 쪽이었다.
그래도 내가 살던 옥탑방보다는 넓고, 좋기에 최대한 싼 곳을 찾아다녔다.
“으음… 이쪽이 싸 보이네.”
딱 봐도 다른 곳보다 가격이 쌀 것 같은 모텔을 찾았다.
고심할 것도 없이 바로 들어갔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제대로 찾아 왔음을 다시금 느꼈다.
“저기요.”
사람이 들어 왔는데도 별다른 반응이 없기에 먼저 인기척을 냈다.
드르륵!
벽 한 쪽에 난 작은 창이 거칠게 열렸다.
비쩍 마른 얼굴에 커다란 헬멧을 쓴 것 같은 파마 머리를 한 아줌마… 아니, 할머니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나이 많은 여자가 얼굴을 드러냈다.
“바, 방 있나요?”
“혼자야?”
할줌마가 대뜸 딴소리를 해 왔다.
본능적인 반문이 튀어나왔다.
“네?”
“혼자 잘 거냐고!”
“아, 네….”
“3만 원.”
싸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흐흐!
바로 3만 원을 건넸다.
낚아채듯 돈을 가져간 할줌마가 조금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306호, 퇴실은 낮 11시까지.”
“네.”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다렸다.
열쇠나 카드 키를 받기 위해서였다.
“….”
“….”
어색한 침묵의 시간…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 할줌마와의 눈싸움이 잠시 이어졌다.
그렇게 몇 초 후.
할줌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
“네?”
“왜 그러고 서 있어?”
“아, 그게….”
키를 달라고 바로 말하려 했다.
그러나 할줌마가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열었다.
입가에 야리꾸리한 미소를 그린 채였다.
“여자 필요하구나?”
“에에?”
“진작 말을 하지! 홍홍.”
미소만 야리꾸리한 게 아니었다.
뭔가 막 알겠다는 듯한 표정이나 말투도 그렇고, 끝에 흘린 웃음도 이상했다.
나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지면서 그대로 면상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은 충동이 일었을 정도였다.
아니, 조금만 더 가까이 있었다거나 중간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 없었더라면, 분명히 펀치가 작렬했을 터였다.
그런 내 속내도 모른 채, 할줌마가 계속해서 실실거리며 말을 이었다.
“짧은 건 3만 원, 긴 거는 7만 원이야.”
순간, 모든 것이 이해됐다.
솔직히 솔깃한 마음이 없잖아 있었지만, 지랄 같은 얼굴과 말투 등을 계속 보고 있는 것이 너무나 싫어서 바로 말을 돌렸다.
“아, 저는 키를 달라고 한 건데요?”
“키? 무슨 키?”
“방 키요. 열쇠!”
“아아, 우린 그런 거 없어. 그냥 열고 들어가면 돼!”
그제야 내가 허튼 시간을 보냈다는 걸 깨달았다.
코끝을 찡긋하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내 등 뒤로 할줌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자는 정말 필요 없어?”
다시금 혹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곧장 고개를 세차게 젓고 계단을 올랐다.
“젠장, 여자가 아니라 엘리베이터나 좀 설치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