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어? 뭐야?”
조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세계수에 찾아왔을 때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고대의 정령들이 잠들어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었는데 요번에는 달랐다.
대지에서 솟아오르는 세계수의 뿌리들은 거대한 이무기가 연상되는 움직임을 보이며 명백하게 나를 향해 적의를 보이고 있었다.
“아니, 이게 나를 적대하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슬쩍 내 옆에 둥둥 떠 있는 하얀 꽃을 바라본다. 그녀는 따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묘하게 내 시선을 피하는 느낌을 받았다.
[무엇이든 내 탓으로 돌리려 하는 그 버릇은 고칠 필요가 있어 보이는구나.]
“나름 합당한 의심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 혼자 왔을 때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거든. 그런데 자기 아이나 다름없는 정령들을 쫓아낸 신들의 대모와 같은 신이 함께하면 없던 적의도 생기지 않을까?”
[세계수는 정령들의 어머니가 아니다. 단순히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함께하고 있는 것뿐이지.]
“어쨌든 대충 내 생각은 전해진 것 같은데?”
어서 뒤로 물러나라고 손짓하자 지모신은 한번 해 보라는 듯 둥실 떠서는 저만치 뒤로 가버렸다. 생각보다 거리가 많이 멀어진 걸 보면 조금 삐진 것 같기도 하고.
“크흠.”
다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천천히 앞으로 향한다. 당연히 세계수가 나를 반겨 주리라 생각했으나.
콰득!
“어이 씨! 깜짝이야!”
그녀의 뿌리가 날카로운 창이 되어 내가 서 있는 땅 바로 옆을 찍어 댔다. 명백한 경고이자 적의가 넘실 거리는 모습.
혹시라도 지모신이랑 함께 온 것 때문에 이미 찍혀버린 건가 했으나, 세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이여, 어찌하여 진흙발로 나의 거처로 들어오십니까.”
생각보다 성격이 거치신데?
분명 200년 후에 만났을 때는 꽤나 누그러진 성격으로 기억하고 있었기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당신과 대화를 하기 위해 왔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내어주시죠.”
어차피 남는 게 시간밖에 없는 양반들이 하나같이 틱틱거리는 게 참.
하지만 내 제안에도 세계수는 계속해서 자신의 뿌리를 끌어올리며 언제라도 나를 옥죄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괜히 세계수랑 싸워 봤자 썩 좋을 건 없었기에 끙끙거리며 고민하는 내 코를 간질이는 부드러운 꽃내음.
[내가 그래서 말하지 않았느냐, 세계수와 대화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울 것이라고.]
“지모신이여, 오랜만이군요.”
오히려 나보다 지모신을 향한 목소리에는 일면의 따사로움이 담겨 있었기에 휙 하고 꽃을 바라본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였어?”
[단순히 아는 사이뿐만이 아니다. 오랜 세월을 그저 살아가야만 했던, 서로의 처지를 유일하게 이해하는 친우이지.]
“참으로 오랜만에 그대를 보니 좋군요.”
[그대가 정령계로 내려간 이후, 처음이니 말이야. 이 아이 덕분에 오랜 기간 보지 못했던 친우도 보게 되었군.]
아니 그러면 미리 얘기나 좀 해 주지.
아까 꼽사리 줬던 게 부메랑이 되어서 이마를 딱 때리는 기분이 들었다.
[불편하게 했다면 미안하네, 이 아이의 무례는 나를 봐서라도 용서해 주길 바라지.]
은근히 비웃음이 걸린 목소리로 나를 옹호해 주는 지모신. 고맙긴 한데, 뭔가 많이 기분이 나쁘다.
“그대가 인간과 함께하시다니?”
주변에서 흉흉하게도 솟아오르던 나무뿌리들이 다시금 제자리를 찾아서 땅속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항아리에 살아가는 뱀이 딱 이런 느낌이겠지.
[그건, 흐음.]
지금 우리의 상황에 대해서 말해도 괜찮은 건지 고민하는 듯 했기에 내가 끼어들었다.
“말해도 괜찮아. 어차피 다 말하려고 온 거니까.”
[으음? 그랬던 거냐? 왜 나한테는 말하지 않은 거지?]
“굳이 너한테 다 보고해야 하는 거야?”
[하여튼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참으로 아니꼬운 아이구나.]
그러면서도 목소리에 노기를 띄우지 않는 걸 보면 지모신도 은근 즐기고 있는 거 다 알고 있다. 오랜 기간을 살아오면서 자신한테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게 인간뿐만 아니라 신들 중에서도 처음이었기에 신선하겠지.
저토록 오래 살면 원래 아주 별거 아닌 새로운 것도 목을 적시는 시원한 음료와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뭐, 나도 그렇게 오래 살지는 않았으니 잘 모르겠지만.’
물론, 지금 말한 건 그냥 감이었다.
실제로는 지모신이 분노를 꾹꾹 누르면서 연장자의 자비를 보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나랑 그게 무슨 상관인가.
꼬우면 말하라지.
세계수는 나와 대화하는 걸 썩 원치 않는 것 같았기에 지모신이 우리의 짧지만 강렬한 여행길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모든 설명이 끝나고, 세계수는 조금 높아진 목소리로 나에 대해서 혼자 중얼거렸다.
“확실히 마나 하나 없는 정령계에서 이토록 방대한 마나를 품고 있는 걸 보면 보통 인간은 아니군요. 그것보다 종말까지 미래에 죽는다니, 큰 골칫덩이가 하나 사라지는 건 좋은 일입니.”
종말의 신을 단순히 골칫덩이 정도로 표현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기는 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세계수 님에게 청이 하나 있습니다.”
나름 정중하게 말했는데 조금 뜬금없는 곳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어째서 내게는 그런 예를 갖추지 않으면서 세계수에게만 지극정성으로 대하는 거지?]
“좀 저리 가서 근처 구경이나 하고 있지? 너도 정령계는 처음일 거 아니야.”
[지금 그런 것 보다 더 중요한 사안이 생겼으니 그런 거 아니냐. 어째서지? 내 본인을 앞에 두고 이런 말하기는 좀 그렇다만, 세계수와 견주어도 나는 전혀 손색이 없는 존재이다.]
오히려 내가 느끼기에 힘 자체는 세계수보다는 지모신이 더 뛰어났다. 그걸 알기에 세계수도 지모신의 말에 굳이 토를 달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거겠지.
이마를 탁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한테는 원하는 게 없으니까 그렇지. 세계수 님한테는 도움을 받아야 하고.”
[그것도 미래를 위한 일이느냐?]
“그래, 내가 아주 큰 도움을 한번 받은 적이 있거든.”
감정적으로는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지만 그래도 지모신은 알겠다면서 뒤로 물러나 주었다.
이제야 세계수랑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있게 됐네.
“도움이라? 제가 미래에 그대를 돕는단 말인가요?”
“예, 맞습니다. 당시 저는 몸이 많이 망가져 마법을 다룰 수 없는 상태에서 가슴팍에 검을 맞고 죽어 가던 중이었습니다.”
신뢰와 믿음의 신 뫼르아네가 빛의 정령왕인 프레이를 죽이기 위해서 공간을 짓이기면서 기습하던 걸 보호했던 거로 기억한다.
“그때 세계수께서는 저를 거두어 치료를 해 주심은 물론이고 보호까지 해 주셨습니다. 인간계의 시간으로 따지자면 약 2-3년 정도를요.”
“찰나와 다름없는 시간이군요.”
나름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걸까.
이게 지모신도 그렇고, 세계수도 그렇고 사람이랑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나무와 꽃이랑 얘기를 하는 거라서 그런지 상대방의 감정이나 분위기를 읽을 수가 없다.
“앞으로 200년 정도 뒤에 벌어질 일입니다. 그때 저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많은 문제가 있지만 우선 가장 궁금한 걸 묻도록하죠. 제가 그대를 돕는 것에 득은 무엇이지요?”
“⋯⋯.”
“인간의 아이여, 그 정도 자비를 내려주는 것 정도는 내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허나, 제 힘을 무분별하게 나누는 건 오랜 기간 자라 온 나무처럼 단단해진 제 신념을 무너트리는 행위입니다.”
“정령계를 구하는 것 정도로는 안 되겠습니까? 먼 훗날 정령계를 침공하는 신들을 제가 몰아냅니다.”
“그건 크게 흥미롭지 않군요.”
나름 정령들을 감싸는 입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는지 세계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까 지모신이 말해 줬던대로, 어머니 같은 관계가 아니라 단순히 이해관계가 일치하기에 함께하는게 맞는 듯했다.
“으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슬쩍 눈을 돌려 나뭇가지에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고대의 정령들을 가리켰다.
“저것들을 전부 깨워 드리겠습니다.”
“⋯⋯그건 퍽 흥미롭군요.”
혹시나 싶어서 해 봤던 말인데 적중했다.
세계수가 전쟁에 지치고 다친 고대의 정령들을 받아들였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긴 시간을 함께하게 될 줄은 몰랐겠지.
“처음엔 딱하여 받아주었지만, 지금은 제 품안에 안겨 따스함을 버리지 못하는 응석받이에 불과합니다.”
“설명하실 필요 없어요, 딱 그런 느낌이에요. 아들이 집에서 취직도 안 하고, 밖에도 잘 나가지 않는 분위기였거든요.”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제 감정이 전해졌으리라 믿겠습니다.”
암, 그렇고말고.
“어차피 신들이 침공을 시작하면 저것들 다 징병되서 끌려가게 됩니다. 200년 후의 제가 그렇게 만들거든요. 그래서 그런데 200년 정도만 기다려 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당장 고대의 정령들을 풀어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세계수는 그 정도는 문제가 아니라며 큰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얼마나 오랜 기간을 살아왔는데 200년 정도는 기꺼이 기다려 주겠지.
하지만 여기서 세계수는 조금 걱정스레 내게 물어 왔다.
“제가 그대를 돕는다고 하여도,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바와 같이 제 기운을 받는다면 정령들조차 이리도 깊은 잠에 빠지게 됩니다.”
아, 그 부분인가.
“하물며 인간인 당신이 제 기운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몸의 상처는 치료가 되더라도, 평생을 깨어나지 못하거나 역으로 몸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지요.”
걱정하는 세계수의 말에 나는 호기롭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방법을 나름대로 준비해 뒀었거든요.”
[흐음? 이것도 비밀인가?]
어느새 옆에서 끼어든 지모신. 원래는 세계수한테 말할까 했으나, 당시 세계수가 내가 깨어난 걸 보면서 놀라던 걸 생각하면 말해 주지 않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응, 비밀이야.”
[참으로 비밀이 많은 사내로군.]
“그것 또한 200년 후의 즐거움으로 생각하도록 하죠.”
뭐라고 하든 일단 급한 불은 꺼트렸다.
이제 200년 후의 내가 마나를 잃고 다 죽어 갈 때쯤 세계수가 나를 받아 주고 치유해 주겠지.
그리고 에레오나한테 줬던 마법 신호를 그녀가 터트리면 세계수의 안에서 잠들어 있던 내가 깨어난다.
깔끔하게 정리된 상황에 조금 미소가 새어나왔다.
“볼일은 끝났지만, 잠깐 쉬다 가자. 너무 쉬지 않고 돌아다녔어.”
세계수의 앞에서 털썩 주저앉은 내 옆으로 자연스레 다가오는 지모신은 투덜거리면서도 일단 알겠다 답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