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굳이 나의 행동에 대한 변명을 해보자면 우리 모두를 위해서였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일단은 한 가지만 확실하게 해 두자.
방금 내가 천마주교 파이엔을 저 멀리 날려서 건물 몇 개 부수고 바닥을 구르며 날아가게 만들지 않았다면, 그는 분명히 스승님을 죽였다.
내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크리스티나 엘리나에겐 운명보다 이른 죽음이 찾아왔을 거다.
그렇다면 지모신과의 계약이 파기됨은 물론, 내가 미래로 다시 돌아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 역시 사라지게 된다.
나는 이 시대의 스승님에게 다시 한번 황금의 마나를 받아야 했으니까.
정확히는 스승님이 돌아가시고, 펼치신 결계에서 이 세상의 나도 모르게 일부만 슬쩍 떠오려고 했다.
“라엘……?”
스승님의 티 없이 맑은 금색 눈동자가 정확하게 나를 관통했다. 어떻게든 몸을 비틀면서 얼굴을 가려보려 했지만 이미 들킨 건 들킨 거다.
[이걸 어떻게 할 생각이지? 우리의 계약이 생각보다 오래갈 거로 생각했건만.]
품에서 혀를 차면서 나를 질타하는 지모신. 하여튼 나이는 많으면서 성격이 급하다.
“조금 기다려 봐. 이게 오히려 정답일 가능성이 있어.”
지금 스승님의 모습은 딱 내가 동굴로 업고 가던 그때와 똑같다. 여기서 이쪽 세상의 내가 나타나서 스승님을 데리고만 가면 끝이다.
“스승님! 스승님!”
실제로 저 멀리서 다른 내 목소리가 들렸기에 스승님은 흠칫 놀라며 다시 나를 확인했고, 그냥 신기루처럼 도망을 치려 했으나.
“내가, 성공했구나.”
도망치려던 내 발걸음이 딱딱하게 굳은 나무줄기가 된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라엘 텔리즈먼!]
그냥 뭉뚱그려서 넘길 수 있는 상황을 제 발로 차 버린다면서 지모신은 더욱이 날뛰었지만, 내게 있어선 이걸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스승님은 나의 존재에 대해서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다.
내가 어떠한 존재이며, 어디서 찾아왔는지에 대한 사고가 이미 끝난 상태.
그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희대의 천재라고 불리던 스승님이라고 하더라도 불가능했다.
마나도, 권능도 없는 상태에서 인간이 손에서 불을 뿜는 행위를 할 수 없는 게 당연하듯, 스승님 역시 아무런 실마리 없이 나를 알아챌 수는 없었다.
“흐흐, 몇 년이나 뒤에서 온 거지? 설마 우레아랑 계약을 했느냐?”
“…….”
“나는 오늘도 너와 함께했으나, 너는 나와 몇 년 만에 만나는 건지. 말해 줄 수 있겠느냐?”
“스, 승님.”
나도 모르게 한 걸음.
쓰러져 숨을 고르는 그분을 향해 다가간다.
어느 날, 그런 의문이 들든 적은 있었다.
스승님은 내게 마지막 결계에 대해서 동굴 내부에서의 1년이 바깥에서는 한 달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그런데 막상 내가 다섯 달의 시간을 보내고 바깥으로 나오니, 두 세기라는 길고도 긴 세월이 흘러가 있었다.
강산이 모습을 감추고 건물이 솟아올라 왔다. 역사는 왜곡되고 그 위에 거짓이 점철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에 속아 부조리한 현실을 당연시하고 있었다.
스승님의 마법 술식의 어디가 잘못되었던 걸까 싶었지만, 저 반응을 보며 확신했다.
“제가, 복수하지 않으셨으면 했군요.”
스승님은 나를 일부러 200년 뒤의 세계로 보내셨다. 내가 처음 보았듯, 아무리 우리가 치열하게 싸웠더라도 200년 뒤의 세계에서는 단순히 역사의 한 조각이었고.
그곳에는 내가 죽이겠다 다짐한 천마주교 파이엔이 없을 테니까.
“흐흐, 어느 스승이. 제자가 손에 피를 묻히길 원하겠느냐.”
“…….”
여기서 미래에도 실은 마교가 판을 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스승님은 나를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하신 거고, 결과적으론 옳았으니.
“그래, 어떠하더냐? 먼 훗날의 세상은 썩 살만하더냐?”
“……예.”
눈시울이 붉어지며, 먹먹한 감정이 가슴 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토록 뵙고 싶었던 스승님이 나를 알아보고 물어 오신다.
그야말로 꿈에서나 보던 광경.
“덕분에 많은 이들을 만났고, 많은 것을 보았으며,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먼지와 자갈이 굴러다니는 흙바닥에 주저 없이 무릎을 꿇었고, 이마가 대지에 닿는다.
“감사합니다.”
나의 감사 인사에 스승님은 작게 웃어 보이며 손을 내저었다.
피를 토하시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치료 마법을 사용하려 했으나, 균형을 관장하는 신은 더 이상 나의 횡포를 좌시하지 않았다.
[이제 그만.]
지모신이 불어온 바람이 나의 몸을 천천히 띄워 올린다. 반항을 하려면 할 수 있었으나, 스승님의 시선은 이미 내가 아닌 다른 라엘 텔리즈먼에게로 향해 있었다.
나를 인적이 드문 숲으로 데려온 지모신은 애써 위로하듯 내게 말했다.
[더 이상 그곳에 있었으면 이 세상의 너와 마주쳤을 것이다.]
“그래, 고마워.”
[네가 말한 대로, 방금 행위는 운명대로였음을 인정하마. 거기서 끼어들지 않았다면 악신을 섬기는 아이가 네 스승을 죽였겠지.]
지모신의 인정에도 나는 썩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한편에 응어리가 진 것처럼 아련하고 답답한 기분만 쌓여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우선 동굴로 가자. 거기서도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어.”
[바쁘군, 하지만 좋다. 너희 인간들은 찰나와 같은 삶을 살아가기에 그토록 치열하게 살아가지. 난 그게 좋다.]
“내가 아는 정령이랑 비슷한 말을 하네.”
테토가 들었다면 공통된 흥밋거리를 가지고 있다고 좋아했을 텐데.
“녀석들은 잘 있으려나 몰라.”
문득, 놔두고 온 정령들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그리워졌다. 내가 남기고 온 쪽지는 벌써 읽었겠지?
괜히 자기들 두고 갔다고 소란 피우긴 할 테니 다른 애들이 좀 고생할 거다.
그래도 내가 정신을 잃어서 세계수의 품에서 쉬는 2년 동안도 묵묵하게 잘 기다리지 않았는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얼마나 걸릴지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돌아가긴 할 거다. 그러니까 괜히 호들갑 떨지 말고 세상 구경이나 조금 더 하고 있기를 바랐다.
* * *
-나도 갈 거야!
엘리나가 읊어 주는 라엘 텔리즈먼의 마지막 편지 내용을 전부 들은 운디네가 주먹을 쥐며 강하게 의견을 피력했다.
-그래, 가자! 감히 우리를 놓고 혼자서 떠나?
운디네와 마찬가지로 강경파인 플레임 또한 그녀의 말에 동조하며 외쳤으나 테토가 고개를 저었다.
-방법은? 과거로 돌아갈 방법이 있나? 그건 정령왕이나 다른 신들조차 힘들 것으로 보이는데.
운디네와 플레임이 테토의 말에 곧바로 엘리나를 바라봤다. 라엘 텔리즈먼이 과거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스승이 남긴 황금빛의 마나 덕분.
그렇다면 이쪽 세상의 크리스티나 엘리나도 가능하지 않을까 했지만, 그녀는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요. 우레아와 지금부터 계약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마법을 만들고, 다루며, 스승님이 떠나신 곳을 정확하게 찾아가기 위해서는 못해도 10년은 필요할 거예요.”
“게다가 라엘이 말했지 않았나.”
엘리나의 옆에 서 있던 제라니 황제도 덧붙였다.
“금방 끝내고 오겠다고. 그러니까 괜한 짓 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맞는 말이구나.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던 라푼젤이 잔잔하게 동의했다. 허나, 그녀의 안에서는 감정이 꽤나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라엘이 돌아오면 어떻게 응징하고, 어떻게 잡아 둬야 하는지겠지.
아까까지 안색이 어둡던 에레오나가 주먹을 쥐며 끄덕였다.
“감히 동업하겠다고 해 놓고 이렇게 도망을 쳐? 이번에는 절대로 안 놓칠 거야.”
사파이어와 같이 푸른 그녀의 눈동자에는, 소니아의 청염이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엘리나 역시 라엘 텔리즈먼의 편지를 천천히 놓으며 동의했다. 지금 당장에 무언가를 할 수는 없었다. 라엘 텔리즈먼은 꼭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기다리는 수밖에.
“또 평소처럼 뒷머리나 긁적이시면서 와서는 배고프다고 하실 거예요.”
그 말에 라엘의 전속 시녀인 실비아가 옅은 미소를 입게 걸며 답했다.
“그럼 오셨을 때 드실 맛있는 요리를 연구해야겠네요. 다시는 어디 가실 생각 못 하도록.”
그렇게 무거워지던 분위기는 창문을 열어 환기라도 시킨 것처럼 점차 그 무게를 줄여 갔다.
“대마도사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황제한테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자리를 비우다니. 아주 괘씸하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라엘 텔리즈먼이 어서 돌아오길 바라듯 뒷말을 끌면서 제라니 황제가 돌아갔다.
그를 시작으로 한두 사람씩 자리를 비웠고, 결국 방안에 남은 건 라엘의 제자인 엘리나와 동업자인 에레오나뿐이었다.
“레온이 알았으면 바로 돌아왔겠네.”
“신혼여행을 망쳤다고 루이나 언니한테 한소리 크게 들었을 거예요.”
레온 엘 라디어트와 루이나는 현재 신혼여행 중이었기에 따로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두 사람이 돌아와도 당장에 할 수 있는 건 없다 보니, 큰 걱정하지 않고 좋은 시간을 즐기길 바라는 작은 배려였다.
“너는 괜찮아?”
아무래도 라엘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엘리나가 걱정되었기에 에레오나가 조심스레 묻자,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정리하며 답했다.
“예, 괜찮아요. 이미 한번 해 봤던 일이잖아요. 그때는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했는데 지금은 돌아오시겠다고 편지도 남겨 주셨고, 어디 가셨는지도 아니까요.”
물론, 그곳이 과거라는 말도 안 되는 장소이긴 했지만 그녀의 스승인 라엘 텔리즈먼이라면 허풍으로 들릴 말도 무덤덤하게 실현시켰다.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편지만 남기고 가신 이유도 분명, 돌아오실 거니까 그러신 거라고 생각해요. 조금 쓸쓸하긴 하지만요.”
어린 나이에 너무도 많은 경험을 하게 된 엘리나는 겉으로는 순박해 보였으나 그 속은 너무도 성숙했다.
성숙했기에 일부로 그 나이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것임을 에레오나도 라엘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라엘이나 다른 혁명군의 사람들이 그녀의 어린 시절을 망쳤다는 죄책감을 느낄 테니까.
에레오나는 천천히 엘리나를 안아 주며 다독였다.
“그 녀석이 우리한테 아무 말도 없이 가버린 이유는 다시 돌아오기 위함도 있지만, 우리를 보면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도 있을 거야.”
“마음이, 흔들려요?”
품 안에서 빼꼼 고개를 들며 되묻는 엘리나.
“응, 우리 얼굴을 보면 과거로 가기 싫어질 테니까.”
“후훗.”
썩 듣기 좋은 말이었는지 엘리나는 정말 그러면 좋겠다고 속삭였다.
‘……얼른 와 줘.’
그런 엘리나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아 주며, 에레오나는 속으로 그를 애타게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