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생명력이 느껴지는 싱그러운 녹빛이 만연한 숲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인, 모든 것을 태우는 검은 불꽃을 두른 남자가 내달린다.
마교단장 듄.
앞으로 내딛는 그의 발걸음에서 묻어 나오는 거친 불꽃은 자연의 모든 걸 공평히 불태우며 치고 나오고 있었다.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라엘 텔리즈먼!”
듄의 주먹이 정확하게 내 복부를 강타하기 위해 내질러졌으나, 아무리 거칠고 기세가 좋다고 하더라도 일종의 법칙이 적용되듯 내게 닿을 순 없었다.
마교단장이란 두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강대한 존재였다.
이 대륙 전체를 뒤져보더라도 마교단장은, 특히나 듄이라는 인물은 쉽게 표현하자면 강함만으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자이겠지만.
‘이제는 수준 차이가 좀 심하지.’
이미 내 마법에 잡아먹힌 죽음의 기사들은 땅에 빠져 대지에 잡아먹히며 익사 당하고 있었고, 부들부들 떨리는 듄의 주먹은 기세만큼 효과적인 위력을 선보이지 못했다.
“마법사가, 정면에서 내 공격을 막았다고?”
“아, 그렇지. 이 시간대의 나는 좀 그런 면이 있었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또 추억이네.
이때는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기사들의 뒤에 숨어서 마나를 모으고 수식을 짜고 했었다.
달려드는 적들에게서 말고삐를 돌리고 거리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나름 추억이라면 추억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
“200년이 지났는데 사람이 충분히 성장하지 않겠냐?”
“200년…….?”
이해하지 못하는 듄의 머리를 향해 지팡이를 휘두른다. 감이 워낙 좋은 녀석인지라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일격이었음에도 사력을 다해서 피하는 게 인상적이었으나.
“마법사가 지팡이를 휘둘러서 누구 때리는 거 본 적 있냐?”
당연하게도 응축된 마나가 거세게 듄의 머리를 가격했고, 녀석은 제대로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기절했다.
“아고? 덩칫값은 좀 하지.”
내 생각보다 너무 쉽게 쓰러진지라 조금 당황했지만, 잠시 생각해 보니 크게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200년 전에 약했던 건 나뿐만이 아니다.
마교단장들 역시 이쪽 시간대의 나를 상대로 5:1로 싸우며 고전할 정도로 약한 상태.
‘이렇게 보니까 진짜 허접하네.’
예전에 루이나가 그런 소설을 읽고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미래의 지식과 힘을 얻은 뒤, 과거로 회귀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
웬일로 루이나가 책을 읽어서 흥미가 동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랑은 정반대이지만 그래도 비슷한 느낌의 내용이라고 깔깔 웃어 대는 루이나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려오는 듯했다.
“씨,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리워하고 있네.”
됐다.
일만 잘 풀리면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이제 시작했는데 벌써부터 감상에 젖어서 행동하는 건 전혀 나답지 않았다.
“그럼 기억부터 좀 손볼까.”
지렁이처럼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일단은 나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것부터 시작하려고 했는데.
‘잠깐만, 근데 그냥 여기서 죽여도 괜찮은 거 아닌가?’
오히려 내가 녀석을 죽이면 더 좋은 미래가 펼쳐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죽일까?”
이 녀석 하나가 사라지는 것만으로도 미래의 수많은 목숨들이 구해지며, 많은 사람들이 비극을 겪지 않는다.
심지어는 잘하면 아르니티 제국과 마교의 현 전투에서 아르니티 제국이 승리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면 다른 애들은.’
미래의 애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모든 기억을 잃고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건가?
‘아니야, 아예 태어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지.’
만약 듄의 죽음으로 아르니티 제국이 승리한다면 퍼지라는 개념도 사라질 것이고, 혁명군도 없다.
레온의 고향인 태양왕국 라스도 건제할 것이고.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듄 한 사람만 죽여도 미래가 많이 꼬인다는 걸 알아채긴 했지만, 그래도 이 녀석이 만들 참상을 생각하면.
“으으.”
누구도 해 보지 않았을 무게의 고민을 이어 가던 그때.
숲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며 나무들은 주인을 경배하듯 고개를 숙였다.
대지가 갈라지기 시작하며, 그 안에서 피어오르는 작고 고운 하얀 꽃 한 송이.
“지모신?”
이미 두 번이나 만난 경험이 있기에 익숙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으나, 오히려 놀란 건 저쪽이었다.
[인간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느냐.]
“아, 그렇지. 너는 모르겠구나.”
이 시간대의 지모신은 나를 아예 모르고 있겠지.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까 고민했으나, 지모신은 그런 잠깐의 시간도 주지 않았다.
[어찌하여 이리도 강대한 힘을 가진 인간이 지금까지 나의 시선으로부터 숨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지모신의 분노와 사명이 담긴 힘이 적대적으로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너는 인간이 가지면 안 되는, 너무도 큰 힘을 가지고 있다.]
“너무 많이 들은 말이라 이제는 조금 식상하게 느껴지는데?”
옅은 미소를 그리며, 나를 삼키기 위해 점점 입을 벌리기 시작한 대지를 지팡이로 탕 내리쳐 준다. 그러자 지모신의 부름에도 잠잠히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어떻게!]
“왜 나한테 이러는지 알고는 있거든? 균형을 수호해야 한다든가, 혹은 너의 절대적인 자리를 위협한다든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우리는 나름 대화를 할 여지가 많아.”
[네놈,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나?”
생각해 보면 그랬다.
에레오나를 살리기 위해서 우레아의 도움을 빌려 황금빛 마나를 다루었을 때. 생과 사의 경계를 넘기는 순간, 지모신은 내게 와서 이렇게 말했었다.
‘라엘 텔리즈먼, 또 그대인가. 주제를 알라, 어딜 생과 사의 윤회에 손을 대느냐.’
그 당시에는 지모신이라는 절대적인 위치라서 나 같은 인간도 알고 있구나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200년 전의 나를.
그러니까 지금 나와 만났기에 ‘또’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겠지.
헛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나의 작은 행동이 미래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지 알고 있다는 건 생각보다 기분 좋았고, 신기했으며. 스스로를 대단한 존재처럼 느끼게 만들어 주었다.
‘루이나가 말했던 대리만족이 뭔지 알겠는걸.’
그녀가 읽었던 소설의 주인공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책을 등한시하는 루이나가 읽고 있어서 나중에 빌려 달라고 했었는데 까먹고 빌리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꼭 챙겨 보는 건데.
뭐 어쨌든.
그녀가 미래의 나를 조금은 더 예쁘게 봐주길 바라며, 로브 끝자락을 살짝 들고 반대 손은 가슴팍에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라엘, 라엘 텔리즈먼. 200년 후의 세계에서 찾아온 대마도사야.”
* * *
[……하아.]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서 고개를 휙 돌려서 꽃을 확인하자, 지모신은 괜히 시선을 피하듯 꽃봉오리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다.
“와, 지모신도 한숨을 쉬네. 하긴, 그렇게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세상일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진 않겠지.”
[그대라는 존재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한숨을 내쉬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원래 그래. 나라고 마교 새끼들이 나타날 거라고 알고 있었겠어? 삶 속에서 자신이 예상하고 있는 일이 일어날 일은 별로 없어. 대부분이 예상 밖의 일이지.”
[그대는 내가 얼마나 오랜 기간 대륙의 균형을 수호해 왔는지 알고는 하는 말인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100년도 못 사는 인간인데. 야, 그런데 이런 말이 있다. 길 가던 사람 세 명만 붙잡아도 그중에 내 스승이 있다고. 누구에게 어떤 가르침을 받을지 모르는 게 세상이야.”
[참으로 입이 가볍구나. 대륙을 수호해 온 신에게 조금은 경외를 보일 생각은 없는가?]
지모신의 일종의 경고에 나는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내가 살던 세계는 신이든, 정령이든, 인간이든 모두가 평등해진 세계야.”
[뭣?]
이게 미래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는 자의 힘인가?
말도 안 된다면서 놀라는 지모신에게 나는 어떻게 하면 더 짜증 나게 할 수 있을까 고심이 섞인 비웃음을 지으며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 줬다.
“200년 뒤에 우레아가 우리 집 뒷마당에 심어져 있어. 자그마치 내 제자가 해 놓은 작품이지.”
[세상을 덮는 마나의 아이가?]
우레아 정도면 고위신 중에서도 특출난 녀석인지라 지모신은 말도 안 된다며, 거짓을 고하지 말라 외쳤다.
[그런 세상이 온단 말이냐? 정말로 인간과 신 그리고 정령이 함께하는 세계가 온다고?]
“아, 뭔가 잘못 알고 있네. 셋이 사이좋게 있다는 소리는 아니야. 신들의 지배에서 인간과 정령이 벗어났을 뿐이지.”
[어떻게?]
이 이상 말을 해 줘야 하나 싶다가도, 어차피 지모신을 내 편으로 만들어 두지 않으면 이쪽 세상에서 행동하는 데 제약이 있을 것이기에 나는 숨기지 않고 말해줬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거든. 악신들은 대부분 죽였고, 그냥 신들도 반절은 죽었을걸.”
[무어라?]
다시금 대지가 진동한다.
이번에는 나를 위협하기 위함이 아니라, 정말로 놀랐기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느낌.
나는 시끄러워서 귀를 막았던 손가락을 떼고 별거 아니라 설명했다.
“지금 내 힘 보면 대충 느낌 오지 않아? 어느 정도는 숨기고는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신들보다 강할걸? 마나는 우레아보다 이제 나의 것이라고 부르는 게 맞아.”
사실 우레아가 마나 그 자체이긴 하니까 어찌 보면 우레아가 내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괜히 그런 범죄자 신을 내 것이라 칭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못 믿겠어? 숙명의 여신 레이기스, 운명의 신 라이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는 신들의 이름까지 하나씩 내가 꺼내 들자 지모신은 이제 어지러운지 하얀 꽃이 점점 허공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종말의 신 엔드. 내가 마지막에 다 죽였던 놈들이야.”
[그, 그들을 죽였다고? 나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신들을?]
그 말을 들으니 놈들이랑 싸우던 때가 생각났다. 과거의 고난은 결국 훗날의 추억이 된다더니 정말이었다.
“그래 맞아. 그때 네가 와서 나를 도와준다고 했었지.”
지모신이 와서 숟가락 하나 얹으려던 기억이 나서 웃음을 흘리자, 그녀가 조급해하는 어린아이처럼 나를 보챘다.
[그 뒤는? 내가 그대를 도와서 숙명, 운명, 종말을 죽였는가?]
“응?”
당연히 꺼지라고 말해 줬다고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자기를 깠다고 말해 주면 미래에서 나를 안 찾아오지 않겠는가.
“으음, 뭐. 비슷하지.”
[그런가.]
두루뭉술하게 말해 주자 지모신은 어딘가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뭐, 이쯤 되면 내가 미래에서 왔다는 것 정도는 인정하겠지?”
나무줄기를 등받이로 사용하고 있던 나는 천천히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흙을 툭툭 털려고 했지만, 전혀 묻지 않고 깔끔했다.
“아 참, 방석으로 쓰고 있었지.”
기절한 듄을 깔고 앉았던 걸 까먹었던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들었다.
이미 해가 지고 어두워진 하늘.
쓰러진 지 반나절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일어나지 않는 듄을 툭툭 쳐 보지만 여전히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죽지는 않았는데.”
숨은 쉬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우렁차게 코까지 골면서.
“에휴, 애가 이렇게 허약해서 어따 써먹냐.”
한숨을 내쉬며 듄의 이마를 지팡이로 툭툭 두드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