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여기도 나름 괜찮은데?”
이른 아침부터 제도 아르니의 등을 긁어 주는 막대기처럼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곳부터 시작해서, 아예 시선조차 닿지 않는 곳까지 돌아다니고 있는 에레오나.
간단한 운동복과 묶은 머리는 그녀가 아침 운동을 하려 했다는 걸 말해 주고 있었지만, 막상 집중하다 보니 점심때까지 땅이나 건물을 보러 다니고 있었다.
“이쪽에도 하나가 더 있다고 말했었지?”
부동산 아저씨가 소개해 줬던 애매한 기억을 떠올리면서도 그녀의 발걸음은 예전처럼 조급했다.
“진짜…….”
퍼지의 입장에서 자유를 쟁취한 이후로는 이런 초조함을 느껴 본 적이 없었기에 에레오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굳이 그녀가 급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 어제까지만 해도 부동산을 둘러보기는 했지만 크게 급하지는 않았고, 혼자서 결정해도 될 문제가 아니었기에 라엘 테리즈먼과 같이 돌아보려고 했었다.
어제 제니 공주가 자신을 스쳐 지나가며 했던 말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는 제가 뺏어가요.’
뒤통수를 치는 것만 같은 충격.
설마 한 제국의 공주가 라엘을 노리고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던 에레오나는 생각 이상으로 강한 위기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까 예전에 메리 공주한테도 구애를 받은 적이 있다고 했었지.”
200년 전 제국의 공주이던 메리라는 이름의 공주에게도 그녀의 처소로 초대를 받은 적이 있었다고 술자리에서 무용담처럼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어차피 200년 전 사람이라고 그냥 웃으면서 넘어갔는데.
‘생각보다 공주들한테 인기가 많아.’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는 말 그대로 대마도사인 저 남자가 코가 꿰여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았기에, 에레오나는 조금 더 공격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하여튼 마법이랑 제자 말고는 크게 관심 있는 게 없다니까.’
같이 학원을 차리기로 했으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 아닌가. 물론, 그가 대마도사라는 위치에서 지금까지 굉장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음은 알고 있었기에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냥 속으로 하는 투정.
이 정도는 해도 되잖아 하고 에레오나는 스스로 납득하며 미리 봐 뒀던 토지 앞에서 호흡을 고르며 팔짱을 꼈다.
“흐음, 여기가 괜찮은 것 같긴 한데.”
번화가에서 크게 멀지도 않고, 주변이 주택가여서 자신들 같은 학원이 자리 잡기에도 썩 괜찮아 보인다.
“다음에 한 번 데려와 봐야겠네.”
나름대로 불러낼 명분이 생겼다고 속으로 좋아하던 에레오나의 뒤에서 다가오는 케케묵은 쩐내.
“와, 내가 말했지. 대박이라고.”
“그러게, 은발부터가 완전 고급스럽네.”
“뭐야. 어디 귀족 아니야?”
몸에 새겨진 흉측한 문신, 움푹 들어가서 물이 고일 것만 같은 볼과 살짝 충혈된 눈동자에 더불어 며칠간을 씻지 않았는지 온몸에서 풍기는 악취.
‘약쟁이들?’
불량배 중에서도 질이 좋아 보이지 않은 게 딱 티가 나는 녀석들. 숱한 경험이 있는 에레오나는 한눈에 그들이 약쟁이라는 걸 눈치챘다.
“어이, 누님. 우리랑 같이 재미 좀…….”
콰드득!
그것은 사람의 주먹이 누군가의 안면을 때리면서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샐러드를 만들 재료인데 이상하게도 전혀 뜬금없는 스테이크가 결과물로 나와 버린 것처럼, 에레오나의 주먹은 주먹이 내면 안 되는 타격음을 하늘에 퍼트렸다.
추욱 늘어진 불량배.
말 그대로 비명조차 없이 그대로 고꾸라진 자신의 친구를 보며 다른 불량배들은 얼어붙은 듯 굳어서는 에레오나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이 주변에 사는 애들인가 봐?”
원래였으면 그냥 보내 주려고 했다.
아직까지 제국민들에게 있어 퍼지들이란 좋지 않은 인식이 심어져 있었으니까.
소란을 일으킨 사람이 알고 보니 퍼지였다. 역시 놈들은 믿을 게 못 된다 같은 상황이 벌어지지 않길 바랐으니까.
하지만 약쟁이들은 아니었다.
특히나 에레오나와 라엘이 만들 학원 근처에 서식하는 놈들이라면 더더욱 미리 뿌리를 뽑을 필요가 있었다.
뚜둑 뚜둑.
목검이 있었다면 오랜만에 손맛을 느껴 볼 수 있을 텐데. 에레오나는 속으로 입맛을 다시며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말 그대로 찰나의 순간.
쓰러진 불량배들을 두고 경비를 부르러 다녀오니, 생각 외로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어?”
에레오나가 워낙 순식간에 처리했기에 큰 소란이 일지는 않았는데 무슨 일인가 했더니 쓰러진 불량배들을 두고 근처 주민들끼리 열띤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었다.
처음엔 무슨 토론을 하고 있는 줄 알았을 정도로 그들의 기세가 강렬했다.
“무슨 일이세요?”
경비들을 데리고 찾아온 에레오나가 당황하며 무리의 중심으로 끼어들자, 한 아주머니가 에레오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그래! 이 처자예요! 이 처자가 이 썩을 놈들을 아주 싹 정리해 줬다고요!”
그러자 주민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과 박수 소리. 당황한 에레오나였지만 위병들이 세 사람을 마약 혐의로 체포해서 데려간 이후, 주민들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놈들이 이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못살게 굴었는데요.”
“맞아요. 저희 애들도 돈도 뜯겼고, 옆집 할아버지도 괴롭힘을 당하는 걸 본 적 있다니까요.”
“위병들이 오면 얼마나 잽싸게 도망치던지. 아주 잘됐네 잘됐어!”
인근 주민들에게 공공의 적이었던 불량배들을 정리한 정의의 사도가 되어 버린 에레오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부끄러움을 숨겼다.
“그런데 처음 보는 처자인데?”
처음 자신을 알아챘던 아주머니의 물음에 에레오나는 마침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쳤다.
“아, 실은 이 자리에 도장을 차릴까 보고 있거든요. 검술 도장이랑 마법 학원이 같이 있는 특별한 장소로요.”
흥미가 동한 듯한 사람들.
특히나 단순히 허세만 부리는 다른 도장의 사범들과는 다르게 직접 불량배들을 한주먹에 제압하는 능력을 보여 줬으니 신뢰도가 급상승했다.
‘이거 시작이 좋을지도?’
에레오나는 속으로 흥얼거리는 콧노래를 주체하지 못하던 순간.
저 멀리서 금발의 소녀가 건물들 사이를 헤집으며 날아오고 있었다.
“엘리나?”
수강료는 얼마냐, 언제부터 시작하냐, 학생들 나이대는 어떻게 잡고 있냐 등. 수많은 질문들 속에 파묻히고 있던 에레오나의 눈동자가 정확히 그녀의 눈과 마주쳤고.
엘리나는 급하게 땅으로 내려와 울먹이며 에레오나에게 달려왔다.
주민들은 당연히 대마도사인 라엘 텔리즈먼의 하나뿐인 마도사 크리스티나 엘리나를 알아봤지만, 지금 그녀가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어, 언니.”
황금빛 눈동자에서 흐르는 굵은 눈물방울 속에서, 왜인지 어제 라엘 텔리즈먼이 자신에게 보였던 은근히 거리를 두는 행동이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격렬한 불안감 속에서, 에레오나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 * *
“…….”
숲속의 새 지저귐과 바람에 치이는 나뭇가지들의 소리가 나를 반겨 준다.
시간을 이동하는 개념의 마법은 나조차 처음이었던지라, 오랜만에 밀려드는 두통과 어지러움에 잠시 근처 나무에 기대어 앉아서 쉴 필요가 있었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자, 오른손에 남아있던 황금빛 잔재의 마나가 이제는 눈 녹듯이 사라지고 있었다.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스승님의 마나.
에레오나를 살리면서 대부분 사용했지만, 극소량 남아 있던 마나를 결국 사용해서 과거이자, 현재로 돌아왔다.
“마나가 조금이라도 더 남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돌아가기 위해서 복잡한 방법을 쓰지 않아도 괜찮을 텐데 하고 조금 아쉬웠다.
내 제자였던 엘리나가 우레아와 계약을 한다면 당장에 황금빛 마나를 다룰 수는 있겠지만, 그걸 가지고 시간 이동을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스승님이 만들어 낸 정결하면서도 예술 공예품과도 같은 마나 덕분에, 나도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이 마나를 다룰 수 있었던 것이다.
제대로 정제되지도 않은 마나로는 이 정도 경지까지 오기 위해서 꽤나 시간이 걸리겠지.
“끙차.”
200년 전이라고 해 봤자 코를 통해 들어오는 공기는 썩 다를 바 없었다.
‘여긴 어디지.’
어디인지는 모르겠고, 정확한 시간대도 감이 잡히지 않았기에 우선은 근처 마을이나 도시라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순간.
저 멀리서 무언가가 우르르 내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워낙 많이 들어 봤던 기사의 군마가 거침없이 질주할 때 내는 소리.
이런 울창한 숲에서도 말들이 저런 소리를 낼 정도로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건가 싶었다.
그리고 정답이 나왔다.
‘아니,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사람도 걸어 다니기 힘들 정도로 빽빽하게 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수백의 군마가 아무렇지도 않게 달린다?
“이거 설마.”
나는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그들이 다가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검은 갑주를 걸치고,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는 실체 없는 죽음의 기사들이 굵은 나무들을 유령처럼 통과하면서 내달리고 있었다.
‘아, 저런 부분 때문에 꽤 고생했었지.’
죽음의 기사들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전투력도 분명 위력적이긴 했지만, 저들이 가장 까다로운 부분은 바로 저런 사기적인 기동성이었다.
절대로 나타날 수 없는 위치와 시간에서 갑자기 깜짝 등장해서는 군대를 유린하고 유유히 사라진다.
물론 나중에는 녀석들이 저런 기동을 하는 와중에도 대미지가 누적되고 있고, 날카로운 창 같은 함정을 설치해 둔다면 그대로 찔린다는 걸 알아내긴 했지만.
오롯이 군마의 발굽 소리만이 울려오는 침묵의 군대. 그들의 가장 앞에 서 있는 건 유감스럽게도 나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200년 후와는 다른 얼굴이었지만, 나는 사실 이쪽이 더 익숙했다.
전신에 그려져 있는 악신을 섬기는 흉측한 문신들과 살아 숨 쉬듯 꿈틀거리는 거대한 근육들.
결국 마지막에는 자신이 섬겨 온 파괴의 신 가이스의 장난감이 되어 버린 최강의 마교단장.
듄이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녀석들의 진행 경로에 당당하게 서 있는 게 바로 나.
“라엘 텔리즈먼?”
“아이 씨, 알아봤네.”
아무래도 이 시간대의 나와 착각을 한 것 같은데, 듄은 곧바로 전신 갑주를 걸치더니 죽음의 기사들과 함께 내게 달려들었다
“네놈이 어떻게 여기 있지? 파트라 쪽에 있다고 들었는데. 설마 우리의 기습을 읽은 건가!”
“그래, 뭐 그렇다고…… 잠깐만.”
파트라?
이미 사라진 지명이긴 했지만 그때의 일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왜냐면 내가 스승님과 함께 파트라에 있었던 이유가 바로 듄과 죽음의 기사들을 막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런데 놈들은 오지 않았고, 오히려 후퇴했다는 보고를 그곳에서 전투 식량을 까먹으며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분명 스승님이 “그 빡빡이 새끼 뭐야.” 하고 당황해하셨던 게 선명히 기억난다.
“아, 아아…….”
이렇게 맞춰지는 거구나 싶어서 나는 손으로 이마를 탁 치고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이러면 죽이진 못하겠네.”
한 번 정도는 더 죽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것 참 아쉽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