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아주 잘하는 짓이다.”
“아니, 그냥 그랬다는 거지.”
짜증을 팍팍 내고 있는 에레오나.
어떻게든 화를 풀어 주려고 옆에서 이런저런 변명을 해 보지만, 전혀 효과는 없었다.
“그렇다고 오늘 결혼하는 애랑 나를 엮어?”
“알았다니까.”
평소에는 금방 풀면서 왜 오늘은 이렇게 깐깐한 건지.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어서 그런 건가 싶었는데 저 멀리서 톰과 하트가 우리에게 다가온다.
얼른 오라고 눈짓으로 재촉한다.
눈치 빠른 하트는 장난치듯 몸을 뒤로 빼려고 했지만, 다행히도 우리 단순한 톰이 바로 앞으로 나왔기에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하트도 따라왔다.
“아야, 왜 그래?”
“어휴, 눈치 좀 챙겨라.”
톰의 팔을 한 대 툭 치면서 짜증을 내는 하트. 입꼬리가 살짝 떨리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인사했다.
“오랜만이네, 하트. 평소랑 똑같아. 좀 바뀌면 좋을 텐데.”
“라엘 님은 저희 리더랑 무슨 말을 그렇게 나누고 계셨어요?”
대화 주제를 바꾸려고 한다는 걸 눈치챈 하트가 사냥개처럼 놓지 않고 물고 늘어진다. 잠깐의 눈 맞춤이었지만, 우리 사이에서는 꽤나 여러 신경전이 오갔다.
근데 놀랍게도 이 상황을 정리한 건, 바로 그 눈치 없는 톰이었다.
“언제까지 리더라고 부를 거야? 우리 해체한 지가 언제인데.”
톰의 말에 에레오나는 옅게 미소를 띠며 톰의 말을 옹호했다.
“맞아, 이제 그냥 에레오나라고 부르라니까.”
우물쭈물거리면서 부끄러워하는 하트.
“그, 그래도. 입에 너무 붙어서 떼기가 쉽지 않아요.”
“뭐, 그건 인정해. 사실 나도 리더를 이름으로 부른 적은 없거든.”
자벨린 부대라는 이름으로 워낙 오랜 기간 활동하기도 했고, 그만큼 끈끈했던 이들이었기에 당장에 호칭을 바꾸는 게 쉽지는 않겠지.
“바꾸기 힘들면 바꾸지 않아도 괜찮아. 불편한 것도 아니고.”
에레오나가 웃으면서 말하자 알겠다면서 기뻐하는 하트와 톰. 아무래도 옛 상사나 다름없는 에레오나한테 말을 편하게 하기는 쉽지 않았겠지.
이렇게 우리는 꽤나 자연스럽게 옛날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옛날이야기라고 해 봤자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자유가 찾아온 지금은 이상하게도 오랜 시간이 흐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크흠, 재밌어 보이는군.”
뜬금없이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슬쩍 확인해 보니 본인이 황제라는 걸 알리지 못해서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한껏 꾸민 제라니 황제와 제니 공주가 서 있었다.
“……!”
깜짝 놀라며 예를 취하는 세 사람 사이에서 덩그러니 서 있는 나.
제라니는 눈짓이랑 손가락을 까딱이면서 너는 안 하고 뭐 하냐고 따지고 들었으나, 괜히 못 본 척 고개만 돌렸다.
“푸훗.”
그러자 옆에서 우리를 보고 있던 제니 공주가 빵 터져서는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는다.
“제니를 봐서 참는다.”
“그것보다 무슨 일이야?”
설마 제라니가 이렇게 찾아올 줄은 몰랐기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제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반란군의 수장이었던 레온이다. 그것도 나중에는 타국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제국을 무너뜨리고 태양왕국 라스까지 재건하려던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던.
물론, 제라니가 거기까지 알지는 못하겠지만 무엇이든 간에 전직 혁명군의 리더 결혼식에 참석하는 건 꽤나 큰 파문이 일법한 사건이었다.
장소만 빌려주는 줄 알았는데.
“우리 집 마당에서 결혼식을 하는데 내가 참여 안 할 수는 없잖아.”
“대마도사님의 친우 분이라고 하셔서 일부러 찾아뵀어요.”
제니 공주의 시선이 슬쩍 에레오나와 하트를 훑고 지나갔지만, 그냥 못 본 척한다.
하지만 시선을 느꼈는지 에레오나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슬쩍 내 옆으로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게다가 마교와의 전쟁에서 이들이 없었으면 지금의 제국은 없었을지도 모르니까. 감사 정도는 표시하고 싶었어.”
황제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전직 자벨린 부대원들은 깜짝 놀라면서도 은근히 쑥쓰러워했다.
“아, 저 여인은 대침공에서 봤던 얼굴이군.”
“하트입니다. 그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대침공에서 나를 대신해서 제라니 황제와 함께했던 하트가 부끄러운 듯 다시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제라니 황제는 복잡한 생각이 드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고맙네. 그대 덕분에 제국을 지키고 있는 게 단순히 황실이나 기사단뿐만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네.”
작은 것에서부터 많은 걸 배우는 게 바로 현 황제 제라니 데 아르니티.
내가 내뱉었던 작은 질문을, 결국 퍼지들의 독립이라는 결과로 이끌어 내기도 했으며.
하트의 도움을 받고, 혁명군에 대한 선입견을 가감 없이 깨부수기도 했다.
황자들은 총 3명이었다.
젤롬은 유배당했고, 제미아는 독살당했으며 마지막으로 남은 게 제라니.
나는 아이란이 황실을 지배하지 않았더라도 아마 제라니가 황제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할 정도로, 그는 황제라는 자리에 너무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제라니가 자벨린 부대와 여러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다면서 에레오나와 하트, 톰을 데리고 간다.
졸지에 남아버린 나와 제니 공주.
그녀는 싱긋 웃으면서 귓가에 다가와 속삭이듯 물었다.
“혹시 저분이 그분이신가요?”
“예?”
갑작스러운 질문에 깜짝 놀란 나는 살짝 뒤로 물러났으나, 공주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입게 머금은 채로 계속 물어왔다.
“저번에 여쭤봤잖아요. 마음에 담고 계신 분이 있으신지. 그게 저분이신가요?”
“…….”
입을 꾹 다문 나는 제라니 황제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있는 에레오나를 보았다.
애가 좀 다혈질인 부분이 있다 보니 괜히 욱해서 실수라도 하는 게 아닐까 걱정됐다.
그렇게 제니 공주에게 답하는 것도 잊은 채로 에레오나의 옆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신을 보는 걸 눈치챘는지 깜짝 놀라며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온다.
“아.”
“어머, 들켰네요.”
입을 가리고 웃는 제니 공주는 에레오나가 뻔히 보는 앞에서 다시금 내게 다가와서는 귀에 대고 말했다.
“제대로 말씀해주세요. 저분이 많이 곤란하신 것 같아요.”
“…….”
제니는 혀를 낼름 내밀고는 제라니 황제 쪽으로 다가간다. 에레오나와 스치면서 무언가 그녀에게 말했는지, 에레오나가 깜짝 놀라며 멀어지는 제니 공주를 힐긋 쳐다본다.
“무슨 얘기 했어?”
그리곤 곧바로 내게로 와서 따지고 들기 시작한다.
“아니, 별거 아니야.”
말할 수 있겠냐 싶어서 어물쩍 넘어가자니 수상하다는 표정을 짓는 에레오나.
괜히 여기서 주도권을 빼앗겼다가는 이상한 말까지 하게 될 것 같았기에 괜히 툭툭거려 본다.
“그러는 너는 갑자기 왜 제니 공주한테 꽂혔냐? 방금도 올 때 뒤돌아봤지.”
“그건…….”
방금 전의 나와 똑같이 입을 오물거리면서 무언가 말하려던 에레오나는 짜증 나서는 내 어깨를 주먹을 툭 하고 쳤다.
“야, 그것보다. 너 제대로 안 해?”
“또 뭘.”
왜 오늘은 얘한테 이렇게 혼나는 일이 많은 건가.
“우리 약속한 거 있잖아. 내가 검술 도장 차리면, 네가 옆에 마법 학원 지어서 같이 동업하기로 한 거.”
“아, 그거.”
잊고 있지는 않았지만 말할 타이밍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에레오나가 어깨를 으쓱거린다.
“내가 방금 제라니 황제한테 말했거든? 너랑 이런 걸 할 건데 괜찮겠냐고. 그런데 오히려 황실 이름을 대고 하면 괜찮다더라. 차라리 잘됐지.”
제라니 황제가 그렇게까지 허락을 해 줬다고?
어이가 없어서 녀석을 쳐다보자 윙크를 살짝 건네는 모습이 잘생겨서 더 짜증이 났다.
“어쨌든 네가 대마도사니까 가능하면 제도에서 창업하는 거로 해서 내가 건물이랑 알아보고 있으니까, 너도 다음 주부터 와서 도와. 알겠지?”
“그거 있잖아.”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말이 입안에서 맴돈다.
슬며시 에레오나 쪽으로 눈을 돌리자,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올망졸망하게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아무런 걱정도 없어 보이는 그녀에게 다시금 각오를 하며 다물었던 입을 떼어 보지만, 그때 옆에서 다가온 페르난도.
“야, 지금 사회자 어디 있냐고 찾잖아. 얼른 와.”
왜 페르난도가 이런 걸 말해 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알겠다고 말하며 녀석의 뒤를 따랐다.
“파이팅!”
뒤에서 에레오나의 응원 소리가 들려왔지만, 괜히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도망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잘하는 짓이다, 어디 갔던 거야?”
이미 준비가 끝난 턱시도를 입은 레온이 어이없다면서 내게 투정을 부린다. 간단히 사과를 하면서 나는 바로 마이크를 잡았고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축하해 주는 결혼식.
호화로운 장소와 생사를 오가며 함께 싸워 온 동료들 그리고 난적이었으니 이제는 친우가 된 황실 등.
레온과 루이나의 결혼은 모든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진행되었다.
특히나 루이나는, 매일 훈련하는 모습이나 창을 휘두르는 모습밖에 못 봐서 몰랐는데 웨딩드레스를 입으니까 숨겨 뒀던 미모가 폭발하듯 드러났다.
레온이 여자 하나는 잘 보는구나 싶을 정도.
“와.”
멍하니 루이나의 웨딩드레스를 보던 에레오나를 나도 모르게 쳐다봤는데, 그녀 역시 동시에 나와 눈을 맞췄다.
평소에는 뭘 꼬라보냐 욕하며 혀를 내미는 주제에 이럴 때에는 얼굴을 붉히면서 시선을 피하는 게 괜히 더 아려왔다.
조금 뜬금없게도, 태양신마저 두 사람을 축복하듯 따스한 빛을 쬐어 주었다.
모두 당황하긴 했지만, 레온은 꽤나 기쁜 듯했다.
죽어 나간 옛 동료들에겐 감사와 사죄를, 지금까지 함께해 준 동료들에게는 미래의 축복을 해 주며.
성황리의 결혼식은 마무리되는 줄 알았다.
-운디네에에! 등자아아앙!
우리의 산통 깨기 전문인 정령들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녀석들은 비를 떨어트리면서 그와 동시에 그걸 전부 증발시키는 묘한 기행을 보여 주면서 거대한 무지개를 만들어 냈다.
바람을 통해서 꽃잎의 폭풍을 만들거나, 흙을 이용한 조각상을 만드는 건 조금 참신하긴 했지만, 결국 처치 곤란일 뿐이었다.
“에휴.”
한숨을 내쉬며 마법으로 내 정령들이 만들어 낸 개판을 뒷정리해 주고, 우리는 신혼여행을 떠나는 두 사람을 배웅해 주었다.
듣기로는 멀리 떠나는 게 아니라 제국을 천천히 관광하다 올 거라고 한다.
혁명군의 입장으로 늘 도망만 다니던 신세에서, 이제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모든 걸 다시 보고 싶다고.
“진짜 예쁘게 살 것 같아.”
옆에 다가온 에레오나가 툭 하고 중얼거린다.
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아름답다.”
아름답게도 떠나가는 두 사람을 보면서 안도의 미소가 지어졌다.
두 사람의 결혼만큼은 축하해 줄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고.
다음 날.
제국 어디에서도 라엘 텔리즈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