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그래도 저는 톰 아저씨가 저렇게라도 일을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아직 대부분의 좌석이 다 차지 않아서 그런지 엘리나가 주변 사람들 눈치를 보지 않고 털털하게 말한다.
그것보다 아직 성인도 안 된 애한테 이런 말이나 듣고 있는 걸 보면 톰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 알 법도 했다.
“생각해 보세요. 살면서 도끼만 휘둘러 본 사람이 기껏해야 나무꾼이나 될 수 있지 뭘 할 수 있겠어요.”
“도축업?”
“안 돼요. 톰 아저씨만큼 겉보기랑 허례허식을 중요시하는 사람을 제가 본 적이 없어요. 본인 말로는 폼 안 나서 여자 못 사귄다고 안 할걸요. 멍청해서 그분들 덕분에 저희가 고기를 먹는 것도 모르고.”
“……톰을 굉장히 싫어하는 구나?”
“여자들한테 다 들이밀고 다니잖아요. 저런 사람 딱 질색이에요.”
‘이건…….’
아무래도 우레아 탓이 좀 큰 것 같았다.
원래 이렇게까지 타인에게 말을 거칠게 하는 아이가 아닌데, 어렸을 때부터 마나의 신이 구애를 해 대니 그런 타입이 싫어질 수밖에.
“에휴, 너한테 우레아를 소개해 주는 게 아니었는데.”
죄책감을 느끼면서 이마를 짚자, 엘리나는 피식 웃으면서 팔걸이에 손을 올리며 턱을 괴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우레아랑은 죽어도 계약 안 할 거고. 꽃도 왕실 마당에 심어 뒀거든요.”
“……우레아를 심어 놨다고?”
“예. 그래도 멀리서 보니까 꽤 예쁘던데요? 나중에 같이 보실래요?”
“궁금하긴 하네.”
물론 우레아의 본체가 아니기에 녀석에게는 큰 상관은 없을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엘리나에게 그런 굴욕을 겪은 후에도 엘리나와 계약을 하고 싶어 할지 궁금했다.
‘오히려 그런 변태들은 더 좋아할 수도 있겠네.’
나한테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이런 식으로 나오면 진짜로 엘리나가 꽃잎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찢어발길 수도 있었다.
뭐, 그래도 아예 남자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경박한 사람을 싫어한다는 인식이라서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사람마다 당연히 각자의 취향이 있고, 선호하는 성격과 싫어하는 성격이 나뉘어져 있지 않겠는가.
‘이런 부분은 또 다르네.’
옛날에 스승님은 경박한 사람들을 크게 싫어하지는 않았다. 같이 있으면 분위기가 밝아진다고.
물론, 우레아랑 계약을 했기에 그가 이런 식으로 달라붙으며 구애를 해 오지 않았기 때문도 있겠지만.
괜히 만족스러워서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예전에는 이 아이가 나의 스승님인 크리스티나 엘리나의 뒤를 그대로 따라가려고 하면 어쩌나 했지만.
이 아이는 착실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며, 분명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나 다름없는 마리아가 보고 있다면 분명, 따사로운 햇살과 같은 미소를 지어 주겠지.
“아, 시작해요.”
어느새 객석은 꽉 찼다.
중간중간 나를 알아보고 깜짝 놀라며 인사를 건네거나 사인을 부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기에 정중히 거절했다.
그렇게 최소한으로만 밝히던 무대의 조명이 전부 꺼지고, 어둠만이 가라앉았다.
퉁 하고 스포트라이트가 무대 위에 서 있는 분홍 머리의 여인에게로 쏘아진다.
이 세상에서 오롯이 그녀 홀로 빛나고 있다고 말하는 듯한 무대 연출. 쉽게 사용되면서도 간단한 연출이었지만, 그 주인공의 무게감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는데.
“와아.”
엘리나의 탄성과 카밀라의 벌어진 입을 보자니, 제니아는 충분히 성공한 듯했다.
그렇게 시작된 그녀의 가벼운 춤사위.
나풀거리며 그녀의 뒤를 쫓는 분홍천을 보고 있자니, 처음 그녀의 무대를 봤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게 첫 임무였지.’
팔독 기사단의 기사단장 폴트텍 레이먼을 암살하는 게 내가 혁명군에게 받은 첫 임무였다.
제니아의 광팬이던 그의 와인 잔에 내가 집대성한 몽약을 넣어서 그가 마약 중독으로 사망한 것으로 처리를 했었지.
당시의 그가 최후에 보았던 것보다 몇 배는 우아하고, 능숙한 무대가 지금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도 않았건만 벌써부터 일어나서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의 춤사위가 이어지는 와중.
“흐음.”
나는 천천히 턱을 쓰다듬거나,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잠시 후, 엘리나도 눈치챘는지 껌뻑껌뻑 눈을 뜨며 주변을 보더니, 홱 하고 나를 확인했다.
대견한 모습에 묘한 미소가 입가에 그려졌었는지, 엘리나는 조금 짜증난다는 듯 속삭였다.
“눈치채셨죠.”
“좀 됐어.”
“근데도 이렇게 가만히 계시는 거예요?”
기가 찬다는 제자에게, 스승으로서 여유롭게 한마디 해 준다.
“톰이 해야 할 일이잖아. 녀석이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아, 이렇게까지 미세한 마나를 느끼지는 못할걸요.”
그렇겠지.
설마 저 정도 마나만 사용해서 이용할 수 있는 폭탄이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설마 테러범이 있을 줄이야.”
단순히 놀러 왔던 엘리나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하고 싶니?”
“예? 당연히 저지해야죠. 잘못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죽어요.”
“그래, 그렇겠지.”
천천히 턱을 괴고 다리를 꼬며 엘리나에게 말했다.
“그럼, 우리 제자 실력 좀 볼까?”
“…….”
“위치는 마나를 쫓으면 간단하게 알 수 있을 테니까 나름대로 정보를 주자면, 마나는 단순히 기폭을 위한 발화용일 뿐이야. 결국 마나만 없앤다고 해 봤자 별다른 소용없다는 거야.”
“수동으로 점화하면 되니까요?”
“그렇지. 다만, 테러범이 자신의 몸을 터트려 가면서까지 신념을 따를 용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슬며시 눈동자를 굴려 엘리나를 흘겨본다.
“어떻게, 자신 없으면 도와줄까?”
도발하는 말투였으나 엘리나는 역으로 자신감 넘치는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연이나 재밌게 보세요, 금방 올게요.”
자신감 있게 말하는 그녀의 등을 보면서 나는 결국 웃음소리를 옅게 흘렸는데, 반대편에 앉은 카밀라가 이상하게 여기고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엘리나는 어디 가는 거예요?”
그녀에게 나는 손을 저으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답했다.
“잠깐 누구 좀 만나러 간 거예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 제자님이 어떻게 이 사건을 해결할지 기대하며, 나는 이제 시작한 제니아의 감미로운 노래에 몸을 맡겼다.
* * *
“톰 아저씨! 따라오세요!”
“흐아, 어엄?”
공연이 시작되고, 단순히 서 있으면 되는 업무인지라 지루함에 보기 흉할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리며 하품하는 톰을 부르며 빠른 걸음으로 걷는 엘리나.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은색 바탕에 매끄러운 황금의 무늬, 소녀의 눈동자와 똑 닮은 보석이 박혀 있는 지팡이, 제국의 태양을 본 톰은 당황했다.
“야, 야! 여기서 지팡이 같은 거 꺼내면 안 돼!”
이 철없는 아저씨가.
엘리나는 자신의 뒤를 따라온 톰을 보면서 지팡이로 바닥을 한번 쿵 내리찍었다.
“지금, 테러범이 숨어 있는데, 하품이나 하면서, 놀 시간이에요?”
처음에는 당연히 믿지 않았다. 예전에 혁명군에서 생활할 때, 미오나 에딘이 이런 식으로 장난을 친 적이 몇 번인가 있었기에.
그는 이미 양치기에게 두 번이나 속은 마을 주민이었지만.
동화에서도 그렇듯 세 번째는 진짜로 늑대가 찾아와서 양을 물어뜯지 않았던가.
잔잔하지만 분명하게 끌어올리고 있는 엘리나의 마나를 느낀 톰은, 이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어디야?”
이제야 엘리나는 후 하고 숨을 내쉬며 몸을 틀어서 다시 빠른 발걸음으로 테러범에게로 향했다.
“여기 지하도 있어요? 땅 밑에서 느껴지는데.”
“물탱크실이 지하에 있어.”
“그럼 그쪽이네요.”
허리춤에 끼워 둔 토마호크를 다시금 확인하면서도, 금발 소녀의 뒷모습에 뭔가 의아함을 느낀 톰은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라엘은? 네가 알아챌 정도면 라엘이 모를 리가 없잖아.”
“스승님은 공연 관람 중이시죠. 저한테 해결하라고 하셨어요.”
“으음?”
그 말에 톰은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폭탄 테러범 잡는 일을 엘리나에게 맡긴다? 라엘의 성격이면 절대로 그럴 리 없는데.
‘얘가 대마도사가 되더니 배가 불렀나?’
아니면 무언가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가 싶었으나, 엘리나는 자신의 스승에게 혁혁한 성과를 보이고 싶다는 생각에 계속해서 걸음을 재촉했다.
물탱크실의 바로 앞.
엘리나는 문에 천천히 지팡이 끝을 대며 눈을 감았다.
“총 3명. 폭탄은 두 개예요.”
“그럼 하나씩 맡으면 되겠네.”
씨익 웃으며 톰이 토마호크를 꺼내 든다.
“왼쪽에 하나, 오른쪽에 하나 있거든요? 제가 일단 마나를 통제하면 당장 폭탄을 터트릴 수는 없을 거예요..”
오면서 라엘이 설명해 준 폭탄의 구조에 대해서 대충 들었던 톰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를 기폭제로 사용하는 폭탄.
마나가 사라졌으니 수동으로 터트릴 수밖에 없을 텐데, 그것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덜컹하고 문이 열린다.
물탱크 안에서 대기하던 세 사람은 깜짝 놀라며 폭탄의 기폭장치를 눌러 보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콱!
콰득!
폭탄을 들고 있던 두 사람의 가슴팍에 토마호크가 날아든다.
동시에 던졌으나 정확히 적중시킨 실력. 쓰러지는 두 사람이 쥐고 있는 폭탄을 엘리나가 마나로 수거한다.
수동으로 폭탄을 터트리기 위한 찰나의 순간.
그 정도만 있어도, 두 사람이 테러범을 제압하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자그마치 마교와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이다.
평화에 찌들어 있다가 이제야 스스로의 신념으로 전장에 나온 햇병아리들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였다.
“자아, 어서 나오세요. 이제야 좀 평화로워진 제국에서 무슨 테러예요.”
엘리나가 혀를 차면서 말했으나 아직 제압이 되지 않은 중앙의 한 남자가 가슴팍을 풀어헤쳤다.
그러자 그의 전신에 둘러진 수많은 폭탄들.
마나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오롯이 과학으로 이루어진 정수를 보며 엘리나는 아차 싶었다.
너무 마나에만 의존하다 보면 어느 날 자신의 발을 밟게 되는 날이 온다는 스승님의 조언이 떠올랐다.
이미 폭탄 두 개를 정리했기에 다른 폭탄은 더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녀석들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마나 폭탄은 페이크 용으로 사용하려던 것이었다.
“더러운 퍼지들을 저주한다!”
퍼지들의 독립을 철회하라고 열렬히 주장하는 과격분자. 톰이 달려들어서 어떻게든 막아 보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남자는 기폭장치를 꾹 눌렀고.
“…….”
폭탄들이 픽픽 소리를 내면서 붉은색 방울을 하나 만들어 냈다.
그 방울들은 둥실둥실 뜨며 천천히 톰과 엘리나를 지나쳤고, 복도 끝에 서 있는 남자의 손가락 위에서 잔망스레 떠 있었다.
“폭발을 비눗방울로 만들어 봤는데, 어때?”
피식 웃으며 손으로 방울을 터트린 라엘 텔리즈먼이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