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시간은 여전히 계속 흘러갔다.
마교를 무너트리고 세상을 구한다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제국이 마교의 손아귀에서 놀아났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녀석들이 전부는 아니었다.
놈들이 사라져도 여전히 신도들은 남아 있었으나, 그들은 다른 마교들처럼 과격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왕실의 앞에서 시위를 하기는 했지만, 비폭력 시위라면 어느 정도는 용인해 주겠다며 제라니 황제는 상당히 넓은 아량을 보여 주었다.
덕분에 제라니 황제를 향한 사람들의 위상은 더욱 치솟아 올랐다. 시민들을 위할 줄 아는 황제라고.
다만, 그 반대 선상에 서 있는 시위대는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바로 처형을 하거나 무력으로 진압을 해도 문제가 없을 사안에 황제가 자비를 보였다.
시민들은 너희도 어느 정도 하고 물러나라는 듯 눈치를 주었고, 드디어 오늘.
시위대는 해산이 되었다.
“와, 징하다. 이제야 끝났네.”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먹어치우면서, 창문 밖으로 시위대가 쳐 뒀던 텐트나 현수막 등을 치우는 걸 보며 고개를 저었다.
내 뒤에서 홍차를 내주는 전속 하녀 실비아.
괜히 왕실에서도 대마도사의 전속 하녀가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리듯 그녀가 홍차를 끓이고, 따라주는 모습이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찻잎의 수준에 맞는 뛰어난 솜씨.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계속 마시고 싶겠는데요.”
그녀의 홍차를 홀짝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실비아는 작게 웃으면서 뭐가 문제냐 답했다.
“계속 드시면 되죠. 대마도사님이 저 자르지만 않으시면 저는 계속 대마도사님 전속 하녀로 일할 건데요?”
너무나 당연하게도 내 옆자리를 평생직장으로 잡아 버린 그녀를 보며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
다시금 찻잔을 입에 대며, 따스한 홍차를 입안에서 음미한다. 그러면서도 눈은 자연스럽게 창밖으로 다시 움직였다.
“많이 신경 쓰이세요?”
“뭐, 그럴 수밖에 없죠. 권능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도 없고, 마교단장들이나 대주교들이 했던 것처럼 제국과 싸울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오합지졸.
지금의 그들에게는 앞에 나서서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 줄 사람 하나 없었다.
“저들은 지금 당장에는 자신들이 패배했다고 생각하겠죠.”
마교는 대륙에서 아예 뿌리를 뽑아냈다.
다시는 그 싹이 자라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뿌리를 뽑으며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이지만, 그래도 마교의 흔적이기는 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기를 바랍니다. 실은, 이 뒷걸음질은 패배가 아닌 자유를 향한 첫걸음이었다고.”
“후후.”
과하게 감정적으로 되었나 싶어서 어색하게 찻잔을 테이블 위에 놓으니 실비아가 작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대마도사님은 참 친절하신 것 같아요.”
“……제가요?”
어디 가서 그런 말 별로 들어 본 적은 없는데.
“예, 친절하시죠.”
묘한 미소를 띠며 천천히 내가 입을 황금색 자수가 수 놓인 하얀 로브를 준비하기 시작한 실비아.
벌써 가야 할 시간이 되었구나 싶어서 나도 남은 홍차를 입에 그대로 털어 넣었다. 홍차의 질을 생각하면 참으로 사치스러운 행동이었다.
“주시면 제가 입겠습니다.”
“아이참, 저번에 그러셨다가 주름 다 지셔서 다시 제가 해 드렸잖아요.”
“이번에는 잘할 수 있어요.”
마법을 쓸 거니까.
하지만 실비아는 떽 소리를 내면서 얼른 오라고 손짓했다.
“가벼운 일로 마법을 쓰지 말라고 그렇게 가르치시면서, 본인은 옷 입는 것 정도로 마법을 쓰시려고요?”
“…….”
“어서 오세요. 원래 이런 것도 당연히 하녀가 하는 일이라니까요.”
“그래도 뭔가 애가 된 것 같아서 싫지 않습니까.”
“그래요? 제 선배님은 전 대마도사님한테 이런 것도 다 해 주셨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하셨다던데.”
“그분은 나이가 들어서 도와드리는 거고요.”
물론, 알로이스 뫼르엔 델폰이 누군가가 수발을 들어 줘야 할 정도로 연로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팔미산에서 용들의 마법을 배우면서 오히려 더 회춘하고 있는 것 같다고 전해 들었다.
결국 실비아가 깔끔하게 걸쳐 준 로브를 두른 채로 우리는 방을 나섰다.
마나 수용소에서 살아가던 이들의 사회 적응 및 마나 조정에 대한 모임이 오늘로 끝이 난다.
매주 2번씩 진행되던 것이 끝난다는 생각에 솔직히 시원섭섭했다. 나름대로 수용소 사람들과 많이 친해졌으니까.
“그래도 대마도사님이 잘 가르쳐 주셔서 다들 마나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진 것 같아요.”
“뭐든 자신이 다룰 수 없는 건 두려운 법이죠.”
불만 봐도 그렇다.
우리 실생활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불이지만, 잘못 다루면 끔찍한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게 불이다.
마나 역시 그들에게 있어서는 마찬가지였다.
마나에 적성은 높았지만, 다룰 수 없으니 그것을 어떻게 조절할지 모른다.
나는 그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줬을 뿐이다.
천천히 강당 안으로 들어가자 무수한 시선들이 내게로 쏠린다. 마찬가지로 동시에 쏟아지는 박수 소리.
수용소에 갇혀 있으며, 뼈만 보일 정도로 앙상하고, 눈에 생기가 없이 대주교들의 노예로 팔려 가거나 수용소의 가혹함을 이기지 못하고 죽는 미래뿐이던 사람들.
그들은 내게 종종 와서 그런 말을 한다.
설마 이런 미래가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환영해 주는 사람들에게 낮게 손을 흔들어 주며 나는 강단으로 올라섰다.
따로 준비한 대본은 없었다.
어차피 이미 친할 대로 친해진 사람들이라서 내가 무슨 말을 하든, 혹은 말실수를 해도 웃으면서 받아 줄 거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대마도사 라엘 텔리즈먼입니다.”
간단한 인사에도 여기저기서 피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큼 거리감이 가깝다는 것을 의미했다.
“오랜 시간, 참으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나름 길다면 긴 이 모임의 마지막 날이 결국에는 찾아왔군요.”
나이가 조금 있는 분들은 벌써부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조금 걱정스러웠습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수많은 상처들을, 제가 잘 보듬어 드릴 수 있을지. 마나에 재능이 있다는 것만으로 불합리한 차별을 당해 오신 여러분에게 마나를 다루는 법을 알려드리는 게 맞는지.”
실제로 처음에는 내게 이러한 가르침을 받기를 거절하며, 오히려 이를 드러내고 또 다른 수용소로 가는 게 아니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던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모두가, 잘 따라와 주었다.
이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수준에 차이는 분명 명확했으나, 그래도 폭주하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여러분은 제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아주 잘 따라와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마나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어린아이부터 시작해서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까지.
흐르는 눈물을 숨기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럴 여력도 없는지 그냥 주룩주룩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구석에서 그런 사람들을 마도 카메라를 이용해서 찍고 있는 푸른 머리의 소녀.
라디오 타워에서 실습을 진행 중인 리스테린 레토리.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와 똑 닮은 자세로 사진을 찍거나, 노트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여러분의 앞에는 이제 수많은 길이 놓여 있습니다. 사회가 많이 두렵겠지만, 괜찮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수용소에서 핍박을 당해 왔던 이들이라면, 처음에는 조금 고생할 수 있겠지만 분명 해낼 것이다.
“마나를 더욱 연구하여 이제 마법의 영역에 들어서고, 마법사가 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아예 마나를 억제한 채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겠지요.”
나는 그들을 쭉 둘러보며 작게 웃어 주었다.
“앞으로 무슨 선택을 하시든, 저는 여러분을 응원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자 정수리에 울려오는 박수와 함성 소리.
“라엘! 라엘! 라엘!”
“대마도사님! 멋져요!”
“사랑해요오오!”
과분한 환호를 해 주는 이들에게 다시금 감사를 표한 후,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수많은 음식들.
오늘이 마지막이었기에 파티 분위기를 내고자 내가 부탁을 했던 건데, 생각보다 양과 음식의 종류가 많았다.
카트에 음식을 싣고 들어오는 하녀들의 가장 끝에서 아리따운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들어오는 제니 데 아르니티.
“공주님?”
갑작스레 그녀가 등장한 걸 보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 제니는 싱긋 웃으며 내게 인사했다.
“라엘 님, 오늘이 수료생들 마지막 행사라고 들어서 제가 조금은 축하해드리려고 왔는데……. 혹시 불편하셨을까요?”
“아뇨,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 톤이 올라가 버렸는데, 뒤에서 실비아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실은, 불편하다.
진짜 엄청 불편하다.
‘제라니 이놈 때문에…….’
황제를 이런 식으로 부른다는 걸 알려진다면 바로 극형에 처해져도 할 말이 없었지만, 뭐 어떤가.
아무도 못 듣는데.
어쨌든 제니 데 아르니티가 불편해진 건, 예전 대마도사 취임식에서부터였다.
그때도 제니가 은근히 내게 호감을 표시하며 춤을 신청하기도 했었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제라니가 묘하게 눈치를 주는 거 아닌가.
‘제니가 참 괜찮은 아이인데 말이야.’
‘너도 이제 슬슬 혼인을 생각해야 할 나이가 아닌가?’
‘이거 봐. 제니의 사진인데 참 예쁘게 나왔지? 내 동생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팔불출 황제 같으니라고.
덕분에 제니 공주를 대하는 게 조금 불편해져서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이렇게 직접 찾아오다니.
수료생들은 음식들의 퀄리티를 보고 놀라다가도, 마지막에 들어온 제니를 보고 바로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제니는 오늘은 우리를 축하하기 위해서 온 것이니 불편해하지 말고 편하게 있으라 말해 주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그녀의 고운 심성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파티가 시작되고.
나는 당연하게도 제니 공주의 옆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최근 저희 오라버니가 많이 불편하게 하신다고 들었어요.”
“예? 아뇨!”
이렇게까지 공격적으로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는데. 당혹스러운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자 제니는 작게 웃으며 물었다.
“이제 충분히 대마도사에 적응하신 것 같은데 어떠실까요?”
“…….”
제니가 내게 구애를 했을 당시, 마음에 둔 정인은 없으나 아직은 대마도사에 집중을 하고 싶다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유로운 척하고는 있지만, 실은 조마조마해서 제대로 나이프 질도 못 하고 있는 게 살짝 보였지만.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적응은 충분히 되었으나…….”
말을 끌면서, 그녀에게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정중한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그러자 제니는 나이프를 뚝 놓더니 나를 바라봤다.
“혹여라도, 제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아뇨, 절대로 그런 건 아닙니다. 제니 공주님은 제가 봐 왔던 여성분들 중에서도 단연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리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혹시, 마음에 둔 정인이 생기셨나요?”
제니의 물음에, 나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무언가를 말하려 했으나. 나도 모르게 다시 말을 주워 담았음을 깨달았고.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나는 제니에게 답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