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기사들이 전진하고, 용의 마법이 쏘아지며, 정령들의 힘이 옥죄여온다.
그럼에도 신들은 파이엔의 얼굴을 세 개로 나누어 힘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왼쪽은 숙명의 여신 레이기스가 모든 것을 녹이는 산성을 흩뿌리고 있었고.
오른쪽은 운명의 신 라이노가 소리를 질러 대면 대지와 사람이 터져 나갔다.
다만, 종말의 신 코인만큼은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다른 두 신들이 위험해지든 말든,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에게 시선을 줄 틈이 없었다.
지모신이 계속해서 내 앞에서 뚫어져라 나를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뭐? 당신도 기분 나빠져서 저쪽 편에 설 거야?”
너무 신경을 건드렸나 싶었지만 왜인지 지모신이 고개를 젓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외형은 단순히 하얀 꽃 한 송이일 뿐인데.
[참으로 신비하다 생각했다.]
“신비하다고?”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했다.
저번에 에레오나를 살릴 때도 그렇고 나한테 좋은 감정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인자한 목소리가 나를 감싸 왔다.
[처음 그대를 봤을 때,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 경지까지 성장할 수 있는 걸까. 궁금했었지.]
“…….”
[과거는 현재를 관통하여 미래로 향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똑같이 반복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었었고. 나는 그대를 계속 눈에 담았다.]
예전 같았으면 무슨 소리인지 모를 말이었다.
신이라는 작자들은 꼭 지들만 아는 걸 남들도 아는 줄 알고 마구잡이로 떠들어 댄다고 푸념을 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펠리아의 눈을 통해서 과거를 보았던 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마지막 묘수가 떠오른 기분이 들었다.
“그래, 당신은 과거이지만 미래의 나를 보았구나.”
[현명한 인간이여, 이 세상이 눈을 뜸과 동시에 함께 살아온 나 지모신이 그대에게 감사를 표하마.]
“…….”
[고작 100년을 살아가는 인간이여, 그대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그래.”
내게는 이제 시작이지만, 그녀는 이미 종착점에 가 있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교차되고 있음을 나는 직감했다.
[라엘 텔리즈먼, 절대로 그 이름을 잊지 않으리라.]
“너무 띄우지 마. 나는 이제 시작이거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지금까지 했던 일도 많은 것 같았지만, 여전히 내게는 무수히 많은 사명이 어깨에 짊어져 있었다.
그러자 내가 조금은 안쓰러워 보였던 걸까.
지모신의 목소리가 포근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는 기분이 들었다.
[그대는, 성공한다.]
간단명료한 말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미 모든 결말을 다 알게 된 그녀였기에, 내게 이런 말을 해 주는 것이라는 걸 안다.
조금은 지친다는 생각이 들었던 내 몸에 활력이 다시 솟아나는 것 같았다.
바닥이 보이던 마나가 차오름을 느꼈다.
“고마워, 그 말은 내게 큰 도움이 될 거야.”
이미 성공했음을 알고 있다면, 무언가를 시작하는 데 두려움은 없다. 아마 많이 힘들고 흔들리겠지만 지모신의 이 말을 떠올리며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럼 우선 저놈들부터 쓰러트려야겠지.”
[인간의 가호가, 그대와 함께하길.]
보통은 신의 가호라고 하는데 그녀가 나름대로 우리를 인정해 준 걸까.
꽃은 잎이 되어 흐트러지며 바람에 날려 사라졌고, 공간을 옅게 눌러오던 압력이 줄어든다.
지팡이를 짚으며 앞으로 걸어가자, 우레아의 힘을 받은 엘리나가 내게 다가왔다.
“스승님, 마나를 좀 드릴까요?”
[지모신이랑 그렇게 친하게 대화를 나누다니…….]
엘리나의 제안에는 고개를 저으며 녀석의 머리만 쓰다듬어 주고, 엘리나의 로브 주머니에서 빼꼼 고개만 내밀고 있는 푸른 꽃을 째려봤다.
“너 그동안 어디 있던 거냐?”
우레아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면서 오랜만에 만나서 어색한 친구처럼 답했다.
[아니, 신들이 정령계 침공한다는 걸 나는 알고 있으니까. 괜히 너나 엘리나랑 같이 있으면 배신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잖아.]
하여튼, 난봉꾼에 망나니처럼 보여도 늘 다른 사람들 눈치를 봐 대는 녀석이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이길 것 같으니까 온 거냐?”
[사실 그런 건 아니야. 네가 뭘 모르나 본데 저 세 명의 신은 지모신과 가장 오랜 시간 함께했던 신이야. 예전에는 악신이 아니었지만, 악신으로 전향한 괴물 중의 괴물을 너희가 이길 거란 생각은 안 들어.]
참 좋은 거 말해 준다.
“그런데 왜 도와주냐?”
어차피 악신들뿐만 아니라 다른 신들 역시 지금처럼 인간계에 강한 영향력을 끼치지는 못하게 될 것이다.
종교라는 것은 필요하긴 하지만, 지금처럼 그것에 과하게 몰려서 ‘퍼지’라는 말도 안 되는 신분제도까지 만들어 버렸으니까.
종교의 힘이 확실하게 줄어들 필요가 있었다.
[그냥, 엘리나가 또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
생각해 보니 그렇다.
나의 스승님인 크리스티나 엘리나의 죽음을, 나뿐만 아니라 녀석도 함께했었다.
“나 안 죽어.”
녀석도 나름 정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엘리나는 가소롭다는 듯 손으로 우레아를 주머니에 푹 찔러 넣었다.
“스승님이랑 가서 저 키메라 머리 죽이고, 같이 오순도순 잘살 거야.”
당당한 엘리나의 모습이 기특해서, 나는 다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정령들이 다가왔다.
-라엘! 저거 완전 괴물인데?
-솔직히 저 정도 힘을 가진 신이 지모신 말고 또 있을 줄은 몰랐구나.
-꽤나 위기이다.
-이 정도 인원들이 있는데도…….
이제는 소년 소녀의 크기로 인간계에서 행동하는 정령들을 보고 있자니 보육원 원장이 된 기분.
빛과 어둠의 정령왕도 오고 싶어 하는 듯 보였지만, 두 사람은 운명의 신 라이노의 공격을 애써 틀어막고 있었다.
퓰리처럼 넓게 피해가 퍼질 수 있는데 그걸 막고 있는 게 두 사람인 듯했다.
“지모신도 위험할 것 같아서 막으러 왔다잖아.”
-진짜? 어디 있는데? 아줌마가 도와주면 파바박! 쓰러트릴 수 있지!
운디네가 환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모습이 우스웠다.
“거절했어, 꺼지라고 해 줬지.”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 운디네는 입을 쩍 벌리지만, 웃을 때면 늘 기품을 지키기 위해 입가를 가리던 라푼젤이 그것도 잊고 깔깔거린다.
-그래! 좋아! 라엘, 나는 너의 그런 점이 너무 마음에 들어. 너무 사랑스러워. 설마 내가 담을 수 없는 계약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인간이 있을 줄이야.
라푼젤이 너무 좋다면서 내 허리를 꼭 끌어안아 준다.
-거절당했을 지모신의 얼굴을 한번 봤어야 했는데.
그러자 옆에 있던 테토도 헛웃음을 쳤고.
-그래, 우리가 다 해 놓은 거에서 막타만 치겠다고 오는 건 아니지!
플레임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서 불꽃을 뿜어 댔다.
운디네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더니 주먹을 쥐고는 하늘에 붕붕 휘둘러 댔다.
-에이, 몰라! 그래. 우리가 그동안 해 온 게 있는데 여기서 지모신한테 마지막을 뺏길 수는 없지!
정령들이 다시금 의기투합하여 힘을 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얘들아, 우리 다 끝나면 뭐할까.”
-응? 지금 그걸 물어보는 거야?
운디네가 뜬금없다 말했지만, 라푼젤은 냉큼 답했다.
-인간 장인이 만든 명품들을 사는 게 어떻겠니? 가방, 신발, 시계, 지갑 등. 그런 걸 사서 라엘을 쫙 꾸며 주고 싶구나.
그냥 명품을 사고 싶은 것 같은데?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라엘 텔리즈먼의 이야기가 끝나고, 평안한 삶 속에서 살아가는 그대의 모습도. 내게는 충분히 재밌는 이야기이다.
테토는 여전히 독서를 하는 것처럼 나의 삶에 이입하고 있었고.
-수많은 인간들을 봤어. 네가 말했듯, 인간이란 같은 종이면서 참으로 다르더군. 그렇기에 더욱더 많은 인간을 보고 싶어. 인간과 계속 함께하고 싶어.
자존심이 강하던 플레임은 솔직하게 답해 주었다.
마지막 운디네는 우물쭈물하더니 슬며시 내 손을 잡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냥, 그냥 너랑 같이 있고 싶어.
“…….”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지만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도, 너희랑 같이 있는 게 좋아.”
-……!
-어머어머!
-마음에 드는 대사군.
-안 하던 애가 그러니까 낯간지럽다!
정령들이 바로 발작을 하듯 답해 오는 걸 못 들은 척 그냥 지나쳐 버렸다.
이제는 신들과 가까이 다가갔을 때쯤, 은발의 여인과 금발의 남자가 가파른 호흡을 정리하며 내게 다가왔다.
두 사람 다 최전선에서 사람들을 이끌며 신과 계속해서 싸우던 걸 나도 보고 있었다.
“이제야 온 거야?”
“주인공 행세를 해 대긴.”
에레오나와 레온이 투덜거리면서도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살짝 걸려있었다.
“마나가 고갈됐었어, 이제는 괜찮아.”
“그래, 원래 마법사가 마법 쓸 수 있게 시간을 버는 게 보통이지.”
마음에는 안 든다고 하면서도 에레오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 괴물을 이길 수는 있는 거야? 잠깐 싸워 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혼자서 세상을 멸망시킬 것 같은 힘이던데.”
다 와서 저런 적에게 막혔다는 것이 분한지 레온은 더욱 검을 강하게 쥐었고, 은은한 빛이 검에서 살짝 흘러나왔다.
“이겨, 이쪽도 세상 정도는 혼자서 멸망시킬 수 있으니까.”
나름 농담으로 얘기한 건데 에레오나랑 레온은 살짝 놀란 눈을 뜨더니 히죽인다.
“그러시겠지, 우리 대마도사님이신데.”
“나중에 흑화해서 다 죽이고 다니는 건 아니지?”
하여튼 이것들은 조금만 틈이 있으면 바로 딴지를 걸고 들어온다. 이럴 때는 그냥 믿는다 같은 말 정도 해 주면 깔끔한데.
[종말이 다가왔노라!]
지금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종말의 신, 엔드가 입을 쩌억 벌린다.
하늘이 어두워진다.
마치, 하늘에 뚜껑을 덮은 것만 같았지만 다들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었다.
“운석인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는 에레오나.
넓디넓은 하늘 전체를 가릴 정도로 거대한 운석이 떨어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세상의 종말을 목도하는 것만 같은 광경.
“할아버지가 한 방이 있으시네.”
레온은 허탈하게 검을 땅에 꽂아 넣는다.
이런 건 아무리 애를 써도 도망칠 곳이나 살아남을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없었으면.
“후우.”
마나가 요동친다.
이 대륙에 있는 모든 마나가, 마치 세상의 종말을 막기 위해서 내게로 찾아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점차 다가오는 종말을 올려다보며 나는 모든 마나를 쏟아부었고.
아르니티 제국의 33대 황제, 제라니 데 아르니티가 퍼지들의 자유를 선포하기 전에 한발 먼저.
인류는 오랜 시간 속박해 오던 신들에게서 자유를 거머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