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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한 마도사는 반역자가 되어 있었다-183화 (183/200)

183화

숙명, 운명, 종말.

악신이라 부르기엔 모호한 수식언들을 짊어지고 있는 신들이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천마주교 파이엔의 몸을 빌려 세상에 나타났다.

‘압박감이 장난 아니네.’

단순히 강림한 것만으로도 전신이 짓눌리는 압력 속에서 나는 급하게 마나를 운용하여 내게 달려든 듄을 막아 냈다.

[고작 인간 하나가 저분들까지 불러낼 줄이야.]

파괴의 신 가이스에게 완전히 먹혀들어 간 듄의 모습. 놈의 뒤에 떠 있는 가이스의 얼굴 실루엣이 그 증거였다.

전신 갑주가 더욱 거세게 불타오른다.

듄의 신체까지 썩어 문드러져 버리기 시작한다. 신의 무기를 육체가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가이스는 일절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래도 200년을 네 꼬봉으로 살아가던 애인데 너무 신경 안 쓰는 거 아니냐?”

허탈감에 묻자, 녀석은 오히려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되물었다.

[어차피 사라질 소모품에 무엇을 바라는가.]

“그래, 그렇겠지.”

너희가 그따위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 사달이 난 거라는 걸,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모르겠지.

영생을 살아가며 아직까지 모르고 있으니까.

듄을 불쌍히 여기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 신의 태도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기에 나는 그대로 마법을 쏘아 댔다.

전신 갑주를 입었음에도 나의 마법을 버티지 못하는 듄의 신체가 하나둘 날아가기 시작한다.

팔이 잘려나가고, 다리가 녹아내린다.

얼핏 봤을 때는 허수아비 같은 모습이 되어 버린 듄이었으나, 녀석은 하늘을 붕 떠서 내게로 몸을 가져다 박았다.

쾅!

“진짜 무식하게도 싸우네.”

[파괴라는 행위 자체가 아름답건만, 무엇을 더 필요시한다는 말인가.]

누가 파괴의 신 아니랄까 봐 아주 막돼먹게도 싸운다.

듄의 신체를 조종해서 싸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무슨 아이가 심심해서 자기 인형을 여기저기 던지면서 노는 것처럼 듄의 신체를 도구처럼 가져다 박아 댄다.

이미 만신창이인 듄의 모습을 보며 나는 혀를 차고 불꽃을 손에서 뿜어냈고.

가이스의 전신 갑주만을 남긴 채로, 듄의 신체가 완전히 녹아 사라졌다.

“무식하게 싸우니까 금방 망가지는 거 아니야.”

가이스의 신형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의 전신 갑주가 사라진 자신의 육체를 찾는 것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더니 결국 사람처럼 자세를 잡았다.

“얼씨구?”

하긴, 저 녀석 입장에서는 듄이든, 갑주로 만든 인간이든 크게 상관은 없겠지. 오히려 조금 더 가벼워졌을 수도 있다.

“그렇게 오래는 못 있을 텐데?”

듄이 죽은지라 그의 목숨을 이용해서 활동을 하던 가이스에게 이죽거리며 묻는다.

인간계에서 신이 자신의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영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방금 자신을 가장 오랜 기간 섬겨 온 신자를 죽였다.

거기에 200년 전부터 자신을 섬기던 사람들의 영혼이 모여 있던 구체는 내가 부숴 버렸다.

사실 현대까지 알려지지 않은 신, 가이스는 이제 그 힘을 발휘할 여력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네놈 정도는!]

그래도 늘 이렇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결국 패배하는 게 자명한 사실임에도, 신이라는 작자들은 저런 상대를 얕잡아보는 말을 하면서 자존심 때문에 도망치지 않는다.

누군가 봤을 때는 신념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내가 봤을 때는 그냥 머저리야.”

콰드드득!

마나가 녀석의 전신 갑주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단순히 움직임을 제한하는 줄 알았던 것 같지만 점차 찌그러지기 시작한다.

[……!]

가이스가 놀라서 어떻게든 발악을 해 보지만, 점점 힘이 사라지고 있는 신 정도는 이제 내 적수가 아니었다.

“고물상에라도 가서 팔면 조금은 돈이 되겠지. 가서 신기였다고 말해 주면 조금 더 쳐주려나?”

[라엘 텔리즈머어어언!]

“내 이름 알고 있었구나?”

비웃음을 내걸며 점점 떠나가는 가이스를 향해 작별인사를 해 주었다.

“자, 애피타이저는 끝난 것 같은데?”

파괴의 신이나 되는 고위 신이긴 하지만, 어차피 다 죽어 가던 신의 발악이었을 뿐이다.

잠잠히 나와 가이스의 전투를 보고 있던 파이엔의 몸에 담긴 상위 3신.

[가이스가 약해졌다고는 해도 놀랍구나]

[하하하! 인간치고는 훌륭하군!]

[…….]

입은 하나인데 목소리가 세 개가 울려오는 건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 혀가 세 갈래로 찢어지는 기분이지 않을까?

‘뭐, 지금 상태를 봐서는 그 정도는 괴로운 것 축에도 안 낄 것 같지만.’

몸에서 무슨 기포가 올라오는 것처럼 부글거리고 있는 천마주교 파이엔. 듄과 마찬가지로 녀석도 악신들에게 몸을 빼앗겨 의식을 잃은 채로 휘둘리고 있었다.

‘그렇게나 대단하다면서 세상을 호령해 온 두 남자의 말로가 고작 이 정도인가.’

[아이야.]

종말의 신 엔드의 노인 목소리가 잔잔히 울려왔다. 그가 말을 시작하자, 다른 두 신들도 함부로 끼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임에도 가지면 안 되는 힘을 가지고 있구나]

“내 생각은 반대야.”

[흐음?]

지팡이로 땅을 톡톡 두드리며 근처의 마나를 운용하여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한다.

파이엔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릴 뿐, 신들은 큰 반응이 없었다.

“너희가, 그릇에 맞지도 않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세상이 이 꼴이 나 버린 것 같아.”

[큭큭큭]

[아주 미쳤구나.]

[흥미로운 견해이다.]

다른 두 신은 내게 비웃음과 분노가 섞인 반응을 보였지만 엔드는 조금 달랐다.

그는 어디 한 번 더 말해 보라는 듯 내 다음 말을 기다렸고. 마법을 준비하면서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냥 너희 사는 곳에서 살아가면 그만인 걸 굳이 우리 세계까지 넘어와서 야욕을 펼치는 건 또 뭐야? 그냥 서로 보지 말고 살아가면 좋잖아?”

[무지한 인간들에게 우리의 자비를 내려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 아닌고?]

“권능을 내려 준 걸 감사하라는 거야? 그래, 그것 덕분에 덕을 본 사람들도 있겠지. 그런데 그게 진짜 목적은 아니잖아.”

땅바닥을 두드리는 지팡이가 나도 모르게 거세진다. 그럴수록 마나는 바닥에서 파동을 일으키며 더욱 거세게 퍼져 나간다.

“자비를 내려 줬다고? 아무런 의도도 없는 순박한 척하지 마. 결국에는 너희가 인간계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함이었잖아.”

[들켰네.]

키득거리는 숙명의 여신 레이기스.

“어디서 함부로 우리를 위한 척을 하고 있어, 이 더럽고 추잡한 새끼들아.”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 위해서 독이 든 음식을 보내는 것과 하등 다를 것 없었다. 당장에는 배가 부를 수 있지만, 결국엔 죽어 가며 나라가 함락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래, 좋다.]

종말의 신 엔드는 무언가 느낀 듯 잔잔히 답하며 내게 말했다.

[그럼, 한번 해 보거라.]

“후회할 거야.”

내가 지금까지 마법을 준비하는 걸 알았으면서도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던 교만한 콧대를 확실하게 꺾어 주마.

땅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수많은 마법진들.

대지뿐만이 아닌, 하늘에도 펼쳐지는 복잡한 수식이 담긴 마법진이 빼곡하게 그려진다.

[이건…….]

[대단하긴 대단하군.]

[…….]

숙명의 여신 레이기스와 운명의 신 라이노조차 놀랄 정도의 마법 연산.

[우레아가 본다면 기뻐하겠군.]

“그놈은 이미 재낀 지 오래야.”

마나의 신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의 내게는 이기지 못한다. 녀석이 마나 그 자체라고 해도 나는 그런 마나를 다루는 강제력이 이미 신을 능가하고 있었으니까.

“어디 한번 버텨 봐.”

각기 다른 마법들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작은 마법들부터 시작해서 대군 마법까지. 전장의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 집중하게 만들 정도의 화력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천지를 다시 만드는 것만 같은 굉음이군.]

말 그대로 세상이 무너지고, 다시 창조되는 것만 같은 광경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종말의 신의 목소리.

한참을 이어진 마법이 끝나고, 아무리 나라도 마나가 부족했기에 휘청일 수밖에 없는 상태였으나.

[지, 진짜로 죽는 줄 알았구나.]

[감히 진심을 발휘하게 만들어?]

[생각 이상으로 훌륭하군.]

‘젠장, 숙명과 운명은 죽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숙명의 여신과 운명의 신은 확실히 힘이 부치는 목소리였다. 만약 종말의 신이 없는 둘뿐이었다면 아마 방금 전 포격으로 쓰러트릴 수 있었을 것이다.

‘종말의 신이 문제다.’

이미 차원이 다른 두 신과 비교하더라도 한 단계는 더 높은 신.

그는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훌륭하긴 했다. 많은 신이 그대의 존재를 의심한 이유를 확실히 알 것 같군.]

“허억……. 허억.”

숨이 가팔라졌다.

지금 당장에 녀석들이 공격을 해 온다면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 순간, 대지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저 신들이 무언가 수작을 부리기 시작했구나라고 생각했지만, 그들 역시 놀란 눈으로 뜨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특히나 종말의 신은 불편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이건…….”

나도 한번 느껴 본 적 있는 신의 기운.

에레오나를 살리기 위해서 우레아의 힘을 빌렸을 당시, 내게 찾아왔던 또 하나의 격이 다른 신.

그녀의 상징이라 볼 수 있는 하얀 꽃 한 송이가 내 앞에 둥둥 떠올랐다.

[아이야.]

“균형을 수호하신다고 하더니, 웬일로 나타나셨나.”

예전에는 같은 공간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귀에서 피가 흐르며, 뇌가 쑤셔오는 고통이 일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나의 성장으로 인해서 그녀의 압력도 버틸 수 있게 된 듯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썩 좋지 않게 끝이 났기 때문에 좋은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여기에 나타난 이유 정도는 알 것 같았다.

[너를 돕기 위해 왔다, 틀을 벗어난 아이야.]

“그래, 그럴 것 같더라.”

내가 무언가를 묻기도 전에, 악신들 쪽에서 먼저 입을 열어서 그녀를 비난했다.

[지모신! 중립을 지킬 것이지 어딜 끼어드는 거냐!]

[늘 고고한 척하더니 결국 우리가 인간계를 삼키려는 때에 방해를 하는구나!]

숙명과 운명이 맹렬하게 비난을 하는 와중, 그들의 목소리를 끊는 종말.

[어찌하여 그를 돕는 것이지? 그대는 순리에 따라 흘러감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다. 우리가 인간계를 지배하는 것 역시, 순리일 뿐이다.]

[…….]

[우리가 인간계까지 삼키면, 그대가 더 이상은 우리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군?]

엔드는 무언가를 낚아챘다는 듯 조금 흥분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물어 왔다.

[우리가 그리도 두려웠는가? 절대적인 당신의 자리를 위협할 정도의 힘에 가까워졌는가?]

종말이 저렇게 빠르게 말할 수 있는 줄 몰랐다. 감정을 일절 내보이지 않던 그가 이토록 흥분했다는 것에 다른 두 신도 놀란 듯 보였다.

침묵하고 있던 지모신의 꽃이 살랑 흔들리며 답했다.

[부정하지 않으마, 이 이상 너희의 영향력이 커진다면 저조차 제어하기 힘들 것이라 판단했다.]

[결국 그렇군!]

종말이 클클거리며 명백하게 지모신을 비웃었다.

[역시 균형이니 뭐니 하는 건 다 핑계에 불과했어. 당신은 결국 절대자의 위치에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교만한 신에 불과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이야, 이 모든 것의 결과는 정해져 있단다.]

[뭐라?]

[너희는 결국, 이 남자에게 패배하고 말 것이다.]

지모신의 꽃이 내 앞으로 둥둥 날아온다.

설마 그녀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기에 신들의 대화를 잠시 듣고 있던 나 역시 놀란 눈으로 꽃을 바라봤다.

[그것이 정해진 끝이다]

[웃기는군, 지모신이라는 작자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고작 저 인간을 도와 우리를 막겠다는 건가.]

[종말의 아이야, 너는 누구보다 세상의 끝과 밀접하면서도 그 의미를 모르는구나.]

[가르치려 들지 마라.]

아까까지만 해도 해탈한 노인과도 같던 종말이 지모신의 앞에서는 마치 아이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그만큼 지모신의 깊이가 깊다고 볼 수도 있는 거겠지.

[종말에 대해, 단순한 끝으로만 생각을 하고 있구나. 종말은 결국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

[…….]

[오늘 너와 악신들의 종말로,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 되겠구나.]

천천히 지모신이 자신의 힘을 내게로 쏟으려는 게 느껴졌다.

거대하고 방대한 힘에 솔직히 처음에는 조금 놀라서 나도 모르게 받아들일 뻔했지만.

“거절한다.”

[…….]

나는 단호하게 그녀의 도움을 거절했다.

악신들마저 놀란 듯 아무 말도 없었다.

“신의 힘을 빌려서 신을 죽인다? 바퀴 잡겠다고 집에 개미 풀어놓는 격이군.”

어차피 지모신의 힘을 빌려서 이겨 봤자, 또 다른 코가 꿰이는 것뿐이다.

우리의 승리는, 오롯이 인간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어야만 했다.

[가능하다 생각하느냐?]

“내가 늘 말하지, 당신들은 우리를 너무 얕잡아 보고 있어.”

내 뒤에서 수많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신들이 등장할 때처럼 대지를 울려오며 전진한 이들은 결국 하나둘 내 옆에 서 주었다.

혁명군과 제국 기사단.

용과 정령들.

“혼자 싸울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어.”

합류할 시간을 벌어 줬다.

조금만 버티면 남은 잔당들을 소탕하고 내게 와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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