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내가 지하에서부터 습격을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놈들의 스페어 신체를 완전히 박살 내 버리기 위함이었다.
‘덕분에 그동안 죽여도 죽인 것 같지가 않았지.’
로그니다츠 세이야스는 이미 두 번이나 죽였고 아이란도 제도에서 이미 한번 죽였는데 버젓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놈들이 스페어 육체에 대한 방비를 가장 철저하게 했을 거라고 판단해서 일부러 기습 자체를 지하에서부터 해냈다.
테토가 있으니까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미친놈들이군.
“그러니까.”
무슨 짐승을 박제라도 해 놓은 것처럼 사람들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다. 그들의 명복을 빌며, 지하를 무너트린다.
스페어 신체들뿐만 아니라 거대한 구체 안에서 둥둥 떠다니는 수많은 영혼들.
펠리아의 눈을 통해서 처음 봤을 때는 이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을 계속했었는데, 이렇게 눈으로 보니까 확신할 수 있었다.
“그동안 악신들을 섬겼던 신자들의 영혼을 이렇게 따로 모아 놓은 거였네.”
자신들의 영혼도 옮겨서 다른 육체에 정착시키는 놈들이다.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가둬 두는 것 정도도 가능하겠지.
“왜 악신들을 섬기는 신자는 없는데 그렇게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이제야 알겠네.”
늘 그게 궁금했다.
질투와 폭식의 신 체체로, 탐욕과 단죄의 여신 렐, 정욕과 음기의 여신 메로아루아 등.
내가 살아 가던 시대에서는 모를 수 없는 신들에 대한 이야기가 쏙 사라진 현시대.
그럼에도 악신들을 섬기는 마교단장들의 권능은 누구보다 강력했다.
어떻게 가능한 건가 싶었는데 이제야 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사자들의 안식마저 방해한단 말인가.”
천천히 마나를 끌어모은다.
지하실 입구를 지키던 사제들이 지하에서 파고 들어온 내가 안쪽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는 걸 깨닫고 달려들고 있었지만.
“이미 늦었어.”
나의 마나는 거대한 구체들을 깨트리며 죽은 자들의 원혼을 달래 주었다.
오랜 시간을 악신들의 더럽고 추잡한 손아귀에서 놀아난 자들이다. 죽기 전부터 악신들을 섬기는 자들이었으니 죄 없는 자는 없겠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200년은 갇힌 상태에서 악신들의 양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이미 죽었는데.
“그 죄의 무게는 너희가 충분히 짊어졌다.”
벌은 충분히 받았으니, 이제 평안히 눈을 감길 바란다.
“안 돼!”
“저놈 죽여!”
“젠장! 하필이면!”
마교단장들이 가장 주의해서 지키라고 했던 것들을 내가 죄다 부숴 버리니 사제들은 분을 토하면서 어떻게든 나를 죽이려 했지만.
“너희도 삶을 넘어서, 악신들에게 종속될 뻔했던 걸 내가 구해 준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들이, 죽음 이후에도 고통받을 뻔한 걸 구해 줬더니 되레 성질을 내고 있는 모습이지 않은가.
무지하기에 그렇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전쟁.
속고 있는 그들이 불쌍하지만 봐줄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내성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힘없이 무너지는 내성과는 반대로 보호 마법을 치고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기 시작하자 악신들의 권능이 응축된 기운이 느껴졌다.
“드디어 납셨군.”
바로 그쪽을 향해 날아들자 내게 쏟아지는 권능의 포격. 수많은 권능을 마치 자신의 수족처럼 다루는 숙련도를 보여 준다.
“이 정도면 실망할 것 같은데?”
폭포처럼 쏟아지는 내성의 잔해들 사이에서 날아드는 권능들은 보통의 사람이라면 확실히 위험하긴 했을 거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고전을 할 거였다면 이 자리까지 오지도 못했다.
“괜히 잔해 속에 숨어서 이상한 짓거리하지 말지?”
응축된 마나가 그대로 쏘아져 나간다.
나를 향해 날아들던 성채의 잔해는 물론이고, 녀석의 권능들 또한 그대로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 버린다.
그러자 나의 마나의 끝에서 권능을 끌어올려 버티고 있는 한 남자.
저번에 봤을 때와는 다르게 길게 뻗은 백발과 고급스러운 비단옷을 입고는 있었는데, 예전 파이엔의 느낌이 딱 비슷했기에 투지가 솟구쳤다.
저쪽도 나를 알아봤는지 인상을 팍 쓰면서 노기를 담아 외쳤다.
“라엘 텔리즈먼!”
“그래, 네 얼굴 보니까 이제 끝을 낼 시간이 진짜로 왔다는 실감이 난다.”
이제 도망칠 곳은 없다.
제국 전체에 퍼져 있던 놈들의 근거지는 전부 박살을 내 버렸고, 지하에 있던 부활을 위해 갈아탈 육체들도 전부 매장시켰다.
여기서 놈을 죽이면 전부 끝난다.
“네놈이나 스승 년이나 끝까지 내 발목을 잡는구나!”
“200년이다.”
놈은 오롯이 분노에 차올라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조금 달랐다.
생에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벅차오름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응어리져서 올라오고 있었다.
저런 악인을 보면서 이런 감정을 느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전신이 짜릿하게 울려오면서도 길고 길었던 모든 것의 종착점이 보이는 듯했다.
“자그마치 2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우리의 패배를 바로잡고, 너의 죄악을 단죄하기 위해서 내가 찾아왔어.”
그 끝이 보이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전신의 마나가 울려오면서, 말도 안 되는 고양감에 휩싸였다.
“이제 모든 걸 끝낼 시간이다, 파이엔.”
“갈! 어딜 함부로 지껄이느냐!”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파이엔은 분명 느끼고 있을 것이다. 지금 자신과 나의 격차를.
200년 전, 죽음이나 다름없는 부상을 입고, 악신들의 손에 넘어가 인간이라는 개념을 버렸다.
지금의 파이엔에게는 신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수식언이었지만, 나는 이미 수많은 신들을 죽여 본 전례가 있었다.
“크억!”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쏟아내는 마법들에 결국 파이엔의 권능은 버티지 못하고 밀리며 그대로 땅으로 추락했다.
수많은 악신들의 권능을 자유자재로 다루면 뭐 하는가. 그 이상의 마법을 준비해서 쏘아 대며 끝인 것을.
피를 토하며 바닥을 구르는 녀석을 향해 계속해서 마법을 쏘아 대기 시작한 순간, 검은 갑주를 입고 있는 거대한 덩치의 남자가 파이엔을 낚아채며 그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듄…….”
정면에서 흑황 기사단을 상대하던 녀석이 파이엔의 위기를 눈치채고 바로 그를 구하러 왔다.
“너와도 풀어야 할게 많지.”
반쯤 죽인 적은 몇 번인가 있었지만, 늘 덩치와 다르게 미꾸라지처럼 잘도 도망치던 녀석이다.
바로 따라붙으려는 순간, 내게로 날아드는 파멸의 창.
수많은 망자들의 군세를 이끌고 있는 아이란이 어떻게든 나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자신의 전력을 허무하게 털어낸 것이었다.
“로그니다츠!”
빛의 정령왕에게서 가까스로 도망쳐온 로그니다츠 세이야스가 성벽 위에서 의사봉을 내리쳤다.
아까 전, 기사들을 향해 두 번의 선포를 내리쳤기에 이번이 세 번째, 맹세의 선포.
전장 전체를 짓이길 기세로 그는 시뻘겋게 얼굴을 붉히고 핏줄이 툭툭 튀어나왔지만.
“커억!”
빛의 정령왕이 만들어 놓은 부상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지하에 있는 붙잡혔던 영혼들을 풀어 줬기 때문인지 맹세의 선포는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로그니다츠는 피를 토했다.
그대로 놈을 죽일까도 생각했지만, 놈의 뒤를 따르는 소년을 보고 손을 거두었다.
로그니다츠 세이야스는 저 아이의 몫이었다.
‘그럼 나는…….’
아이란의 뒤를 따라 도망치고 있는 퓰리를 노려본다.
카밀라의 신체를 강탈해서 사용하고 있는 퓰리에게 날아든 나는 그대로 그녀의 목덜미를 낚아챈다.
“끄, 끄아아아악!”
발악하듯 소리를 치며 권능을 발동해보지만, 마나를 쓸 수 있는 나에겐 눈살을 찌푸리는 소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저번에는 내가 숙련도가 부족해서 네년을 봉인할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날 이후, 퓰리를 카밀라에게서 떨어트리기 위해서 수많은 연구와 더불어 연습도 해 왔다.
“가서 죽여!”
바로 옆에 있던 아이란이 급하게 자신의 권능을 끌어올리지만, 손짓 한 번 하자 바로 바닥을 구르며 날아간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그녀에게 있어, 처참해진 자신의 모습만큼이나 큰 굴욕은 없었다.
“놔! 이거 놔! 놓으라고오오!”
내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온몸을 비틀면서 눈물을 흘리는 퓰리를 보면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남의 몸에 함부로 들어가 있으면서 어디서 피해자인 척이야.”
누가 보면 내가 나쁜 놈인 줄 알겠다.
“자그마치 200년을 살아왔으면, 이제 그만 죽을 때도 됐지.”
반신이라 불리는 퓰리의 영혼을 카밀라에게서 끄집어낸다. 몸을 추스른 아이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으나.
결국 퓰리의 영혼이 내 손 위에서 이런저런 형상을 취하다, 내가 주먹을 쥐니 콰직 하고 연기처럼 흩날렸다.
“말도, 안 돼…….”
멍하니 나를 보고 있는 아이란.
기절한 카밀라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으니 테토가 바로 그녀를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켜 주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강해진 거지? 그 정도는 아니었잖아! 3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잖아!”
무슨 애처럼 아득바득 우기면서 사기라고 외치는 모습이 참으로 꼴사나웠지만, 그녀에게 썩 어울리는 최후라는 생각을 하며 비웃음을 입에 걸쳤다.
“그래, 그때는 나한테 부상이 있었으니까 힘들었지. 근데 말이야, 나는 언제나 너희를 죽일 준비를 하고 있었어.”
“…….”
“근데 왜 못 죽였는지 알아?”
천천히 아이란에게 다가간다.
그녀에게 기적을 줄 정욕과 음기의 여신 메로아루아는 하늘에서 용들과의 전투에 한창이었다.
한마디로, 이제 그녀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어 줄 존재는 없다는 뜻.
“너희가 바퀴벌레처럼 숨어다녔잖아. 이 벌레 새끼들아.”
“버, 벌레?”
황당하다는 아이란의 머리를 콱 낚아챈다.
퓰리처럼 발악을 하지도 않고, 로그니다츠 세이야스처럼 자신의 모든 걸 쏟아 대지도 않는다.
체념이나 포기와는 다른 느낌.
자신의 앞에 펼쳐진 이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나는 손에 조금 힘을 주면서 마나를 끌어올렸다.
“벌레면 벌레답게 찌그러져 있어야 그나마 살 수 있는데, 이렇게 일을 크게 벌리면 죽여 달라는 거랑 뭐가 달라.”
푸른 마나가 손에서 솟아오르고.
아이란이 먼지가 되어 소멸함과 동시에 성채를 가득 메우고 있던 그녀의 죽은 자들의 군대 역시 흙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사제들은 기사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죽어도 살아나는 군대 탓에 애를 먹고 있던 기사들과 혁명군에게서 환호성 소리가 들려온다.
그들 역시 직감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전쟁의 승리가 코앞까지 다가왔다고.
용과 정령들이 악신들을 상대하고 있는 지금, 마교를 전부 소탕해야 했고.
로그니다츠 세이야스는 이미 그를 죽이기 위해 찾아간 암살자가 있다.
내 눈에 보이는 두 사람.
이제 마지막으로 갑주를 입고 자신의 주인을 지키는 듄과 분노에 차서 당장이라도 나를 찢어 죽이겠다 외치는 천마주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