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검술에 관해서는 에레오나 쪽이 한 수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검을 잡은 세월로 따지자면 당연히 렉스턴 밀렌 쪽이 윗단이었지만.
그의 검에는 한계가 있었다.
마도제국이라 불리는 아르니티의 기사.
당연하게도 늘 마법보다 우선순위에서 떨어지는 게 검술이었고, 그는 그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 에레오나라는 재능 있는 소녀를 의붓딸로 데려왔었다.
에레오나는 자신의 가족인 다름없는 아이들을 전부 몰살시킨 렉스턴을 용서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지금 전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건 렉스턴 덕분이기도 했다.
“내가 만든 검이 내 목을 노린다니 웃기지도 않는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리고 있는 렉스턴 밀렌.
위험하다는 느낌보다는 마치 에레오나의 검을 시험하고 있는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깔보지 마!”
당연하게도 그건 에레오나의 심기를 자극했다. 더욱 거세지고 묵직해지는 검격이었지만, 오히려 렉스턴의 입가의 미소는 더욱 호선을 그렸다.
“그래, 그래. 이게 내가 만든 검이라 이거지.”
“닥쳐어어!”
에레오나의 심검이 폭발적인 기세를 뿜어내며 렉스턴의 오러를 깨부수려던 순간.
오히려 검을 살짝 비트는 것만으로 심검이 얇은 유리장처럼 깨진다.
“…….!”
그와 동시에 뺨을 스치는 렉스턴의 흉흉한 오러.
순간적으로 허리를 뒤로 틀면서 유연하게 피해 냈기에 다행이었지, 자칫 잘못했으면 그대로 목이 잘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스르륵 하늘에 풀어지는 그녀의 은색 머리칼.
격하게 피하느라 끝부분이 살짝 잘려나간 듯했다.
“이 개자식이…….”
자신의 머리카락들을 보면서 일격을 허용했다는 것이 더욱 에레오나를 흥분시키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 신의 힘에나 의지하는 남자에게 자신이 패배한다?
그것도 그토록 오랜 기간 복수를 다짐했던 남자에게?
절대로 안 된다.
에레오나에게 있어 이 세상의 모두에게 패배해도 괜찮았지만, 렉스턴 밀렌에게는 패배하면 안 된다.
자신이 죽어서라도 죽여야 한다.
검을 얼마나 강하게 쥐었는지 손바닥에서 뿌득 소리가 날 정도였고 에레오나가 달려들려던 순간.
“야, 정신 차려.”
심드렁하니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
“라엘?”
라엘 텔리즈먼은 지금 멀리서 마나에 관한 장치가 부서지는 걸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떻게 싶었지만, 라푼젤의 녹색 바람이 눈에 보였다.
“지금 목소리부터 흥분한 게 딱 티가 난다. 침착하게 심호흡해. 톨레스 님이 말씀해 주셨잖아. 심검은 마음의 안정이 제일 중요하다고.”
“…….”
“내가 렉스턴이랑도 싸워 보고 너랑도 싸워 봤잖아.”
라엘 텔리즈먼이 렉스턴 밀렌과 황실에서 싸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면서도 부럽기도 했었다.
물론, 당시의 렉스턴은 지금처럼 악신의 권능을 사용하지는 않는 평범한 기사였지만.
그럼에도 라엘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무조건 이겨.”
“큭.”
저걸 응원이라고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렉스턴 밀렌은 제국 최고라 칭해지며 황족들을 지키는 황금빛 수호의 기사단, 친위대의 단장이었다.
나이가 들어서 노화된 신체 능력도 악신의 권능을 통해서 훨씬 펌핑되었으며, 세월이 쌓여 노련한 검술은 아무리 에레오나라 하더라도 방심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 남자는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무작정 자신이 이길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 준다.
‘짜증 나.’
속으로 짜증이 나는 걸 애써 숨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쉬운 사람이라는 걸 라엘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라푼젤이 목소리만 보내 줄 수 있는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고작 이 정도 말만 듣고 침착해져서는 기뻐하고 있다니.’
가볍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름 시간을 들여서 차근차근 응원해 주면 좋겠는데.
그래도 이미 풍족할 정도로 자신감이 차오른 에레오나는 차분하게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럼, 믿고 맡겨도 되겠니?
음성을 전해 주던 라푼젤의 물음에 에레오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서는 여전히 전투가 한창이었다.
혁명군과 죽음의 기사들은 서로가 서로의 심장을 노리며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난투를 이어 가는 와중.
사방에서 굉음처럼 울려오는 병장기들이 전력으로 맞부딪치는 소리, 죽음의 기사들이 마수처럼 뿜어 대는 트림 같은 비명과, 혁명군의 악에 받친 기합 소리.
많은 이들이 바닥에 쓰러져 눈을 감고, 그럼에도 그들의 시체를 무시한 채로 다들 앞으로 나아가며 검을 휘두른다.
그런 와중에, 에레오나의 심검은 한없이 투명해져서,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것만 같은 색을 띄우게 되었다.
“…….”
렉스턴 밀렌도 이제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감정적인 성향이 짙은 에레오나 같은 경우는 노련한 노장, 렉스턴 밀렌에게 있어서 인형처럼 가볍게 상대할 수 있는 상대였다.
아무리 검술이 뛰어나고, 심검을 다룰 수 있고, 몸놀림이 민첩하면 뭐하겠는가.
결국엔 불같은 성격이 그 모든 걸 태워 재만 남겨 두어 버렸는데.
그렇기에 일부러 렉스턴은 지속적으로 입가에 미소를 걸면서 에레오나를 도발했다. 사탕을 빼앗긴 아이처럼 달려들던 모습을 보며 승리를 확신했으나.
‘위험하군.’
오랜 기간 검을 쥐고 있었던 만큼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렉스턴의 입장에서는 지금의 에레오나 같은 상태가 가장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불꽃이 타오르는 것만 같아 보이면서도 그 안에서 잔잔함이 있었다.
거칠던 기세를 스스로가 다스리며 제어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달인처럼 에레오나가 앞으로 치고 나왔고, 렉스턴이 검을 내리치는 순간.
격렬한 소음과 함께 렉스턴의 오러가 단박에 깨진다. 순간적으로 뒷걸음질 치는 렉스턴과 흩날리는 은발.
“당신을 만난 걸 늘 후회해. 음지에서 당신을 마주친 그날을 나는 평생을 저주해 왔어.”
차가운 목소리.
에레오나의 검이 그대로 렉스턴의 보검을 한 번 더 거칠게 휘몰아쳤고, 그의 검이 방금 전의 오러와 같이 산산이 부서져 나간다.
매일 밤, 함께 음지에서 살던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지옥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서 살려 달라고 자신에게 손짓하던.
소년 소녀들의 뻗어진 손은 쇠사슬처럼 에레오나를 구속하고 있었고, 그것을 놓을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업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나는 당신을 넘어서 앞으로 나아갈 거야.”
200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자신의 업을 짊어진 남자를 보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죄책감까지 짊어지진 않았다.
정확히는 모든 걸 이겨 내고, 버려 냈다.
200년 전의 삶이 아니라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이 모든 전쟁이 끝나고, 퍼지가 자유의 몸이 된다면 라엘 텔리즈먼과 도장을 차리기로 했다.
자신은 검도를 가르치고 라엘은 마법을 가르치는.
“그 녀석과 같은 미래를 보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미안하지만, 이제는 나를 놔줬으면 해.
렉스턴 밀렌의 심장에 정확히 찔러 들어가는 검. 맑다 못해 투명한 심검은 마치 두부처럼 렉스턴의 피부를 꿰뚫었고.
“끄, 어억!”
그와 동시에 에레오나를 옥죄이던 아이들의 사슬이 하나둘 끊어지기 시작한다.
사실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하던 아이들이라면, 자신을 증오하는 게 아니라 행복을 바라고 있을 거라는 걸.
그럼에도 그 족쇄를 놓지 못하던 건 에레오나였으나.
“이제, 그만 놓아줄게.”
살짝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은발의 여인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 * *
성채 안쪽으로 들어온 톰과 하트 그리고 자벨린 부대원들. 뒤에서 들려오는 혁명군 동료들의 비명 소리나 전투 소리에 발길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전진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오늘의 전투가 끝이다.
그들의 안에는 그런 희망이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계속 피어오르고 있었고, 그것들이 발걸음과 무기를 쥐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주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아마 성체 중앙에 있을 거야. 이 정도 위력을 내는 장치면 크기가 보통이 아닐 테니까.”
돌격대장 톰이 앞장서고 하트가 의견을 내면서 이들은 빠르게 이동했다.
성채 안쪽은 오히려 텅 비어 있는 상황.
바깥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는 대비되는 광경에 자벨린 부대원들은 묘한 불안감을 느꼈지만, 어쨌든 그들은 계속해서 안쪽으로 전진했다.
“듄이 어디 있나 했네.”
이동하다 보니 뒷문 쪽이 아닌 정문 쪽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는데, 볼트론 기사단장을 필두로 하는 기사들이 전신에 문신을 한 마교단장 듄을 상대로 고전을 하고 있었다.
일당백의 기세를 뿜어 내며 듄은 말 그대로 혼자서 기사들을 막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정면은 썩 좋은 상황이 아니야. 빨리 찾아야 해.”
아이란의 권능인 시체를 일으키는 능력은 어느 정도 반격을 할 수는 있었지만, 듄이 참전하는 순간부터 본대 측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숫자가 많기에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었지, 듄은 전장의 검은 폭풍이 되어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부숴 대고 있었다.
“너무 마음 쓰지 마. 어차피 우리가 해야 하는 건 하나야.”
안쓰러운 눈으로 기사단을 바라보는 하트에게 일침을 날리는 톰. 그녀는 톰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는 게 수치스럽게 느껴지긴 했지만, 어쨌든 맞는 말이기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엘이 오면 다 해결되니까.”
라엘 텔리즈먼만 전장에 합류시킬 수 있으면 전쟁은 끝난다.
그런 믿음으로 그들은 결국 성채의 중심부로 보이는 거대한 홀에 들어갈 수 있었고.
홀 중앙에는 큼지막한 기계가 가열차게 돌아가고 있었으며, 그 앞에는 안경을 쓰고 백의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박사야!”
“저게 기계다!”
바로 준비해 온 소형 폭탄을 던졌다.
정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연습을 해 온 것처럼 똑같이 판단한 부대원들이었지만.
그들의 폭탄은 박사의 근처를 데굴데굴 구를 뿐 아무런 폭발도 일으키지 않고 어질러졌다.
“뭐야?”
“부, 불발인가?”
“젠장 하필 이런 때에!”
톰과 자벨린 부대원들은 당황했지만, 하트만이 유일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불발이 아니야.”
이렇게 많은 숫자가 동시에 불발일 리가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폭탄을 몇 번이나 확인했던 하트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무언가 힘이 작용하고 있다.
“클클클.”
박사는 묘한 미소를 띠면서 자신들을 깔보고 있었다. 전투 능력은 전무한 주제에 태평한 그가 거슬렸던 톰은 바로 토마호크를 던져서 그의 머리를 쪼개려 했으나.
뚜벅 뚜벅 뚜벅 뚜벅.
거대한 홀에 울려오는 누구보다 묵직한 발걸음.
마른하늘에 먹구름이 다가오는 게 보이는 것처럼 그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부대원들은 찌릿하게 울려 오는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존재만으로도 역사의 증인이며, 인간임에도 신이라는 이름을 짊어지게 된 남자.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다섯 명의 마교단장들이 무릎을 꿇는 존재.
천마주교 파이엔.
그가 홀의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