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미안하다.”
렉스턴과 죽음의 기사들에게 쫓기며 전력에 구멍이 생긴 레온의 처진 목소리에 나는 걱정 말라 위로해 주었다.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우리 쪽에도 기사들은 많으니까.”
“하지만…….”
“내가 오늘 저녁 중으로 한 번 갈게. 에레오나랑은 어때?”
“상태가 좋다고는 할 수 없어.”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레온.
목소리와 말투에서부터 짙은 근심이 묻어 나왔다. 그녀와 렉스턴의 관계에 대해서 레온에게 간단하게는 전해 들었기에 역으로 더 아쉬웠다.
‘차라리 그때 확실하게 죽였어야 했는데.’
렉스턴이 젤롬의 명령을 받아 제라니를 죽이러 왔을 때 확실하게 끝장을 내야 했다.
괜히 어중간하게 제압하려고 들었던 게 화근이 되어서 오히려 마교 쪽에 붙어 우리에게 검을 들이밀고 있었다.
수정구를 통한 통신을 끝낸 이후, 텐트 밖으로 나오니 뉘엿한 저녁.
기사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텐트 근처에서 검이나 방패를 손질하거나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대마도사님! 식사하셨습니까?”
흑황 기사단의 볼트론 장군이 마치 아이처럼 순박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나를 불렀다.
갑옷도 검은색으로 입고 있는 모습이 정말로 검은 곰처럼 느껴져서, 괜히 친근함을 느끼며 그가 손으로 털며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여기 간단히 통조림들이 있는데, 뭐로 드시겠습니까?”
“으음, 속을 좀 달랠 것도 있나요?”
“토마토 스프는 있습니다.”
“하나 먹어 보죠.”
그는 괜히 기사단장이 아니라는 듯 굉장히 익숙하게 단검으로 통조림 뚜껑을 따더니 내게 숟가락과 함께 건네줬다.
‘흐음.’
토마토 스프는 처음 먹어 보는지라 슬쩍 내용물을 보자니, 붉은색이 뭔가 마녀가 가마솥에 끓이는 마법 약품이라도 먹는 기분이 들었다.
냄새도 조금 고약한 느낌이 들었고.
한 입 먹어 보니 맛도 사실 썩 좋지는 않았다.
독특한 신맛이 강렬하게 혀를 찌르고 들어오는 게 처음에는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묘하게 어디서 먹어 본 기분이 들었다.
“흐흐, 토마토 스프라는 게 원래 그렇습니다. 그냥 파스타 소스를 마시는 기분이 들죠.”
“그렇게 말하시니까 확 알겠네요. 진짜로 토마토 소스를 사 오신 건 아니죠?”
휙 통조림을 들어 확인하니 그렇진 않다.
제국어로 분명하게 토마토 스프라고 적혀 있었다.
‘묘한 맛이야.’
그러면서도 일단은 열었으니까 계속 입에 넣는다. 사실 물자가 부족한 편은 아니었기에 남겨도 누구도 뭐라 하진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그것보다 저건 정말 신기하군요.”
옆에 둘러앉은 흑황 기사단의 라마크 아데스가 저 멀리 서 있는 검은 성채를 가리키며 말했다.
라마크의 말에 볼트론 역시 고개를 끄덕이면서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제국 중심에 저런 성채가 서 있었다니.”
“아마, 그렇게 오래된 건 아닐 겁니다. 신이라는 작자들이 기적이라도 부린 거겠죠.”
내가 정령계에 있는 2년 동안 지어진 듯했는데, 아무래도 권능을 통해서 눈을 속여 왔던 듯하다.
예전부터 마교는 이런 일에 굉장히 능했다.
겉으로 봤을 때는 아무것도 없는 폐허다.
누가 봐도 허허벌판이 펼쳐져 있었지만, 그들이 권능을 푸는 순간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수많은 시체가 괴이한 모습으로 놓여 있을 수도 있었고.
이번처럼 갑자기 성채가 하나 툭 하고 나타나 있을 수도 있었다.
‘태양신의 이름도 사칭하던 놈들이니까.’
거짓과 기만의 신 흑두사를 통해서 태양신의 이름마저 강탈해 200년 동안 자신이 스스로 태양신인 척하던 녀석들이다.
천마주교 파이엔까지 부활한 듯하니 뭐가 두렵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포위만 하고 있어도 문제없는 거 아닐까요?”
라마크의 말에 볼트론 역시 고개를 끄덕였고 그 의견에는 나 역시 동의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풀리진 않을 거예요. 저놈들이 워낙 더러운 꿍꿍이에 전문적인 놈들이라.”
보통이었다면 단순히 성채를 포위하는 것으로 이미 전투는 이쪽의 승리가 확실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놈들이 어떤 짓거리를 할지 모르는 상황.
어차피 시간은 우리 편인지라 가능하면 신중하고 차분하게 나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저쪽에 있는 군대는 혁명군이지요?”
이빨로 포크를 잘근잘근 씹고 있으며 볼트론이 물어 왔다. 라마크 아데스도 그게 궁금했다며 내게로 시선이 쏠렸고.
“예, 맞습니다.”
나는 숨기지 않고 답했다.
기사단과 혁명군.
오랜 시간을 싸워 오고 서로에게 검을 휘둘렀던 사이라서 그런지 썩 좋은 표정은 짓지 못하고 있었다.
“저들도 요번 전쟁에서 저희를 도와줄 겁니다. 제가 대마도사가 되기 전에 혁명군이었거든요.”
“……!”
볼트론과 라마크 아데스가 혹시 주변에서 누가 듣지는 않았을까 하고 눈치를 살피곤 작게 속삭인다.
“대마도사님, 그런 발언은 굉장히 위험하십니다.”
“맞아요, 괜히 말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이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저랑 같이 대침공 당시에 싸우셨으니까 아실 거 아니에요.”
“끄음.”
“그렇긴 하죠.”
볼트론 장군은 당시 마수왕이 되었던 데오르그와 싸웠었고, 라마크 아데스는 부상을 당했던 나를 위해서 직접 시간을 끌어 줬었다.
“나는 내가 한 일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제국을 지키기 위한 그 검에 괜한 것을 담지 마세요.”
“…….”
“여러분께만 말씀드리자면 이번 전쟁을 끝으로 퍼지라는 제도는 이제 사라질 겁니다. 같잖은 전통에 얽매인 노예제도의 폐지이지요.”
“……!”
“진심이십니까?”
충격을 받은 두 사람.
둘이 퍼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몰라도 당연히 부정적인 시선으로 받아들일 거로 생각했는데, 왜인지 둘은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으음, 생각보다 안 놀라시네요?”
“사실 저희끼리는 술자리에서 한 번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대마도사님께서는 혁명군으로 활동을 하셨으니까 퍼지를 없애려는 게 아닐까 하고요.”
“술자리에서요? 꽤나 좋은 안줏거리가 되었겠군요.”
얼마나 씹어 댔을지 모르겠다며 장난을 치니 두 사람은 고개를 저으며 웃어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퍼지를 사람이 아닌 단순히 짐승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라마크 아데스의 말을 볼트론이 이어받는다.
“대마도사님도 퍼지 출신이시니까 혁명군에서 싸우고 계신 게 아닌 건가 싶었습니다.”
“뭐, 맞긴 합니다.”
세례를 받지 않은 자를 당시에는 퍼지로 규정했으니 굳이 따지자면 나도 퍼지이긴 했다.
“대마도사님과 저희의 다른 점에 대해서 심도 있는 토론을 이어 갔죠. 결국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오히려 우리보다 뛰어난 분이다.”
클클거리며 웃어 대는 볼트론 장군.
그는 허탈하면서도 쿨하게 인정했지만, 그 눈동자에는 묘한 부끄러움이 담겨 있었다.
“어리석은 신념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온 저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하루였습니다.”
“저 역시, 제 아들에게 차별을 하지 말라 가르치면서 눈앞에 있는 거대한 차별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사죄하듯 고개를 숙이는 두 남자를 보면서 나는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어서 작게 웃어 주었다.
“괜찮습니다, 이렇게 직접 깨달으신 것만 해도 대단하신 거예요.”
“대마도사님은 참 어려운 길을 걸으시겠군요.”
“제도에 있는 부패한 대주교들의 뿌리를 뽑는 것부터 시작해서 퍼지들의 자유라니. 상상도 못 한 시대가 올 것 같습니다.”
“뭐, 그것도 이 전쟁에서 승리를 한 다음이겠지요.”
다 먹은 통조림을 내려놓으며 기지개를 한 번 켰다.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오는 놈들의 검은 성채.
‘저번에는 여기서 패배했다.’
200년 전에는 결국 패배하여 마교에게 모든 걸 넘겨주게 되었고 꼴사납게 도망치고 말았다.
다시 한번 찾아온 기회.
‘또다시 역사를 되풀이하진 않을 것이다.’
녀석들은 다시 제국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기 위해서 수많은 악신들을 불러들이고 있었는데, 놈들의 성채 위에만 겹겹이 깔린 불길한 먹구름이 눈에 띄었다.
그 당시에는 천마주교만을 상대하는 것도 벅찼지만, 이번에는 악신들까지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다르기에.
주먹을 꾹 쥐며 다시금 투지를 불태우는 순간.
“…….!”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는 찢어지듯 울고 있는 여자의 울음소리.
슬퍼서 울고 있다기보다는 기쁨과 환호의 부르짖음이라는 느낌이 들었으나,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카밀라!”
내가 알고 있는 목소리.
늘 다른 사람을 배려하면서, 자신이 지은 죄가 아님에도 그 죄책감을 이겨 내기 위해서 봉사와 헌신을 자처한 여인.
하지만 지금은.
마교단장 퓰리에게 그 육체를 빼앗겨 버린 가련한 비극의 여주인공.
울려오기 시작한 퓰리의 울음소리에 나는 급하게 마나를 끌어올리며 외쳤다.
“다들 귀 막아!”
근접전에서 가장 약한 마교단장은 아이란과 퓰리이다.
굳이 따지자면 이제 아이란은 근접전에서 나름의 해법을 준비한 것 같으니 퓰리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하지만 당연히 근접에서 약한 만큼 이런 대인전에서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도 두 사람이었다.
특히나 절대다수를 상대로 싸우는 전투에서.
퓰리의 힘은 절대적이라 말할 수 있었다.
눈물과 절망의 여신 아도리아의 신자, 퓰리.
그녀의 울음소리가 라디오타워에서 울리던 내 목소리처럼 근방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기사단의 눈이 충혈되고 혈관이 튀어나오며 괴로워하기 시작했지만.
마나를 끌어올린 내가 소리를 차단하는 막을 생성한다.
훨씬 더 크게, 더 거대하게 만든 막은 이내, 괴로워하고 있을 혁명군에게까지 닿은 후에야 멈췄다.
“성문을 걸어 잠그고 이런 식으로 하겠다?”
아무래도 퓰리의 목소리를 울리게 만드는 도구를 박사가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은데.
신구의 조합.
200년을 살아온 짙은 어둠과 현시대 최고의 과학자가 만들어 낸 광범위 공격.
‘하지만 이쪽도 충분하다.’
마법사를 만능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나는 놈들의 각종 더러운 술수들을 분명하게 대응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나.
텅! 하고 날아오는 보랏빛의 무언가.
그것은 정확히 나를 노리고 쏘아졌으며 동시에 보라색 연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마나의 흐름이 엉키며 마나의 막이 사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