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어릴 적, 음지에서 생활하던 소녀는 자신과 같은 고아들에게는 골목 대장이자, 건달들에게는 성질 더러운 꼬맹이였다.
몇 살 되지도 않았으면서 성인 건달들과 맞먹으며 본인 친구들이 맞고 오거나 돈을 뺏기고 오면 가감 없이 나서서 되찾아오는.
코에서 코피가 터지고, 눈이 붓더라도 소녀는 늘 승리해서 돌아왔고 그녀의 찬란한 은발은 음지의 아이들에게 승리의 상징과도 같았다.
당시 어머니와 함께 살던 레온 엘 라디어트 역시 그런 에레오나의 모습에 감화되어 그녀의 뒤를 따랐던 것이었고.
“예? 아저씨는 누군데요?”
늘 음지에서의 사건은 뜬금없이 벌어졌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친위대 대장의 행차.
건달들은 물론이고 그들에게 갑질을 하며 뇌물이나 받아먹는 팔독 기사단도 보이지 않던 거리.
황금색 갑옷을 입은 남자는 어떻게 알았는지 에레오나를 보더니 손을 내밀며 제안했다.
“나는 렉스턴 밀렌, 친위대의 기사단장이지. 너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하마.”
자신을 따라와 양녀로 들어오면 시궁창 같은 지금의 삶을 180도 바꿔 주겠다는 제안에.
“싫은데요?”
에레오나는 당연히 거절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의 사람이라 생각하면 놓지 않는 그녀의 신념을 눈치챈 렉스턴은 제안을 바꿨다.
“나를 따라온다면 너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훨씬 좋은 시설로 옮겨 주마. 다만, 네가 내 교육을 잘 따라온다면 말이지.”
“…….”
처음 보는 남자이지만 그의 뒤에 도열한 황금색 갑옷의 기사들과 노예시장에 왔던 귀족들한테나 날 법한 향수 냄새를 풍기고 있는 그를 보며.
에레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들어 팔독 기사단과 동네 건달들의 테러가 심해진지라 다치는 아이들도 많다.
이 남자가 수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무언가를 원하니까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일 테고.
에레오나는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가족과 같은 친구들에게 말한 이후, 렉스턴을 따라갔다.
아직 어린 소녀가, 자신의 친구들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소녀가 렉스턴을 따라가서 배우기 시작한 것은 굉장히 뜻밖에도 검술이었다.
“동방에는 검사가 마법사를 능가한다고 하더군. 그러니 이제 이걸 교본으로 삼아 마법을 능가하는 검사가 되는 거다.”
“예!”
“에레오나, 네게는 재능이 있다. 그 푸른 눈동자에 타오르는 투지와 욕망 그리고 신념. 게다가 어린 나이에 팔독 기사단과 건달들과 싸우는 패기. 넌 분명 최고의 검사가 될 거다.”
이때 뭔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해야 했다.
어떻게 내가 건달들이나 기사단이랑 싸웠던 걸 알고 있는 거지? 하고.
하지만 아직 어렸던 에레오나는 그런 건 생각하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을 친구들을 위해서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마법에 자격지심이 있던 렉스턴은 그 흔한 오러조차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오롯이 검술.
그래, 검술만을 그녀에게 가르쳤고 에레오나의 재능을 알아본 렉스턴의 눈은 정확했다.
어느새 시간이 지나, 년 차가 쌓이고.
그녀는 늠름한 검사가 되어 있었다.
음지로 가지 못하는 햇수가 늘면서 한동안 아예 방문조차 못 했지만, 마지막에 들렀을 때는 다들 풍족한 물자에 행복해하고 있었다.
집도 다른 곳으로 옮겨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며 다 같이 옹기종기 모여 생활한다.
다들 기뻐했지만 그러면서도 에레오나가 어서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에레오나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내일 마도사와의 대련이 잡혔다. 거기서 너의 가치를 입증하면 정식으로 나의 후계자로 삼으마.”
렉스턴 밀렌의 말에 에레오나는 알겠다 답하며 그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이제 감옥에 갇힌 것 같은 생활이 끝난다.
그의 정식 후계자가 된다면 다시 아이들에게 돌아가서 같이 생활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에레오나는 당장에라도 친구들을 보고 싶었기에 뛰어난 신체 능력을 이용해서 창문과 담장을 넘어 늦은 밤 음지로 향했다.
그리고.
몇 달간 찾아오지 못했던 아이들의 기숙사는 불에 타 사라져 있었다.
근처 주점에 물었더니, 팔독 기사단이 와서는 반란분자라며 전부 숙청을 했다는 것.
실의에 빠진 에레오나는 너무 충격적이라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해가 떠오르는 걸 보며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마도사와 대련했지만.
넋이 나간 그녀가 꼴사납게 패배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리석은 년! 고작 그거 하나 제대로 이겨 내지 못해!”
자신이 키운 검이 마법사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렉스턴은 단호하게 에레오나를 버렸다.
그녀에게 렉스턴 암살 누명을 씌우고 그대로 처형을 시키려 했던 것.
“왜? 왜 우리 애들을 죽인 거죠?”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에레오나는 눈물을 흘리며 렉스턴에게 물었고, 그는 쓸데없는 소리라며 답했다.
“네가 내 후계자가 되었다면 음지 출신이라는 걸 숨겨야 하는 건 당연하다! 흔적을 남길 수는 없는 게 당연한걸! 이런 걸 깨닫지도 못하다니!”
이런 년에게 자신의 시간을 투자했다며 잔뜩 화를 내는 렉스턴을 보며 에레오나는 그에게 검을 휘두르고 그대로 도망쳤다.
수많은 기사들이 그녀를 쫓았지만 유려한 몸놀림의 단련된 검사는 그들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뒤, 렉스턴에게 복수를 위해 혁명군에 들어갔고, 과도한 공격성으로 무리하게 자벨린 부대를 운용하다 레펠리아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라엘 텔리즈먼이 그녀를 구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에레오나의 이야기.
이런 세상에서는 참으로 흔했지만, 그녀에게 있어서는 평생의 트라우마가 되어 주박처럼 자신을 기다리던 아이들이 온몸을 속박해 왔다.
마침내 오늘.
“렉스터어언!”
그 원흉을 끊어 내고 복수를 할 시간이 찾아왔음을, 에레오나는 직감했다.
두 사람의 검이 맞부딪친다.
에레오나의 심검과 렉스턴의 오러.
둘은 팽팽하게 맞부딪쳤으나 실은 렉스턴 밀렌이 아무리 대단한 기사라고 하더라도 지금의 에레오나를 이길 수는 없었다.
마교단장 듄이라는 넘지 못할 산과 같은 남자를 목표로 삼았고, 그보다 더 높은 라엘 텔리즈먼이라는 남자의 옆에 서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아직 젊은 그녀의 감각과 육체는 말 그대로 명인이 빚은 도자기처럼 아름다웠고 균형 잡혔으며 유려했다.
그에 반해 렉스턴 밀렌은 훈련을 게을리하지는 않았지만, 친위대 단장이라는 높은 위치에서 오랜 시간을 앉아 있던 남자다.
나이도 꽤 들어 육체의 노화가 진행 중이었고, 확고부동한 정상이라는 위치는 그를 이빨 빠진 호랑이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크윽!”
당연하게도 밀리기 시작한 렉스턴 밀렌과 그를 더 몰아붙이는 에레오나.
점점 흥분해서 검에 잔뜩 힘이 들어갔지만, 그럼에도 분명하게 렉스턴을 죽일 수 있다 확신했으나.
렉스턴의 전신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권능?”
검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힘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남자가 바로 렉스턴 밀렌이었다.
진정한 힘은 결국 육체이자 손에 박인 굳은살이라는 게 신념이던 남자는 웃기게도 최후의 최후에는 신의 권능에 의지하고 있었다.
다만, 그게 상당히 효과가 좋았다는 게 문제였다.
그가 검을 휘두르면 주변에 있던 혁명군 단원들이 날아가 버린다.
에레오나는 달인이라 부를 수 있는 기술로 검을 흘리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맞부딪친다면 바로 손이 부러짐을 직감했다.
“젠장!”
조급해진 에레오나는 어떻게든 활로를 뚫기 위해 말을 몰아 기교와 같은 움직임으로 그의 검을 피하며 갑옷에 검을 박아 넣었으나.
권능이 담긴 갑옷은 에레오나의 심검에도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같잖구나!”
더욱 퍼지는 권능에도 에레오나는 어떻게든 저 남자의 목을 베겠다는 집념에 빠졌고, 그렇기에 시야가 좁아졌다.
“에레오나!”
다급히 자신을 부르는 레온의 목소리에 에레오나는 잠에서 깨듯 주변을 둘러봤다.
어느새 너무 깊숙한 곳까지 렉스턴을 쫓아온 자신을 발견한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뒤로 물러나고 싶지는 않았다.
저 남자에게 다시 등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무시하고 강행하자! 싸우지 말고 돌파하는 거야!”
“무슨…….!”
레온 역시 참담한 심정으로 말하고 있다는 걸 에레오나도 알고 있었다.
죽음의 기사들을 레온의 빛의 권능으로 약화시킬 수 있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었지만, 저쪽에는 제대로 힘을 쓰진 못해도 어쨌든 신이 있다.
맹인과 병자의 신 타뷸란.
빛의 신 라헬과 비교하면 그렇게 대단한 신은 아니었지만, 지금 인간계에는 악신들의 힘이 더 강세인 것도 있었고 진짜 신과 신의 힘을 빌리는 인간이라는 차이가 너무 컸다.
“어쩔 수 없어, 어떻게든 라엘이랑 합류는 해야 뭐라도 해 볼 수 있을 거야.”
결국 제대로 힘조차 쓰지 못한 혁명군은 말 머리를 틀어 정면 대결이 아닌 우회를 시작했고.
에레오나 역시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고 말 머리를 돌렸다.
죽음의 기사들과 렉스턴 밀렌의 역할은 혁명군과 제국의 기사단이 합류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기에, 그들은 당연히 뒤를 쫓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던 그 날 밤처럼.
“끄아아아아아!”
에레오나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러 댔고, 렉스턴 밀렌은 조소에 가까운 비웃음을 입가에 걸고 있었다.
이렇게 근접한 상태에서 죽음의 기사들을 뿌리친다?
당연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나.
저쪽에는 권능과 신이 있다면.
이쪽에는 마나와 마법사가 있었다.
금발의 소녀 앞에 그려지는 거대한 마법진.
그녀는 무리의 가장 뒤쪽에서 에레오나가 마지막에 합류하는 걸 확인한 이후, 마나를 쏟아 넣었다.
“이게 용의 마법이라는 거예요!”
쏟아지는 브레스에 휩쓸리기 시작한 죽음의 기사들.
그녀의 마법은 말 그대로 전장의 판도를 뒤집기에 충분했으나, 그렇다고 그녀가 홀로 압도적인 존재라는 건 아니었다.
맹인과 병자의 신 타뷸란이 앞장서서 브레스를 막아 내기 시작했다.
죽음의 기사들이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고, 브레스를 막아 낸 타뷸란은 인상을 찌푸리며 금발을 흩날리는 소녀를 노려봤다.
-어디서 이걸 배웠는지 몰라도 네년은 곱게 죽을 생각하지 말거라!
마법을 쏘아 낸 엘리나는 그대로 말을 몰아 도망쳤고, 생각보다 멀어진 혁명군과의 거리.
-놓칠 거라 생각하느냐!
타뷸란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뒤를 쫓았으나, 거리가 벌려졌기 때문인지 레온의 검에서 빛의 권능이 발동 중이었다.
“그래, 빛의 신께서도 한몫해 주셔야지!”
신이 나서 외치는 레온.
마치 횃불을 든 것처럼 그는 빛이 뿜어져 나오는 자신의 검을 치켜든 채로 혁명군의 가장 앞에서 달려나갔고.
찬란한 빛에 결국 죽음의 기사들은 추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