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팔미산이라. 옛날에 스승님이 이런저런 얘기를 해 주셨던 장소였지.”
“이런저런 얘기요?”
옆에서 듣고 있던 노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 당시의 추억을 회상하며 작게 웃었다.
“금강불괴라는 도인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어. 그리고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늙어 죽지 않는단 얘기도 있었고.”
“흐음, 진짜일까요?”
“당연히 아니지.”
노아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소문의 진위를 알고 있었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용들.
수 세기를 살아가는 그들이었기에 죽지 않는다는 얘기가 나왔을 거고, 금강불괴 같은 괴상한 소문도 퍼진 것이겠지.
“알로이스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꽤나 열심히 살아가고 있구나.”
그가 늙은 몸을 이끌고 어째서 이곳에 왔는지에 대해서도 이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겠지.
펠리아의 눈은 용들의 보물이기에 용에게 건네준 것이고, 그걸 건네주면서 용의 마법을 배울 생각이겠지.
‘후, 이미 줬거나 들켰겠지?’
벌써 팔미산 중턱까지 올랐음에도 알로이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가 용들에게 펠리아의 눈을 줬다면 또 골치가 아파진다.
마교를 쫓는 데 쓴다고 잠깐 빌려 달라고 하면 빌려줄까?
“절대 안 빌려줄 것 같은데.”
“네?”
“아냐, 그냥 늙으신 분들은 소유욕이 강하시다고.”
그렇게 계속해서 정상을 향해 걷고 있자니 느껴지는 인기척. 노아가 바로 인상을 찌푸리며 주먹을 쥐었는데, 상대의 살기가 그야말로 폭풍과 같이 우리를 덮쳐 왔다.
“오늘은 인간이 참 많이도 찾아오는군.”
녹색 머리의 여인은 어느새 바위 위에 걸터앉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짝 보이는 송곳니가 당장이라도 우리를 향해 날아들 것처럼 흉흉한 빛을 띄웠다.
나를 지키겠답시고 앞으로 나선 노아를 뒤로 물리며 일단은 내 소개를 한다.
“라엘 텔리즈먼이라고 합니다. 혹시 알로이스 뫼르엔 델폰이라는 노인이 이곳을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일단 무릎부터 꿇어라.”
그 이후에야 제대로 이야기를 들어 주겠다며 으르렁거리지만 나는 웃으며 답한다.
“지나가셨지요? 그분을 찾아서 왔습니다.”
쿠웅!
순간, 여인의 손이 초록빛을 띄우는 발톱으로 변해서는 내게 날아들었으나 이미 쳐 두었던 보호 마법에 막혔다.
“오호?”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린 여인은 반대 손도 기괴하게 커지더니 계속해서 내리치기 시작했다.
“이거이거, 비실비실한 그놈이랑은 조금 다르구나?”
“이래 보여도 인간들 중에서 최고의 마법사입니다.”
“어딜 그깟 명예를 들이미느냐. ‘고작’ 인간 중에 최고의 정도로는!”
그녀의 연격에 결국 나의 보호 마법이 깨졌고 그대로 갈기갈기 찢어발기겠단 의지를 담은 일격이 날아들었으나.
콰득.
바닥에서 솟아오른 순백색 쇠사슬이 그녀의 양손을 결박했다.
“이게……!”
당황한 그녀는 온몸을 비틀면서 풀어내려 했지만, 역으로 계속해서 솟아오르는 쇠사슬이 그녀의 전신을 결박했다.
“세월이 참 오래 지났지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 ‘고작’ 용이 인간에게 대드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은 시간이 왔습니다.”
“네놈이 감히이이이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역린을 툭 한 번 찔러주니 바로 반응이 온다.
우드득 우드득 하는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여인의 몸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쇠사슬이 그 크기를 감당치 못하고 끊어진다.
아름다운 녹색 비늘을 가지고 있는 용은 포효와 함께 나를 단번에 삼키겠다는 듯 바로 아가리를 들이밀었지만.
“예전에도 당신들은 당신네가 최강인 줄 알고 까불다가 신들한테 그렇게 당해 놓고.”
바로 앞에서 일어난 폭발에 그녀는 입과 코에서 검은 연기를 뿜으며 충격에 뒤로 물러난다.
“아직도 그 버릇이 안 고쳐졌습니까.”
“닥쳐라아아!”
날개를 펼치고 곧바로 하늘로 날아오르는 녹색 용.
노아에게 잠시 다녀온다고 말한 이후, 나도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오만하니까 그렇게 당한 겁니다. 그렇게 당해서 꼴사납게 팔미산 정상에서 숨어 있으면서, 아직도 그 쓸모없는 자존심은 여전하군요.”
자욱하게 낀 안개구름 속에서 녹색 브레스가 뿜어져 나온다. 내 존재 자체를 녹이겠다는 분노가 담긴 일격이었지만.
“후우웁!”
로그나디츠 세이야스와 여신 렐의 세 번째 맹세의 선포까지 버텨 낸 나로서는 크게 버티는 게 어렵진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손이 조금 뜨겁긴 했지만 어쨌든 버텨 냈고.
“말도 안 돼!”
용은 자신의 최강의 일격이 막힌 것을 보며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모두가 세월이 흐르며 성장하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인간도, 신도, 심지어는 그 길고 긴 삶을 살아가는 정령들마저도.”
정령계도 지금 대대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며, 태초의 정령들이 깨어났으니까.
“그런데 오롯이 당신들만이 그 자리에 가만히 있습니다. 그건 단순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아닙니다. 퇴화 중인 겁니다. 아주 느리게.”
당신들은 모르게.
“닥쳐라!”
용의 모습으로 달려들어 반응하려 했으나 갑자기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그러고는 위에서 인간의 형태로 발톱을 휘두른다.
나름의 페이크를 준 것 같지만 그 수가 너무 얕았다.
지팡이를 들어 올려 그녀의 공격을 쳐 낸 후, 지팡이에 마나를 끌어올려 창의 형태로 만든다.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걸 보면 무투가 중심인 용인가 본데.’
전신을 강화했다는 의미인 붉은빛이 떠오르며 바로 앞으로 치고 나가자, 그녀는 등에서 날개가 펼쳐지며 애써 떨어지지 않고 막아 낸다.
“크으윽!”
“그 무거운 배를 가지고 저와 싸울 수 있겠습니까?”
“네놈이!”
계속된 도발에 그녀는 눈이 뒤집어질 것처럼 분노하며 일갈했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내게 유의미한 피해는 주지 못하고 계속해서 뒤로 밀릴 뿐이었다.
그녀에게 지팡이를 거칠게 내리치자 결국 자세를 잡지 못하고 뒤로 밀렸고, 준비하고 있던 마법들이 사방에서 그녀를 덮치기 시작한다.
총 서른 개의 마법.
육탄전을 벌이면서 준비해 둔 마법이었고, 첫 한두 개는 막아 내었지만 하나를 허용하니 그대로 나머지 것들을 모두 몸으로 받아 냈다.
아무리 맷집이 좋은 용이라도 내 마법을 정통으로 맞고는 버틸 수 없었기에 흰자를 보이며 그대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쿵!
떨어진 위치를 보아 아까 우리를 마중했던 그곳과 크게 멀지 않아서 내려오니, 이미 나를 마중하고 있는 수많은 용들.
여인이 쓰러진 근처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이들을 보며 나는 싱긋 웃었다.
“저쪽이 먼저 쳤습니다.”
“우리의 둥지에 찾아와 놓고 말이 많구나.”
곱게 늙은 붉은 머리의 여인이 나를 향해 이빨을 보이며 으르렁거렸다.
덩치가 가장 큰 빡빡머리의 남자는 바로 나를 향해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쓰러진 여인을 내려다보고 있는 나이를 알 수 없는 노파도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용들은 총 10마리.
학장님은 보이지 않는 거로 보아 전부가 오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중 가장 중앙에 있는, 다른 용들과는 다른 어마어마한 기운을 뿜어 내는 상처투성이의 중년의 남자가 나를 향해 물었다.
“네놈, 이름이 뭐지?”
“나도 200년 전에는 몰랐는데 요즘 시대에는 그런 말이 있더랍디다. 남의 이름을 물을 때는 본인 이름부터 밝히라고.”
“미친놈이!”
“감히 인간 주제에!”
바로 발끈해서 달려들려는 용들.
내가 무서워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아직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기에.
중앙의 저 남자가 손짓 한 번만 하면 바로 치고 나와서 나를 찢어발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름, 그래. 이름이라…….”
남자는 마치 머릿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는 듯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천천히 하지만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임페리얼. 세상 모든 것의 위에 앉은 자라 불리었던 용이다.”
“임, 페리얼?”
감히 이름을 입에 담냐고 주변에 있는 용들이 또 발광을 해 댔지만,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1차 신령대전을 이끈 용의 황제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고?”
“신령대전. 아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
짐짓 눈가에는 쓰디쓴 감정이 스치듯 반짝였으나, 그에겐 이미 모든 건 지나간 과거일 뿐이었다.
용들이 오래 산다고는 들었는데, 앞에 있는 용은 거의 정령 수준으로 오래 살아왔다.
그야말로 대륙 역사의 산증인.
오히려 거슬린다는 듯 임페리얼은 나를 향해 되물었다.
“내가 아는 신령대전은 한 번이었다. 1차라 부른다는 건 본디 두 번째 신령대전이 있었다는 말로 들린다만.”
그러자 다른 용들도 퍼뜩 놀라며 나를 노려봤고 호응하여 고개를 끄덕여줬다.
“얼마 안 됐습니다. 악신에게 인간계를 빼앗긴 신들이 결국 정령계를 침공했고 정령들은 멸망할 위기에 처했었죠.”
“그런가.”
한때나마 같이 싸웠던 전우인 정령들의 소식에도 그는 별 감흥을 보이지 않았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구나 정도.
“한낱 인간이 어찌하여 그런 걸 알고 있는지 말해 보거라.”
이제는 명령조로 말하는 임페리얼이 거슬렸지만 일단은 답해 줬다.
“제가 그 전쟁을 종식시켰으니까요. 제2차 신령대전은 정령계가 파멸 직전까지 몰렸지만 그래도 패배는 하지 않았습니다. 영토를 되찾았고 휴전을 위한 토론이 한창이죠.”
“핫.”
임페리얼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간다.
“하하하하핫!”
그리곤 지천에 울리는 웃음소리.
다른 용들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멍하니 쳐다만 봤고 임페리얼은 한참을 웃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로 나를 바라봤다.
“언제 웃어봤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영겁의 세월이 흘렀건만, 네가 그 시간을 깨는구나.”
“뭐가 웃깁니까?”
노려보며 묻자 임페리얼은 고개를 젓는다.
“고작 인간이 정령과 신의 전쟁에 끼었다는 허세는 어디서 배운 것이냐. 아느냐? 우리가 신들과 싸울 때, 네놈들은 불을 보며 좋아했다, 돌을 깎아 생활했다, 동굴에 들어가 몸을 뉘었다.”
“…….”
“미개한 인간아, 거짓에 잠식되어 진실을 외면하지 말거라. 체르마닌을 쓰러트린 건 훌륭하나 그대는 감당치 못할 말을 입에 담았다.”
“진짜 미치겠네.”
처음엔 헛웃음이 새어 나왔는데 곧이어 그건 조소로 변했다.
“예의를 차려 주니까 당연한 줄 아는 게 아주 거슬렸는데, 이제 못 참겠다.”
콰드득 소리와 함께 내 주변의 바위들이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변의 용들도 바로 전투 태세를 취하며 언제든지 명령만 하면 달려들겠다는 기세를 보였으나, 임페리얼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발산한 마나가 무지갯빛을 띤다.
그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네놈, 정녕 인간이 맞는 거냐?”
무언가 떠오르는지 임페리얼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 왔고, 나는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놈을 겨누었다.
“생각해 보니까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네.”
피식 비웃음과 로브를 살짝 들어 올리고 고개를 숙이며 자기소개를 했다.
“내 이름은 라엘, 라엘 텔리즈먼. 대륙 마도의 정점입니다.”
곧바로 떠오른 바위들이 용들을 향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