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다음 날 어지럽게 올라오는 숙취 속에서 눈을 뜬다. 황실에서 쓰던 고급 이불과 침대 같은 느낌은 당연히 없지만, 오히려 이쪽이 더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싼티 나긴.”
스스로 자조하며 일어나서 씻은 후, 대충 정리를 한 다음 밖으로 나섰다. 조금 이른 아침이긴 했지만 벌써 다들 일어나서는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라엘 님!”
어제는 제대로 보지 못해서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자니 헤니가 웃으면서 다가온다.
“혹시 숙취 해소제 필요하세요?”
어제 내가 많이 마신 걸 봐서인지 슬쩍 품에서 꺼내 드는 헤니. 왜 그걸 품에 지니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나 정돈하면서 몸의 숙취도 빼냈어.”
괜히 계속 숙취를 가지고 찝찝하게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자 헤니가 혀를 내두른다.
“와, 어제 가장 많이 드셨던 것 같은데 아무렇지도 않으시겠네요.”
“몸이 조금 무거운 느낌이긴 해.”
오랜만에 왔다고 여기저기서 술을 따라 주고, 권유하고 하다 보니 꽤 휘둘리긴 했다.
“으음?”
대충 몸을 풀고 있는데 마을 끝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흐름.
“아참, 어제 스승님이 라엘 님한테 뭐라고 했냐면…….”
“뭐, 지금 내 몸 상태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범위이긴 하지.”
헤니와 함께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마나가 움직이고 있는 장소로 향했다. 건물 옥상에서 지팡이를 치켜들고 서 있는 금발의 여자아이.
“와아.”
엘리나가 움직이고 있는 마나는 하늘의 구름처럼 떠오르며 멋들어진 광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잠깐 얘기 좀 하고 올게.”
“예, 저는 아침 준비하러 갈게요. 꼭 드시러 오세요!”
제자랑 둘이 얘기하고 싶다는 걸 알아챈 헤니가 방실 웃으면서 자리를 피해 준다.
나는 엘리나가 있는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고 그녀의 뒷모습은 참으로 애틋하게 내 가슴을 울려 왔다.
‘…….’
스승님의 지팡이까지 사용하다 보니 정말로 스승님이 단순히 어려진 것처럼 보인다.
“요즘 아침마다 이렇게 연습하거든요.”
“좋은 습관이야.”
괜히 페르난도가 자신과 비교를 해야만 했던 게 아니라는 걸 다시금 느낀다. 용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엘리나는 3년 전과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스승님, 다시 가실 건가요?”
“……그래야지.”
아무리 그래도 내가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늦어도 오늘 저녁 전에는 출발할 생각이었다.
그러자 엘리나는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지팡이를 내밀었다.
“이 지팡이, 스승님의 스승님이 쓰시던 거죠?”
“그렇지.”
“참 저랑 많이도 닮은 분이시네요. 제가 진짜로 그분 환생 아니에요?”
저렇게 털털하게 얘기할 줄은 몰랐기에 헛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예전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솔직히 이제는 잘 모르겠어.”
상자에 넣어두었던 주제였다.
라마닉스에서 만났던 비틀린 크리스티나는 지금 그녀가 가지고 있는 지팡이 ‘제국의 태양’에 남은 스승님의 기억과 마법을 토대로 만들어졌던 가상의 인물이다.
이렇게 되어 버리니 다시금 문제가 돌아온다.
그러면 스승님의 시체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내가 스승님을 지키기 위해 공을 들여서 만들어 놓은 방어 마법을 도대체 누가 깬 걸까?
그것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승님의 시체는 왜 가져갔는가.
‘아니, 스승님이 살아있을 가능성도 아직 남아 있지.’
죽음의 신과 싸울 때, 이미 죽었던 엘리나의 심장을 대신해 준 펜던트 속의 마법.
그건 내가 알던 스승님의 마법과 굉장히 흡사했고, 그만큼 고차원의 마법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따라 하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던 마법을 지금이라면 얼추 비슷하게는 할 수 있을 것 같긴 하다만.
만약 스승님이 그 펜던트를 만들었다면 마리아가 엘리나를 주웠던 10년 전까지도 살아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내가 그런 고민을 하는 걸 눈치챈 건지 슬며시 앞으로 다가온 엘리나.
“사실 이 지팡이에 담긴 크리스티나 엘리나의 기억이 저한테도 있어요.”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깜짝 놀라며 되묻자 엘리나는 어색하게 볼을 긁적인다.
“아무래도 라마닉스에서 만났던 크리스티나의 잔재가 조금 남아 있던 것 같아요. 스승님 오시기 며칠 전에 갑자기 나타나서는 기억을 넘겨주더라고요.”
“……..”
“스승님 그때는 완전 애기시던데.”
“야! 그때는…….”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엘리나에게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바로 눈치챘기에 결국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건데요.”
엘리나가 진지하게 말한다.
“이건 조금 안타까운 말일 수도 있지만, 스승님의 스승인 크리스티나 엘리나가 살아 있을 가능성은 없는 것 같아요.”
씁쓸한 감정이 그녀의 입을 타고 넘어온다. 왜인지 그런 말을 할 것 같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아팠다.
“동굴에 들어가시기 전에 지팡이를 마교단장에게 빼앗겨서 이후의 기억은 없지만, 그때 당시 스승님의 스승님은 마나가 정말 극소량밖에 남지 않은 건 물론이고.”
숨을 고르며 사죄하듯 엘리나는 말을 이어간다.
“마교단장들처럼 200년의 시간을 직접 맞으며 버틸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황금빛의 마나를 이용하여 나를 차원이 뒤틀린 동굴 속에서 지켜 주시긴 했지만, 그건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던 마법임을 알고 있다.
만약 스승님이 살아 계시다면 마교단장들처럼 200년을 바깥에서 견디셨다는 얘기.
황금빛의 마나가 있으면 가능할 수도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망쳐서 홀로 살아갈 수도 있었다.
모든 이해관계는 다 제쳐 두고 억지로 그런 식으로 상상을 해 보아도 결국 결말은 불가능이었다.
왜냐면 우레아가 모르고 있으니까.
황금빛 마나는 우레아의 권능이기에 그가 모를 수 없었다.
결국,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엘리나의 말처럼 스승님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0%.
“그렇구나.”
힘이 빠지는 대답이라 생각했는지 엘리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사죄를 했지만, 오히려 고맙다고 말해 준다.
“덕분에 가능성이 하나 줄었어. 그렇다면 제3자가 스승님의 시체를 빼돌렸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예, 맞아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일단 가장 의심스러운 건 마교단장들이네.”
“그렇겠죠?”
이것들은 도대체 어디까지 관여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특히나 최근에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게 뒤통수가 간지러운 느낌이기도 했고.
“그래, 고맙다. 덕분에 스승님에 대한 의문이 풀려 가는 기분이야.”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아침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고, 엘리나는 꼭 달라붙어서는 따라왔다.
* * *
“후으.”
점점 해가 떨어지기 시작한 저녁.
원래는 점심만 먹고 바로 가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늦어졌다.
엘리나를 데려갈까 고민을 조금 했지만, 아직 제도가 안정화 도중이기에 그냥 두고 왔다.
괜히 레온이나 혁명군 애들이 이상한 짓 하려고 하면 막거나 나를 부르라고 주의를 해 놓고.
레온은 조금 더 있으라며 꽤나 붙잡았지만, 생각보다 에레오나가 쿨하게 나를 보내 줬다. 뭔가 홀가분한 표정이기도 했고.
그렇게 하루를 꼬박 날아서 제도로 도착했다.
피곤하긴 했지만 쉴 시간은 없었기에 곧장 제라니 황제에게 달려갔다.
늦은 저녁임에도 제라니는 여전히 업무를 보고 있었다. 최근 눈이 나빠진 것 같다면서 안경을 쓰고 서류를 보고 있었고 옆에서 페르난도도 같이 붙잡혀서 일 처리를 돕고 있었다.
“나 왔어.”
“드디어 왔군.”
꽤나 기다렸는지 제라니는 한숨을 내쉬며 안경을 벗고 의자에 등을 기댄다.
“보니까 라디오 타워에서 계속 알리고 있는 것 같긴 하더라.”
“그래, 대주교들이 대거 정리되니까 이제 말을 잘 듣더군.”
마음에 든다며 입가에 미소를 걸친 제라니. 확실히 라디오 타워는 여론을 흔들고 조작하기에 굉장히 편하긴 했다. 황제의 입장에서는 절대 놓고 싶지 않은 카드였지만, 그는 일이 얼추 정리되면 라디오 타워도 폐국할 거라고 말했다.
언론의 자유를 풀어 주고 싶으니까.
제국민들이 여러 방면과 시각으로 정보를 듣고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게 제라니 황제의 바람이었다.
“어쨌든 수용소는 총 세 곳이야. 전부 제도 밖에 있고 지금 꽤나 분주하게도 움직이고 있겠지.”
일정 마나량이 넘으면 무조건 체포를 하던 법률이 폐지된다. 라디오를 통해서 한창 이 사안에 대해서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고 제도는 찬반이 확실하게 엇갈리며 치열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지만.
“무조건 통과시킨다.”
황제의 결정 사안이었다.
이제 내일 아침이면 귀족들과의 회의가 시작될 것이고 빠르면 저녁에 결과가 나온다.
그 시간이 바로 내가 움직일 때였다.
퍼지들을 가둬 두는 레필리아 수용소와 마찬가지로 이번 수용소들도 꽤나 더러운 짓거리를 해 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들 역시 대주교들과의 연이 있었고, 주교들이 얻어오는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거기서 공수를 해 오고 있었으니까.
당시 그 기억을 읽었을 때는 역겨움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제일 큰 제1수용소는 내가 맡고, 2를 친위대가, 3을 페르난도랑 흑황 기사단인가?”
“맞아, 아직까지 자신들의 자리를 놓지 못하고 있기에 도망치지 않고 있겠지. 하루 종일 라디오만 붙잡고 있을 거야.”
그러다가 결과가 발표되면 그 즉시 싸 놓았던 짐을 챙겨서 도주하겠지. 혹은 자신들은 제국을 위해 일해 온 거라며 역으로 당당한 사람들도 있을 거다.
어찌 됐든 일망타진.
아무리 수용소의 수감된 사람들을 향해서라도 비인도적인 행위는 용서될 수 없었다.
단순한 체포라면 지금도 할 수 있었지만, 수용소를 완전히 없애면서 제국의 더러운 뿌리를 아예 뽑을 생각이기에 우리는 내일 있을 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갔다.
“아참, 그러고 보니까 렉스턴이랑 박사는?”
친위대를 이끌던 기사단장 렉스턴 밀렌과 펠리스 신학 연구소 지하에서 인체 실험을 하던 박사에 대한 이야기.
렉스턴 밀렌은 제라니의 방에서 아이란을 제압하던 당시 창문에서 떨어지며 도주했고, 박사는 펠리스 연구소를 제압했을 당시에 이미 자리에 없었다.
둘은 지금까지도 현상수배가 된 상태였기에 혹시나 했으나 제라니가 고개를 저었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전혀 못 찾고 있어.”
“흔적도 안 남았어.”
박사의 경우에는 벤트 몰란과 함께하던 걸 데오르그 기사단장의 기억 속에서 봤으니 분명 마교 측에 붙어 있을 거다.
그가 만들어 내는 안티 마나 장비들을 골치가 썩 아팠기에 가장 먼저 잡고 싶었는데, 눈치가 꽤나 비범한 녀석이었다.
렉스턴 밀렌 같은 경우는 방향성을 모르겠다.
아직까지 잡히지 않을 걸 보면 그 역시 마교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저 추측일 뿐이었다.
‘후우.’
아직 정리해야 할 게 많다는 걸 이렇게 나열해 보니 강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