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인간승리.
가장 처음 떠오른 단어는 그거였다.
그렇게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던 톰이 설마 에레오나와 사귀게 되었다니 놀라움을 넘어서 가히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과장을 하자면 동굴에서 나오고 세상이 200년이 지났다는 걸 알았을 때 정도의 충격?
솔직히 함께 맥주를 들고 걸어오는 에레오나와 톰은 썩 어울리는 커플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지는 무슨 상관인가.
본인들끼리 좋아하면 그만이지.
“충격적이세요?”
달빛에 안경알을 빛내며 장난스럽게 물어 오는 하트에게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이게 인간승리인가 싶을 정도로. 와, 엘리나보다 더한 성장을 이룬 사내가 여기 있었네. 대마도사의 직위를 이용해서 가장 성대한 결혼식을 해 주리라. 주례는 내가 한다.”
하객은 황가 일원들부터 줄 세우고 시작한다.
“쿡, 푸훗!”
웃음이 터졌는지 입가를 막으며 뒤로 넘어가는 하트.
왜 저러나 하고 갸웃거리는 에레오나에게 맥주잔을 받아 든 뒤에 톰의 어깨를 툭툭 쳐 준다.
“축하한다, 짜식아.”
“뭔 소리야.”
뜬금없이 무슨 말이냐고 묻는 톰을 보니 이 녀석이 나름 정신적으로 성장했구나 하고 뿌듯함마저 가슴에 퍼져 나갔다.
예전이었으면 그냥 바로 달려와서는 발정이 난 양 자랑해 댔을 텐데.
이제 우리 혁명군 짝사랑은 루이나만 남은 건가. 안쓰럽긴 해도 그 녀석은 나름대로 잘하고 있겠지.
“에레오나랑 사귄다며. 이야, 내가 말했지. 한 사람만 보라고. 그러니까 이렇게 성공하는 거 아니야.”
그러자 톰은 얼굴을 붉어지며 부끄러움을 숨기려는 듯 맥주잔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그대로 다른 곳으로 달려가 버렸고, 에레오나는 짜증 난다는 표정.
딱 상황을 보는 순간 알아챘다.
‘하트 이거 거짓말했구만.’
슬며시 눈을 돌리니 이미 하트는 사라져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조금 흥분한 느낌이 있기는 했는데 나를 이렇게 물 먹였단 말이지.
“하트야. 하트가 나한테 말해서 그렇구나 했던 거야.”
에레오나가 뭐라 하기 전에 빠르게 변명을 내뱉자 녀석은 한숨을 내쉬며 맥주잔을 내밀었고, 짠 하고 잔을 부딪친 후 같이 맥주를 들이켰다.
최근 입에 댄 것들은 황실의 파티에서나 볼 법한 와인이나 위스키 같은 고급술들이었고, 물론 맛도 있었지만.
왜인지 결국 마음이 편해지는 건 이 맥주였다.
“맛있지?”
“어, 맛있네.”
솔직하게 답하자 에레오나가 턱짓으로 멀리 있는 사람들 중 덩치 큰 남자를 가리킨다.
“해바라기 주점에 있던 부부도 이쪽으로 합류했거든. 여기 유일한 주점이야.”
“아, 어쩐지 음지에 갔는데 없어졌더라.”
“팔독 기사단한테 혁명군인 걸 걸렸거든. 겨우 빼낼 수 있었어.”
당시를 회상하듯 중얼거리는 에레오나.
조금 있다가 저 부부한테도 인사를 하러 가야겠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에레오나가 슬며시 나를 보며 묻는다.
“대마도사라니. 하나도 안 어울려.”
“200년 전에는 마도사였어. 이 정도 했으면 충분히 대마도사 할 수 있지.”
“그러면.”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꾹 다무는 에레오나.
무슨 일인가 싶어 슬쩍 눈치를 보는데 그녀는 톰이 내려놓고 간 맥주를 들고 마시며 물었다.
“다 끝난 다음에는 뭘 할 거야?”
“흐음.”
“마교도, 마교단장들도 다 죽이고. 퍼지들도 자유를 얻고 난 다음에는. 뭘 할 거야?”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돈다.
솔직히 예전만 해도 모든 게 끝난 삶을 대강 상상만 해 봤을 뿐이었는데 지금은 이제 곧 일어날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기분.
어렸을 때 내일 소풍 가자던 스승님의 말에 잠 못 들던 밤을 지새우던 때와 비슷했다.
톡톡 발바닥으로 땅을 두드리며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때도 대마도사로 살아가겠지. 이 자리는 생각보다 편하니까.”
하지만 하고 뒤에 덧붙인다.
“황실에 충성하고 그렇진 않을 것 같아. 아마 이름만 대마도사고 여행을 다니지 않을까? 그래, 식도락 여행.”
우선은 제국으로 시작하겠지.
각 도시의 특산품이나 맛집을 방문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마법을 쓰면 날아다니며 빠르게 이동할 수 있지만 그건 조금 운치가 떨어지지 않겠는가.
“말을 타고 돌아다니겠지. 아니면 걸어도 크게 상관은 없어. 원래 공복이 가장 큰 조미료니까.”
그렇게 열심히 걸어 다니다 배고픔에 지쳐서 쓰러질 것만 같을 때, 눈에 보이는 가게 아무거나 들어가서 식사를 한다.
일종의 도박이나 다름없는 행위. 맛집만 탐문하는 것도 좋지만 내가 스스로 맛집을 찾는 것도 썩 즐거울 것만 같았다.
“그렇게 계속하다 보면 제국에서는 이제 먹을 게 사라졌겠지. 그러면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거야. 합루스크 공화국에는 여러 나라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까 음식도 다양하게 있겠지.”
벌써 침이 고이는 기분.
“합루스크까지 끝내면 이번엔 동방의 나라로 한 번 가 보는 거야. 거기서 왔다는 음식들을 몇 개 먹어 봤는데 생각보다 입맛에 맞더라고.”
아마 그때는 이미 정령들도 돌아왔을 테니까 녀석들이랑 시끄럽게 웃고 떠들면서 다니면 지루하진 않을 거다.
운디네는 “우리 못 먹는 거 물이라도 뿌리자!”라며 투덜거릴 것이고.
“음식으로도 미를 추구하다니. 참으로 인간이란 대단……. 꺄아악! 저건 뭐니? 벌레 튀김? 치우렴!”하고 라푼젤은 호들갑을 떨어 댈 거다.
테토는 “이게 라엘 텔리즈먼의 에필로그군.”하고 나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의 죽음을 끝까지 눈에 담겠지.
내가 방 밖으로 데려온 플레임은 그때가 되면 인간을 향한 의문이 해소되었을 거라고 믿는다. “내가 봤는데 고기는 이런 식으로 굽는 게…….” 하고 오지랖을 부릴 것이다.
상상을 해 보니까 썩 나쁘지 않은 미래가 손쉽게 펼쳐져서 웃음이 나왔다.
엘리나?
엘리나는 아마 그때가 되면 나이 든 스승은 내버려 두고 자신의 마법에 열중하며 제국을 빛내고 있지 않을까?
미안하지만 아마 나 다음을 이을 대마도사는 그 아이겠지.
제라니는 나이가 어느 정도 들면 본인 자리를 후계한테 물려줄 생각이라고 했으니까. 물론, 아직 후계는커녕 반려도 없지만.
‘오히려 페르난도가 인기 폭발이지.’
스테아, 스테미 자매한테 코가 단단히 꿰여 버린지라 순진한 바보는 도망치지도 못할 거다.
“나는?”
나름 흐뭇한 상상을 하고 있는데 에레오나가 불쑥 끼어든다. 그러고 보니 대화하던 와중이었구나. 깜빡했다.
“나는 어딨는데?”
그녀의 물음에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을 해 보지만 썩 떠오르지가 않는다. 애초에 퍼지들이 자유를 거머쥐면 그녀에게도 자유가 찾아오는 걸까?
“모르겠네.”
솔직하게 답한다.
에레오나가 무엇을 할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무사 수행 같은 걸 하면서 강자들을 상대로 자신의 검을 연마하지 않을까?
그러자 에레오나는 피 하고 숨소리를 내더니 잔을 내려두고 입고 있는 가디건 주머니에 손을 폭 찔러 넣고는 시선을 멀리 두며 말했다.
“검술 도장을 열거야.”
“아아, 어울린다.”
팍하고 꽂혀 들어왔다.
확실히 에레오나라면 괜히 음식점이나 꽃집 같은 거 하는 것보다는 도장이 훨씬 어울렸다.
“하지만 요즘 도장은 꽤나 힘들 텐데.”
“실전 검술을 원하면 가르치기도 하겠지만, 보통은 다이어트와 건강을 위한 사람들이 찾아오겠지.”
“으음, 구체적이군.”
애들 훈련시키는 것처럼 거칠고 빡세게 할 줄 알았는데 강약조절을 할 수 있던 거구나.
그러면 뒤에서 대원들이 훈련 힘들다고 욕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당시에 훈련을 그렇게 시켰나 싶어 조금 소름이 돋았다.
“세인트 학교 입문반 같은 걸 해도 괜찮겠지. 검술 실기로 들어가는 방법도 있으니까.”
“오. 꽤 구미가 당기겠는데?”
“그치?”
굳이 세인트 학교가 아니라 다른 학교에도 기사 전형이나 검술 실기는 있으니까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에레오나는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까 나랑 동업하자.”
“동업?”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지만 에레오나는 마치 준비해 뒀다는 듯이 청산유수로 말을 내뱉어 대기 시작했다.
“내가 검술을 가르치는 도장 바로 옆에 네가 마법을 가르치는 학원을 여는 거야. 두 개 같이 배우면 할인 뭐 이런 식으로.”
뭐라 답하지도 않았건만 조급하게 계속 이어 간다.
“검술을 배우면서 마나를 다루는 것도 요즘은 필수가 되었으니까 분명 수요가 있을 거야. 네가 대마도사가 되었으니 마나 규제도 풀릴 거 아니야. 그렇지?”
“그치.”
안 그래도 현 황실에서 그걸 위해서 한창 움직이고 있는지라 내일이나 모레는 돌아가 봐야 한다.
이미 소스를 뿌린지라 지금쯤 라디오 타워에서는 그와 관련된 기사들을 한창 뿌려 대고 있겠지.
“그러니까! 마법을 배우는 사람들도 늘어날 테니 충분히 가능해. 어때? 지금은 권능 쪽이 더 영향력이 강하지만 분명 금방 마법 쪽 입시도 길이 뚫릴 거야.”
생각 없이 늘 검만 휘두르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준비를 많이 해 뒀다.
듣다 보니 썩 나쁘지 않긴 한데.
“야, 나 대마도사야. 그런 게 되겠냐?”
“뭐가 문제야. 오히려 대마도사가 가르치는 학원이라고 하면 사람들 엄청 몰려올 거라서 훨씬 좋은데.”
“맞긴 한데…….”
“제라니 황제랑 친하다며? 그 정도는 오케이 해 줄 것 같은데.”
“…….”
왠지 제라니라면 내가 차라리 황실 밖에 있는 게 마음이 편하다면서 바로 수락할 것만 같았다. 거기에 더불어서 좋은 터도 하나 구해 줄 수도.
“그러면 나 식도락 여행 못 가잖아.”
“애들 학교 방학처럼 우리도 타이밍 맞춰서 한 달 정도는 쉬어야지. 그때 가자……. 나랑.”
“흐음.”
엘리나 이후로는 제자를 둘 생각이 없다.
하지만 학생을 가르치기만 한다고 나는 제자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무릇 스승이란 제자의 모든 걸 책임지는 존재이니까.
세인트 학교에서 내 강의가 썩 인기가 많았던 걸 생각하면 분명 학원을 해도 잘되긴 하겠지.
듣다 보니 나쁘진 않아서 나는 웃으며 답해 줬다.
“그래, 가능하면 해 보자.”
“지, 진짜? 진짜지?”
본인이 물어봐 놓고 긍정적으로 답해 주자 오히려 깜짝 놀라면서 성큼 다가온 에레오나. 박력에 조금 당황했지만.
“거짓말을 왜 해. 그것보다 너 검사 안 했으면 사업가 해도 됐겠는데? 상세하게도 조사해 뒀네.”
“크흠.”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하며 뒤로 물러난 에레오나가 팔짱을 끼며 다시금 선언했다.
“약속이야?”
괜히 귀여워 보여서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래.”